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스텔라! 정신이 듭니까?”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이 얼굴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앞은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뿌옇고 흐렸다.
게다가 차가운 급류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던 탓인지 아직도 몸이 좀 추운 것도 같았다.
‘그래서 헛것을 보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지금 루베르를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이야.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려던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아스텔라!”
루베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나를 안아 들었다.
“괜찮습니까? 무리하면 안 됩니다.”
“진짜예요?”
“네?”
루베르가 당황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응시했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옴에 따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루베르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루베르? 정말 당신이에요?”
“네, 아스텔라.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위에서 뚝 떨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루베르가 내 몸에 묻은 거품을 털어주면서 물었다.
그나저나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아.”
머릿속에 아까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분명 란과 함께 도망을 치다가 급류에 휩쓸렸고, 란을 구한 다음에 폭포 아래로 떨어지다가…….
그래, 분명 그렇게 능력을 써서 순간이동을 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란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란에 대해서 들은 얘기는 없어요?”
“역시 함께 있던 건 그녀였습니까?”
루베르가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를 천천히 욕조 바닥에 내려놓았다.
따뜻한 물을 틀어놔서인지 안은 아직도 따스한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일단 이거부터 좀 걸치십시오.”
루베르가 방으로 들어가 가운 하나를 걸쳐주면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숲엔 또 왜 들어간 거고요.”
“숲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정보를 들었어요. 란이 그걸 듣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고요.”
“그래서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간 거란 말입니까?”
“혼자서 보낼 수는 없었어요.”
지금은 그곳에 란을 혼자 남겨두고 온 셈이 되어버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붙잡혔습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걸 피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화들짝 놀라며 루베르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숲을 돌고 있던 병사들에게 발각당해 지금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지금은 아스텔라, 당신을 찾아다니고 있고요.”
“이럴 수가.”
결국 이렇게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다니.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곳은 내게 맡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여기까지 들어온 겁니까?”
루베르가 나와 눈을 맞추며 자세를 낮추었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온 이상 숨길 수도 없었지만.
“플로라를 생산하던 장소를 옮긴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어요.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그곳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몰래 빼내 오려고 했죠.”
“그렇게 위험한 일을 상의도 없이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당신도 목숨을 걸고 이곳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있겠어요.”
루베르의 적안이 거세게 일렁였다.
“이 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였다면 진작 도망쳤을 거예요. 그게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잖아요.”
“아스텔라.”
루베르가 뭔가를 얘기하기 위해 입을 연 그때였다.
똑똑.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우리의 몸이 굳었다.
“대공 저하,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거기서 말하도록.”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루베르가 한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루베르가 욕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내일 오전 중에 알현실로 직접 들르라는 말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으니 이만 나가보도록.”
황제가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고 루베르를 부른다는 걸까.
궁금해서 좀 더 자세히 들으려던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그런데 꽤 오래 물을 틀어두신 것치고는 젖지 않은 상태군요.”
“내가 그것까지 그대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나?”
루베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상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조사해도 된다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잠시 조사하겠습니다.”
“이제는 멋대로 내 방에 드나들겠다고?”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기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여기서 들키면 끝이야!’
나는 주변을 빠르게 살피다가 빠르게 물속으로 숨을 참은 채 잠수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답답해질 때쯤 루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 정도면 만족하나?”
“……실례했습니다.”
넓은 욕실을 천천히 둘러본 기사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빠르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
거품이 있는 욕조 안이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게 아니었으면 분명 들켰을 게 뻔했다.
“아스텔라!”
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까지 듣고 난 루베르가 빠르게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루베르는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루베르,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요.”
“당신이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은 한 번쯤 겪었겠지요.”
루베르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 아스텔라.”
“네?”
루베르가 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대충 걸쳐져 있던 가운을 내려놓고서 다시 마른 수건을 덮어줬다.
“당신의 안위를 걱정한 내게 할 말은 없습니까?”
루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보는 루베르의 화난 모습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곳에 란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어요.”
무서운 루베르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그렇게 대꾸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요, 내가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움직였어야 하는 건데.”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곧이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루베르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내 볼에 붙은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넘겨주었다.
* * *
루베르가 화를 낸 건 그 한 번이 전부였다.
밖으로 나와 이불을 내 몸에 친친 감아준 루베르는 그대로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중간중간에 내 상황이 위태로웠을 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는 듯한 소리를 내긴 했지만.
“무사히 이곳까지 온 게 다행이라고 해야 했군요.”
내 말을 모두 전해 들은 루베르가 어느샌가 준비한 찻잔을 내게 건넸다.
따스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가니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그걸 마시면서 루베르를 보고 있으니 안도감과 더불어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곳에서 혼자서라도 이렇게 탈출한 게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란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줬는데 정작 나는 도망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스텔라.”
루베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내 볼에 손을 얹었다.
루베르의 손에 의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루베르가 올곧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란도 그걸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러니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 이제 란을 구하러 가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녀가 어디 갇혀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것만 알았어도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루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예상이 가는 곳은 있습니다.”
“네?”
“연구소에서 어떤 연구가 일어나고 있는지와 더불어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극비에 붙여집니다. 그렇다면 란도 황궁 안에 있는 감옥에 들일 수 없겠죠.”
“그렇다면…….”
루베르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이제야 감이 왔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자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네, 아마 란은 아직 그 숲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에게 그녀는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이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가야 해요.”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내 다짐이 루베르의 마음에도 닿은 것인지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루베르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은 다소 비관적인 말이었다.
“당신의 능력을 이용해 돌아가는 거라면 불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네?”
루베르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저편에 보이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아래에 마력 억제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력을 사용해 뚫을 수는 있지만, 금방 내가 사용한 걸 알고 이 방으로 들어오겠지요.”
“그렇다면…….”
“현재로서 아스텔라, 당신이 이곳을 나가는 건 무리입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요.”
“내일이요?”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입을 뗐다.
“그 말은 제가 지금 여기에 갇혔다는 소리죠?”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겠네요.”
루베르는 창밖을 계속해서 응시하다가 이윽고 커튼을 쳤다.
“아스텔라,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오늘은 이곳에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네?”
루베르가 천천히 내 머리에 걸쳐진 수건으로 머리칼을 매만져주었다.
“황제도 언제까지 연구소에 마력 억제기를 설치해둘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내일을 기다리기로 하죠.”
그 말은 즉, 루베르와 방을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