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96)화 (96/120)

96화

“하녀복을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집사는 그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고 옷을 준비해달라는 우리에게 협조했다.

친밀도를 찍어놓으면 좋은 게 바로 이런 거 아니었을까.

“여기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내가 입을 옷을 준비해 가져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집사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우리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노력할게요.”

내가 옷을 갈아입을 태세를 취하기가 무섭게 집사는 밖으로 나갔다.

“란.”

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를 위한 커튼 뒤로 들어가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옷이 맞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가 궁금합니까?”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참고 있었던 걸 입에 담았다.

“아까 보여줬던 약 있잖아요. 그걸 썼다면 란도 쉽게 제국에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은 거예요?”

“아.”

란이 작게 탄식하고선 잠깐 침묵했다. 이윽고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마력으로 만들어진 약품이지요. 우리 가문은 마력이 받지 않는 체질이라 소용이 없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들어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일부러 저렇게 눈에 띄는 붉은 머리로 여기 들어올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옷을 모두 갈아입고서 밖으로 나섰다.

내가 나오는 걸 지켜본 란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일전에 봤던 하녀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정말 그러네요.”

황궁의 지하에서 란과 마주쳤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도 거기서 큰 문제 없이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어?”

“또 무슨 일입니까?”

그러고 보니 란의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란, 그러고 보니 상처는 이제 다 아문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신성력은 잘 드는 몸이라서요. 대공이 구해다 준 성수가 잘 든 모양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루베르는 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다행이에요.”

“당신들을 만나는 데 제 운의 절반은 썼을 겁니다.”

란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처음엔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렇게까지 편안하게 대하는 걸 보면 란도 우리를 제법 의지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출발하는 겁니까?”

“네, 그래야죠.”

란이 건네주는 마력 약을 먹으며 대꾸하자 그녀가 잠시 후 거울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외모는 이만하면 괜찮습니까?”

거울 쪽을 바라보고 서자 그곳엔 옅은 갈색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아스텔라와는 전혀 다르게 바뀐 외관을 보고 있으니 어색했다.

내가 괜히 머리를 매만지고 있자 란이 옆으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묶기 시작했다.

“왜, 왜요?”

“머리 길이는 변하지 않았으니 머리의 스타일이라도 바꿔보는 게 좋을 듯해서요.”

란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란은 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자, 이제 됐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소파에 걸쳐두었던 외투를 입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제는 정말로 나갈 시간이었다.

* * *

“다녀오십시오.”

집사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빠르게 대공 성을 빠져나왔다.

다행인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건지 나를 뒤따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곧이어 시장의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늘어났다.

인파의 틈에 휩싸인 나는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곧이어 익숙한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섰다.

이 어디쯤이었는데.

똑똑.

벽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꽤 이상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악!”

갑자기 앞에 있던 벽이 회전하면서 내 몸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쿵.

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 앞을 가렸다.

“아야.”

넘어져서 엉덩이가 얼얼하긴 했지만,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아이템 창이 어디 있더라.

내가 벽을 더듬거리면서 아이템 창을 찾으려 노력하던 그때였다.

끽.

경첩 소리와 함께 저편에서 환한 빛이 들어오더니 누군가가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당신은…….”

나는 일면식이 있는 상단 주인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단 주인은 촛대를 돌려 나에게서 등을 보이더니 그대로 온 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서 얘기하지요.”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뒤를 따라 어두운 벽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본 적이 있는 탁자와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로 연락한 기억은 없는데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단 듯이 나를 맞이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시군요. 마력 염색약을 이용하신 겁니까?”

“네, 뭐…….”

염색약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쓴 약이랑 얼추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나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빠르게 다음 말을 뱉었다.

“전하께서 제게 전해달라고 한 얘기가 있지 않나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언제쯤 도착하시나 기다렸습니다.”

상단 주인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이윽고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구하느라 꽤 힘이 들었습니다.”

“이건……!”

푸른 가루. 그게 무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암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걸 사 왔습니다. 아울러 그자의 신분도 대충 파악해두었고요.”

상단 주인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 상단도 감시를 받기 시작할 수 있다며 추가적인 조사는 이후 탐정님께 부탁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겠어요.”

마침 란과 함께 들어온 사신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이걸 그녀에게 전달해주면 분명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전달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상단 주인이 숨을 한번 고르고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

“황제는 이제 진심으로 당신을 의심할 테고, 그로 인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찍이도 얘기해준다.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또 얻게 되는 정보가 있으면 다음은 이 상단이 아닌 다른 상단을 찾아가보셔야 할 듯합니다.”

“다른 상단이라면…….”

이전에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그곳을 말하는 걸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까 들어왔던 문으로 향했다.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상단 주인은 이전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 * *

“이 남자에 관한 정보는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대공 성으로 돌아와 내 얘기를 전해 들은 란이 내가 건네준 수첩에 적힌 인명 사항을 살피며 말했다.

“수고하셨군요.”

“별일도 아니었는데요.”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암시장에서 플로리스를 판매하고 있는 상인을 잡아낸 것은 좋았다.

그 상인을 잡아냄으로써 그가 어디서부터 플로리스를 가지고 온 건지 알아낼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플로리스의 판매를 중단시키려면 누굴 찾아가야 하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문제는 다음이야.’

꼬리를 찾아낸 건 좋았지만, 우리가 찾아내야 할 건 머리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황제가 플로리스를 암시장에 퍼뜨렸다는 증거지.

암시장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그자의 뒷배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입에서 황제의 이름이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전에 황제가 남자의 입을 막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그전에 찾아내야 해.’

황제가 빼도 박도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 그걸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아스텔라.”

“네?”

“이 뒤는 나에게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란이 고개를 내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은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일반인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겁니다.”

“아니요.”

이미 돌아서기엔 너무 멀리까지 들어온 참이었다.

그걸 걱정할 거라면 진작 벗어났어야지.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황궁 뒤에 있는 숲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황궁이 관리하는 장소 내에서 플로라와 플로리스의 생산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게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될 터였다.

하지만…….

‘황궁에는 마력 억제기가 있다고 했어.’

내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그 탓이겠지.

그 말은 즉 내가 목숨을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다시 살아나지 않을 수 있단 말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건 나였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아스텔라.

나를 믿고 지켜주던 루베르를 모른 척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

이 마음이 단순히 함께 고난을 딛고 나온 그에 대한 우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건 나는 루베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수밖에는 없나.’

한참을 고민하던 일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이제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일정한 주기마다 플로리스의 생산을 진행하는 것 같으니 자세한 건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스텔라, 당신 설마…….”

란은 내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저는 그 숲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볼 생각이에요.”

“너무 위험합니다. 당신 혼자 그걸 해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같이 갑시다.”

란의 붉은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