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으앙.”
방 안으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애꿎은 보고서만 쳐다보고 있던 카룬의 고개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카룬은 방 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으앙.”
그러던 와중에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룬은 그제야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울음소리는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소리가 울릴 정도라면 작은 소리는 아니어야 하는데.
하지만, 울음소리는 생각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렇다는 건…….
촤락!
카룬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반가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룬이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한 카룬의 시선이 바로 앞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지금 나무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래, 자신이 얘기해놓고도 어이가 없긴 했다.
어릴 때부터 한마디도 걸지 않았던 나무에게 대뜸 무슨 힘이 생겨서 말할 수 있게 된단 말인가.
카룬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창문 아래를 살폈다.
아득한 높이를 자랑하는 카룬의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결과, 밑에는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즉, 카룬을 부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건 이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설마.
카룬이 빠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카룬은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포, 포피?”
“응, 나야 나!”
루베르가 어릴 적부터 자주 들고 다녔던 인형, 포피가 손을 흔들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룬은 자신의 눈을 두어 번 비볐다. 하지만, 눈앞에 일어난 광경은 놀랍게도 현실이었다.
“카룬, 포피를 좀 구해줘!”
“뭐?”
아니, 애초에 저 인형이 왜 여기서 나타난 건지.
카룬이 입을 열어 그걸 물어보려고 하던 그때였다.
“으앙!”
세게 불어온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포피의 몸을 밀어냈다.
이윽고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더니 포피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살려줘!”
다급한 목소리에 카룬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쭉 내밀고 포피를 받아냈다.
“낑낑.”
포피는 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뭐야, 포피 살아 있는 거야?”
“응, 아마도?”
애초에 인형에게 살아 있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
카룬은 이 황당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게다가 너,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문제는 날 물고 온 그 도둑고양이에게 꼭 복수를 해야 한다는 거지.”
으으.
작게 신음하던 포피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분노라고 하기엔 다소 아기자기한 행실이었다.
루베르가 인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마법이라도 걸어둔 걸까.
카룬은 이내 마음속으로 생각을 마치고서 물었다.
“도둑고양이라면 매일 이 주변을 돌아다니던 그 녀석을 말하는가 본데. 애초에 너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스텔라가 데리고 왔다가 고양이에게 납치를 당했다니까! 그런 와중에 네가 날 구해준 거야. 너 착한 아이구나?”
아이라니.
이 나이를 먹고 아이 취급을 당하니 또 느낌이 색달랐다.
“그럼 어서 나를 아스텔라에게 데려다줘.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응, 왜?”
포피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카룬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지금 여기서 나갈 수가 없거든. 근신 처분 상태라 문밖에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황태자잖아! 어떻게든 해봐!”
생떼를 부리던 포피가 이윽고 주먹을 휘두르며 카룬의 팔을 마구 때렸다.
하지만, 여전히 포피의 주먹은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한참을 바동거리던 포피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카룬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포피가 아스텔라의 위치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뭐? 어떻게?”
“포피는 엄청난 능력이 있거든.”
당당하게 몸을 부풀린 포피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에 힘을 줬다.
이러다가 자신의 품에서 실수라도 하는 건 아닐까. 아니, 인형이니 그럴 걱정은 없나.
카룬은 상황을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포피가 다시금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안 되는 거 같아. 여기는 너무 마력의 제한이 커.”
“마력의 제한?”
곧이어 카룬의 머릿속에 마력 제어기와 관련된 내용이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황궁 구석구석에 그런 게 설치되어 있긴 했지.
“그럼 마력의 제한을 받지 않으면 탐정의 위치를 알 수 있단 얘기지?”
“응, 맞아!”
포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룬은 포피를 안은 그대로 구석에 있던 옷장으로 향했다.
“뭐, 뭐 하려는 거야?”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필요하다며.”
카룬은 옷장 문을 열고 그 안에 포피를 내려놓았다.
은은한 나무 향이 방 안을 채움과 동시에 포피가 화들짝 놀라며 팔짝 뛰었다.
“이상해! 여기는 왜 머리가 안 아프지?”
“이 옷장은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무로 만든 옷장이거든. 신기하지?”
귀한 목재를 이런 곳에 쓰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실제로 황궁에 루베르가 자주 드나들 땐 이곳에 들어가 마법을 부리며 놀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이제 좀 알 거 같아?”
“응, 잠시만!”
포피가 끙, 하고 힘을 쓰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파앗!
갑자기 옷장 앞에서 파란빛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형체가 잡혔다.
“으앙!”
카룬은 깜짝 놀란 포피를 끌어안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카룬과 포피가 가만히 그 빛을 보고 있던 찰나, 잠시 뒤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스텔라!”
포피의 꼬리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뭐라고? 아스텔라?
카룬이 당황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보자 거기엔 정말로…….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당황한 눈빛을 한 루베르와 아스텔라가 서 있었다.
* * *
모든 얘기를 전해 듣고 나니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내가 새로운 능력을 보유하고 실행시킴과 동시에 포피가 마력 억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 있어서 가능했다는 거지?
“으앙, 아스텔라!”
포피가 비척비척 걸어와 내 다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나 너무 무서웠어. 이 침 좀 봐. 고양이가 감히 포피의 몸에 이렇게 침을…….”
“그 침을 지금 나한테 닦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니?”
반가움도 잠시, 다시 시끄러운 포피의 목소리에 정신이 사나워졌다.
나는 포피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면서 포피를 이곳저곳 살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막 나뭇가지에 걸리고…….”
“그래, 정말 무서웠겠다.”
면밀하게 살핀 결과 포피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만 좀 축축할 뿐.
“그런데, 아스텔라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내 위치를 찾아내기라도 한 거야?”
“그거랑 비슷하지.”
“응?”
나도 어떻게 된 건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갑자기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우리 세 명의 몸이 굳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건 갑작스럽다 못해 너무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숨어야 해!’
돌아간 줄 알고 있던 우리가 이곳에서 들키면 그것만큼이나 난감한 상황이 또 없을 터였다.
나는 빠르게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옷장 쪽으로 향했다.
그건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귀신에게서 몸을 숨기는 것보다는 여유롭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면서 발걸음을 더 빨리 놀렸다.
“아스텔라?”
나는 먼저 키가 큰 루베르를 거의 강제로 앉히다시피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남는 자리에 포피와 함께 몸을 욱여넣으며 말했다.
“문 좀 닫아주세요. 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카룬도 이것 외에는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는지 곧바로 문을 닫았다.
끼익.
옷장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황제가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옷장 문을 살짝 열고서 밖을 살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룬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편안하게 잘 쉬고 있었느냐.”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뒤를 향해 눈짓하자 뒤에 있던 보좌관들을 포함한 사용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린 황제가 곧이어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업무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갇혀 있는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마침 그것과 관련해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황제가 미간을 좁히면서 되물었다.
“제가 이곳에 계속 있으면 업무를 이제 막 시작한 대공이 혼자서 6개월간의 일을 모두 쳐낼 수 있겠습니까.”
“…….”
“그건 서로에게 독일 뿐입니다. 저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주시지요.”
무슨 얘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루베르의 얘기가 나온 걸 보면 연구소 일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는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을 번뜩였다.
“다른 짓을 하려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게는 언제나 감시가 붙을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얼 해볼 수도 없다는 걸요.”
카룬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차피 저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라는 걸 잊지 말거라.”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던 두 사람 가운데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니, 사실 그건 두 사람이 쓰고 있던 가면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