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잠깐.”
루베르가 고개를 치켜들고서 이내 포피를 바라봤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포피, 네 도움이 필요해.”
“뭐라고?”
포피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루베르를 바라봤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이 끙끙대던 포피가 이윽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지!”
아스텔라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에 와서 해볼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전부였다.
“포피, 부탁을 좀 해도 괜찮을까.”
“물론이지. 나한테 맡겨줘!”
포피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이내 두 손을 모았다.
“으으.”
포피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돌렸다. 아마 힘을 발휘하는 데 집중하기 위함인 듯했다.
아스텔라가 아무런 일 없이 성에 있길.
루베르는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면서 포피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포피가 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뒤로 돌아섰다.
“이상하다. 왜 안 되지? 분명 저번엔 이렇게 하면 됐는데.”
포피가 당황한 건 귀의 펄럭거림에서 다 드러났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루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젠장.”
이윽고 루베르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포피가 화들짝 놀라면서 루베르를 바라봤다.
“루, 지금 나한테 욕한 거 아니지?”
“아니야. 단지 왜 네가 힘을 쓰지 못하는지를 알 것 같아서.”
“응?”
루베르는 아까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기사들의 말을 떠올렸다.
그땐 아직 마력 억제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과연 어떨까.
루베르의 방을 나선 이후에 곧바로 그걸 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맞았다면…….
“마력 억제기가 틀어져 있다면 네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
“뭐야, 그럼 또 머리가 아파질 거란 말이야?”
포피가 몸을 파르르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때의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루베르는 포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를 위해 만들어뒀던 상자를 가져왔다.
“포피, 이 안에 들어가서 다시 능력을 사용해볼 수 있을까?”
“알겠어. 그거라면 가능해.”
포피가 다시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이윽고 포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루!”
포피가 펄쩍 뛰어오르면서 루베르를 바라봤다.
뭔가 알아내기라도 한 걸까. 루베르의 두 눈에 기대가 깃들었다.
“이상해.”
“뭐가?”
“아무리 해도 닿지를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루베르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마력 억제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 상자 안에서라면 분명 마력은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포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니? 루베르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야?”
“이전에 그런 적이 있긴 해. 포피를 놔두고 아스텔라 혼자서 훌쩍 사라졌을 때나.”
“뭐?”
“그때 루는 기절해 있어서 몰랐겠지만, 그런 적이 있었어. 갑자기 아스텔라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적이 있었거든. 그때랑 똑같아.”
그 건이라면 루베르도 대충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루베르는 예전 기억을 상기시켰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스텔라가 다른 이의 악몽에서 헤매고 있다거나 마력이 통하지 않는 장소에 있어서 위험한 걸지도 몰랐으니까.
“젠장.”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 듣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루베르는 진심으로 성으로 돌아가 아스텔라의 상황을 물어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스텔라는 그 정도로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이성을 유지하기는커녕 제대로 견딜 수조차 없겠지.
루베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나쁜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길 바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싫어지던 바로 그때였다.
“루!”
뒤에서 루베르를 부르는 포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맴돌았다.
루베르는 빠르게 뒤돌아 포피를 바라봤다.
“포피?”
“내, 내 몸이 이상해!”
포피의 몸 근처를 맴도는 푸른빛. 루베르는 그 빛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설마.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이 빛. 그 의미가 제발 자신이 알고 있는 바와 다르길.
루베르가 그렇게 바라면서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때였다.
“윽!”
위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옴과 동시에 루베르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루베르는 거의 반사적으로 아스텔라를 받아 들었다.
“아스텔라!”
“루베르……?”
아스텔라의 몸이 경련하듯이 파르르 떨렸다.
맞닿은 몸 사이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루베르가 빠르게 아스텔라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너무 추워요.”
아스텔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파랗게 질린 입술과 하얀 낯빛만 보더라도 금방 생명의 불꽃이 꺼질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본 루베르의 머릿속은 이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스텔라?!”
뒤에서 포피가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루베르는 곧바로 아스텔라를 안은 채로 욕실로 들어섰다.
쏴아.
욕실 안은 이미 채워둔 따뜻한 물로 인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루베르는 진작 물을 채워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천천히 아스텔라를 안아 든 채로 넓은 욕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새 루베르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렀다.
루베르는 아스텔라를 앉히며 그 옆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처음엔 이불을 덮어줄까 고민하긴 했지만, 젖은 옷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루베르가 겨우 생각해낸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하.”
아스텔라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자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움직였다.
루베르는 맞잡은 아스텔라의 손의 냉기를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아스텔라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렇게 절박할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길 바랐던 때가 있었던가.
루베르가 아스텔라의 몸 위로 가운을 입히면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뒤, 아스텔라의 볼에 불그스름한 생기가 감돌았다.
루베르는 그걸 보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베르가 안도의 숨을 내뱉던 바로 그때였다.
“하.”
아스텔라가 답답한지 몸을 틀어 루베르에게로 바짝 붙었다.
루베르의 몸이 자연스럽게 굳었다. 맞닿은 사이로 느껴지는 아스텔라의 부드러운 살결 때문이었다.
“루베르.”
아스텔라가 괴로운 듯이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루베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아스텔라.”
“루베르.”
이윽고 아스텔라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 아래로 보이는 어두운 밤하늘처럼 신비로운 잿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루베르는 그 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스텔라, 정신이 듭니까?”
아스텔라는 루베르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뻗어 루베르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 아스텔라?”
루베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가깝게 다가온 적은 카룬의 방에서 함께 옷장 안으로 들어갔던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사하구나.”
“…….”
“다행이다.”
아스텔라가 힘겹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곧이어 아스텔라의 머리가 루베르의 어깨로 떨어졌다.
숨을 천천히 몰아쉬는 아스텔라는 아까보다 상태가 훨씬 호전된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더운 공기에 너무 오래 노출된다면 아스텔라가 힘들어할지도 몰랐다.
방으로 아스텔라를 옮기자.
그렇게 생각한 루베르가 아스텔라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려고 한 그때였다.
“더워…….”
갑자기 아스텔라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이 입고 있던 가운을 내팽개쳤다.
물을 가득 머금은 가운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욕조 바닥에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베르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은 여과 없이 아스텔라의 몸매를 내비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지.
한참을 고민하던 루베르는 이내 결심하고서 고개를 돌린 채로 아스텔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씻고 나서 닦기 위해 놔두었던 수건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스텔라.”
루베르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욕실 가득히 울렸다.
아스텔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스텔라가 갑자기 텔레포트를 사용해 이곳으로 올 정도로 급박한 일이었겠지.
자신이 그곳에 있었어야 했다. 루베르가 침음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루? 괜찮아?”
밖에서 들려오는 포피의 목소리에 루베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회는 아스텔라를 무사히 방으로 옮기고 나서 하더라도 늦지 않았다.
루베르는 아스텔라의 몸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흐응.”
갑자기 몸이 들려서 불편했던 건지 아스텔라가 칭얼거리면서 루베르 쪽으로 딱 붙었다.
흡.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미친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계속 진동하는 건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진심으로 자신을 패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던 루베르가 아스텔라의 몸 위로 수건을 덮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그녀의 살결은 루베르의 온 신경을 곤두서게 했지만.
“하.”
루베르가 한숨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찰나, 아스텔라가 작게 움직였다.
“음.”
작게 신음을 흘린 아스텔라의 눈동자가 천천히 뜨였다.
“아스텔라?”
루베르는 그 짧은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아스텔라의 눈이 뜨이는 걸 확인한 루베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베르?”
눈을 마주친 아스텔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깃든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