102화
배부른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에서 단둘이 밤을 보내야 한다는 건 내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루베르가 떠나기 전 내게 했던 고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전 생에서도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에게 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해온 남자는 아예 없었으니까.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더 그런 걸 수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아스텔라?”
루베르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나를 바라봤다.
“네,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얼마나 내가 바보 같아 보였을까. 진심으로 방금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베르는 그런 내 모습에도 아무런 말조차 없었다.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면서 시선을 피하자 루베르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텔라, 혹시…….”
“왜, 왜요?”
꿀꺽.
침을 삼키며 애써 시선을 외면하려고 하던 그때, 갑작스럽게 내 이마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좀 쉬는 게 어떻습니까?”
“네?”
열이 날 수밖에 없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오늘 무리한 것 때문인 듯한데, 제 침대에서 조금 쉬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 침대에서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봤다.
캐노피가 쳐진 침대는 멀리서 봐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두 사람은커녕 세 사람이 누워도 거뜬할 정도였다.
그럼 옆에서 자겠다는 건가?
내가 고개를 돌려 루베르를 바라보자 그가 마치 내가 할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말입니다.”
루베르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붙잡더니 침대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스텔라!”
침대 근처로 가자, 익숙한 노란색 강아지 인형이 폴짝대며 나를 반겼다.
“포피, 잘 지냈어?”
나를 향해 달려온 포피를 안아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자 포피가 낑낑대면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포피는 당연히 잘 지냈지. 이제는 괜찮아?”
“응, 둘이 도와준 덕분에 이젠 괜찮아.”
루베르와 포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하자 포피의 귀가 허공에 펄럭거렸다.
저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내가 포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였다.
“그럼 어서 누워요. 더 무리했다가 몸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흥, 그건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내 품에 안겨 있던 포피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꼬리를 바짝 위로 올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신데.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포피의 등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포피?”
“루는 여기 와서 제대로 잔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 너보고는 쉬라고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러지!”
“뭐?”
나는 루베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게 사실이에요?”
“아, 그게 향을 끊고 나니 잠을 잘 방법이 없어서 말입니다.”
루베르가 그답지 않게 당황스러워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는 수면 향을 사용하지 않았겠구나.
무엇보다 그 일로 인해 그렇게까지 고초를 겪었는데 다시 쓸 수 있다면 더 무서운 일이지만.
“억지로 잠들어도 얼마 못 가서 깨더라고. 그 뒤로는 매일 밤새워가며 일한다니까. 언제 제대로 여기 누웠는지가 까마득해. 포피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뭐?”
잠드는 게 무섭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꿈속에서 또 무슨 일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자신이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루베르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루베르를 향해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루베르가 자연스럽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나와 거리를 벌렸다.
“지금 절 피한 거예요?”
“그게 아니라…….”
루베르가 말을 흐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귀 끝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안고 있던 포피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에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볼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아스텔라, 이게 대체 무슨…….”
“가만히 있어요.”
나는 빠르게 루베르의 얼굴을 살폈다. 정신이 없을 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제 하나둘 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마주한 루베르의 눈가가 어두웠다. 포피의 말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눈 아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루베르였다.
이런 와중에 나를 신경 써주었다니.
왠지 모르게 올라오는 울분에 나는 빠르게 루베르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은 일할 생각 말아요, 루베르.”
“네?”
“당장 침대로 들어가서 자야 할 사람은 루베르예요.”
내가 조금 더 힘을 줘서 루베르를 당기자 그가 속절없이 내게로 이끌려왔다.
나는 빠르게 루베르를 침대에 앉힌 후에 뒤로 밀었다.
“아, 아스텔라.”
“어서 자요.”
“네?”
루베르의 적안이 크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루베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루베르가 다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아스텔라가 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나는 다시 루베르를 뒤로 밀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베르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가?’
괜히 승부욕이 발동해 그를 확 밀치려고 한 그때였다.
“어!”
침대 기둥에 발이 걸린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대 쪽으로 넘어졌다.
털썩.
폭신한 침대의 감축이 느껴질 거란 생각과는 달리 무언가 딱딱한 게 느껴졌다.
이상하다?
고개를 들어 올려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본 나는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괜찮습니까?”
루베르가 나의 허리를 붙잡고 내 아래에 깔린 채로 물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담은 눈빛과는 달리 내 감각은 온통 그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 미안해요! 그럼 푹 쉬어요.”
말을 마친 내가 허둥지둥하며 옆으로 물러서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사실 잠을 자는 게 두렵습니다. 또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무섭고.”
낮게 울리는 루베르의 목소리에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루베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더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역시 두렵겠지.
나는 루베르의 옆으로 물러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스텔라?”
루베르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루베르의 손을 다독이면서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잠시라도 좋으니까 눈이라도 붙여요. 혹시 악몽을 꾸면 제가 깨워줄게요.”
루베르가 눈을 끔뻑대면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한참을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루베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이 제 곁에서 저를 재워주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냥 마음이 놓일 것 같으면 이렇게 있겠다는 거죠! 아니라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내가 손을 빼려고 하자 루베르가 다시금 내 손을 붙잡아 깍지 껴 잡았다.
“당신이 옆에서 저를 재워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 말을 뱉은 루베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루베르의 숨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자는 건가?”
“그래 보이는데.”
옆에 있던 포피가 가만히 루베르를 지켜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정말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이렇게 금방 잠에 빠져드는 것만 봐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면서 옆에 자리를 깔고 누운 포피를 바라봤다.
“너도 자게?”
“응, 루랑 오랜만에 함께 자보려고.”
유난히 포피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포피를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서 루베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참 잘생기긴 했어.’
유려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비집고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했다.
“피곤해.”
그러고 보면 나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
머릿속으로는 아직 란에 대한 걱정이 샘솟았지만, 몸이 피로한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어서 란을 구하러 갈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는 어느샌가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 * *
루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밖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눈을 감고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누워 휴식하고 나니 한결 나았다.
‘신기하군.’
평소에는 조금이나마 잠들었더라도 눈을 잘 붙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수면 향을 끊고 다른 위험이 있을까 싶어서 모든 약을 중단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푹 쉰 듯한 느낌을 받는다니.
루베르가 눈을 떠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그때였다.
“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이 루베르의 귓가에 맴돌았다.
루베르는 익숙한 아스텔라의 목소리를 알아채고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침대맡에 얼굴을 둔 아스텔라가 잠들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꽉 쥔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루베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빼내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대로 불편하게 누워 있던 아스텔라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색색.
곤히 자는 아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온몸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루베르가 아스텔라의 눈가를 가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 바로 그때였다.
“윽!”
잘 자고 있던 아스텔라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그녀가 신음을 내뱉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