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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94)화 (94/120)

94화

루베르는 연구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황제를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루크가 세상을 등진 후부터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에 스스로 고개를 들이민 이유가 있겠지.

“연구의 진행 상황은 어떻지?”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황제가 루베르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포식자라도 되는 듯한 눈빛은 루베르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진행 중입니다.”

“서로에게 입바른 말은 그만하도록 하지, 대공.”

루베르가 아닌 대공으로 부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았다.

그건 공식적인 일을 처리할 때 선을 긋는 황제의 버릇이었다.

루베르는 흘러나올 뻔한 조소를 감추고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연구는 이전과 다름없이 제자리걸음 중이겠지. 내가 연구를 진행했을 때와 같이 말일세.”

그걸 알면서도 물어보는 이유란 뭘까.

루베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화국의 사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골치가 아픈 참이네.”

황궁에 머무는 중인 사신은 아멜 공화국의 사람밖에 없었으니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황제는 마뜩잖은 얼굴로 혀를 찼다.

“자신들이 플로라의 수출을 진행한다고 마치 제국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루베르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럴 때임을 직감하고 있어서였다.

무거운 침묵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황제가 책상을 두드리면서 다시 말을 건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화국으로 나가는 비용 말일세. 플로라를 수입하는 비용이 꽤 들지 않나.”

황제는 턱을 매만지면서 연구소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마치 루베르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면 그걸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가격은 점점 더 올라갈 테고 언제까지 공화국에 그 돈을 계속 낼 수는 없어. 그대도 알고 있겠지.”

말하려는 게 바로 이것이었나.

루베르가 굳었던 입매를 움찔대면서 네, 하고 짧게 대꾸했다.

“그대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든지 여쭤보시지요.”

“그대는 이대로 수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우리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질문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루베르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걸 묻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게 훗날 저희 제국에 더 좋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대공의 생각도 그랬군. 언제까지고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면 되었어.”

“…….”

“무엇보다 내부적인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내 친구이자 그대의 아비였던 루크의 연구도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테지.”

루베르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뻔뻔하게 입에 담을 수가 있는지 울화가 치솟은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되었다. 루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그 점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바입니다.”

“그래, 그대의 뜻이 어떤지를 묻고 싶었어. 물론 연구 성과도 물어보고 싶었고.”

황제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누그러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루베르는 그가 원하는 답만을 골라 말했으니까.

“전하께서는 언제쯤 연구소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왜 그러지? 아무래도 일이 쉽지 않나?”

“무엇보다 6개월 동안 자리에 없었던 터라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전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흠.”

황제가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갸웃댔다.

아무래도 카룬과 루베르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가지는 않았는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폐하, 업무를 위해서는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녀석의 몸이 좋지 않아. 알고 있지 않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루베르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자 황제가 한참 뒤에 손짓하며 대꾸했다.

“몸이 좋지 않다면 언제든 그 아이를 돌려보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드디어 떨어진 허가 명령이었다.

카룬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도, 그게 얼마 걸리지 않을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직접 확인받는 게 빨랐다.

“그럼 연구소의 일은 잘 부탁하네. 지금처럼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려 루베르를 쳐다보더니 씩, 미소를 지었다.

“아까 말했던 독자적인 연구에 관해서는 후에 더 얘기를 나눠보지.”

“알겠습니다.”

루베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황제는 그 찰나에 루베르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했다.

황제는 아직 완전히 루베르를 믿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서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섣불리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필요한 패는 뭐든지 사용하고 보는 게 좋을 테니.

황제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깃들었다.

일단 루베르와 카룬이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저나 오늘 탐정이 이곳에 왔더군. 오는 길에 보고 오는 길이네.”

“그렇습니까?”

“지금이라도 가면 만날 수 있겠지. 그대도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친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떤가?”

“감사합니다.”

“네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황제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서 그대로 연구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루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스텔라가 황궁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게다가 황제와 마주치기까지 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루베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바깥에 다녀오지.”

“네?”

옆에 있던 연구원이 화들짝 놀라며 루베르를 향해 되물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이미 마음의 결심을 굳게 먹은 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스텔라가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미처 느껴보지도 못했던 이 감정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걸 재고 가늠할 여유는 없었다.

혹여나 황제가 아스텔라를 향해 무슨 짓이라도 하진 않을까.

루베르의 머릿속에는 그런 불안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 * *

“이제 슬슬 돌아갈까.”

오늘 어찌 되었든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으니 아예 얻은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래 황궁에 머물러서 황제의 눈에 더 띌 필요는 없겠지.

나는 천천히 황궁의 정문으로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

저 멀리 도착해 있는 마차에 걸린 문양은 분명 루베르 가문의 것이었다.

‘센스도 좋다니까.’

가문에 있는 누군가가 돌아올 때쯤에 맞추어서 마차를 보내준 게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번 셈이었다.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조금 더 힘을 내봐야지.’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어 기분 좋게 발걸음을 뗀 그때였다.

“아스텔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루베르?”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루베르가 나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루베르가 바삐 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다가왔다.

루베르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황궁에서 부탁한 의뢰를 수행하려고요.”

그 말을 들은 루베르의 표정이 거세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게 확 표시가 났다.

이 정도로 내 앞에서 뭔가를 싫어한다는 걸 표출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혼자 이곳에 온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방문증을 가진 건 저 혼자뿐이니까요.”

“하……. 그렇겠군요.”

루베르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나 혼자서 이 사건을 계속 파헤치고 다닌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루베르의 눈치를 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어? 루베르, 다쳤어요?”

“네?”

루베르의 손가락에 작지만 확실하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피는 이미 굳어 딱지가 앉아 있긴 했으나 상당히 쓰라려 보였다.

으, 저렇게 다치면 진짜 따갑던데…….

나는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폈다.

“꽤 깊게 베였네요. 상처는 치료하지도 않고 이대로 둔 거예요? 언제 다쳤는지는 모르고요?”

“……글쎄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일하던 중에 다쳤을 듯하군요.”

“너무 본인한테 무관심한 건 아니고요?”

내가 다치면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본인 몸은 이렇게도 관심이 없다니.

나도 모르게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베르가 내 입술을 톡, 건드리면서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스텔라는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

“전 건강 빼면 시체라고요.”

“다행입니다.”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내 얼굴로 자신의 유려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포피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력 억제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다행스럽게도 카룬이 자신의 옷장에 사용된 목재를 알려줘서 말입니다. 바로 구매해서 그 안에 넣어두고 있지요. 그 뒤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당신은요?”

“네?”

루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럴 줄 알았지.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루베르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은 괜찮냐고요.”

“…….”

루베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더 늦으면 날이 저물겠지요.”

“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다 안 끝났는데……!”

루베르가 내 어깨를 살포시 밀면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마차의 문을 열어준 루베르가 마차를 뻔히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는 없잖아.’

그저 괜찮은지만 물어본 건데.

“올라가세요.”

루베르가 손을 내밀었다. 아마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라는 거겠지.

갑작스러운 선 그음에 황당함을 느끼며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던 바로 그때였다.

“어?”

곧이어 루베르의 두꺼운 팔이 내 허리에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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