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아침에 일어나서 시작한 황궁으로 갈 준비는 생각보다도 수월했다.
“포피, 어서 들어가.”
“이 가방에 포피를 넣어가겠다고? 싫어! 포피를 안고 가!”
그래, 이 누렁이만 아니면 더 좋았을 텐데.
포피는 작은 가방에 들어가기 싫다고 계속해서 떼를 썼다.
딱히 큰 이유는 없었고, 그냥 가방 안에 구겨지듯 담기는 게 싫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이 나이를 먹고 너를 안고 가야겠어?”
“예전에는 잘만 안고 다녔잖아.”
“그때는 악몽 속이라 그랬던 거고. 나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뭔데! 먹는 거야?”
포피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모른 척을 해댔다. 하여튼 이럴 때만 순진한 척이지.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으로 굴러가는 거니까.
나는 포피의 머리통을 잡아 그대로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앙! 너 다 이를 거야!”
“그래, 나중에 꼭 일러라. 응?”
나는 씩씩대는 포피를 밀어 넣고서 지퍼를 잠갔다.
포기라도 한 건지 포피는 안에서 가방 문을 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똑똑!
포피를 넣기가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루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탐정님, 황궁에서 마차를 보냈어요.”
“알겠어.”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가방을 고쳐 메고서 밖으로 나섰다.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죠?”
루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루시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나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것만 해주려고 하던 루시였다. 그런 루시가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는 손의 떨림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훌쩍.”
루시는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층 로비로 내려가자마자 집사가 얼굴을 굳히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차가 와 있습니다. 저걸 타고 가면 그대로 황궁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호위 기사도 두 명 붙였으니 걱정은 마십시오.”
“집사님이 하신 일인데 제가 걱정할 일이 있겠어요?”
나는 집사의 손을 맞잡고서 씩, 미소 지었다.
그제야 집사도 얼굴을 누그러뜨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말은 이미 루시에게 수도 없이 들은 말이라서요.”
장난스러운 내 말을 전해 들은 집사가 이윽고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안에 계신 손님도 내부의 상황이 어떤지 꼭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랍니다.”
안에 있는 손님, 란을 말하는 거겠지.
그녀도 분명 황궁 안에 아직 남아 있을 사신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 졸이고 있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황궁에 가면 자세한 걸 알 수 있겠지.
나는 집사의 손을 놓고서 다시 한 번 가방을 바라봤다.
포피는 삐진 건지, 아니면 자고 있는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성 내부에 있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서 오십시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 두 명이 내가 타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이들이 아마 집사가 붙여준 기사인 모양이었다.
기사는 금방 마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곧이어 창 너머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그렇게 황궁을 향해서 출발했다.
* * *
황궁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도 멀지 않았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한 황궁 앞에 내린 나는 엄청난 위압감에 침을 삼켰다.
저번에 왔을 때는 이 정도로 커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더 긴장이 됐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이 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아서가 아닐까.
갑자기 치솟는 역겨움을 간신히 억누른 내 앞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아스텔라님이 맞으십니까?”
“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드리죠.”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앞서서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빠르게 남자의 뒤를 따라붙으면서 성 내부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쪽입니다.”
“아, 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인상을 구기면서 반대편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거, 되게 까칠한 사람이네.
그렇게 얼마나 더 안으로 들어갔을까. 곧이어 남자가 엄청나게 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네.”
남자는 그 말만을 마치고 그대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같이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내가 가방을 다시 한 번 고쳐 메려던 순간, 갑자기 가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포피?”
“아, 아스텔라.”
끙끙.
작게 흘러나오는 신음은 누가 들어도 괴로워 보였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나지막하게 가방에 얼굴을 들이밀고서 물어보자 포피가 낑낑, 소리를 내면서 대꾸했다.
“여기 너무 답답해. 숨이 안 쉬어져.”
“뭐?”
포피가 이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포피는 인형이기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리가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가방 문을 열고 포피를 붙잡아 얼굴을 밖으로 내밀게 했다.
“너 괜찮아?”
“아니, 아까보다 더 안 좋아졌어.”
낑.
포피가 얼굴을 가방 입구에 기대면서 파르르 몸을 떨었다.
포피는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응?”
“내 몸 안에 있는 힘을 누군가가 강하게 짓누르는 기분이야.”
아.
그 말을 듣자마자 황궁에 마력 억제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얘기를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포피가 더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포피, 아마 이곳에 마력 억제기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런 건 일찍 말해달란 말이야.”
포피가 몸을 축 숙이면서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고민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였다.
“손님, 짐을 맡아드릴까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빠르게 가방을 몸 뒤로 숨기면서 뒤로 돌아봤다.
거기엔 한 시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네?”
“알현실에 들어갈 때는 짐을 들고 들어가실 수 없어서요. 돌아오실 때까지 짐은 제가 맡아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만히 가방을 살폈다.
황궁에 마력 억제기를 여기저기 심어놓을 정도로 몸을 사리는 사람이라면, 알현실 안은 더 심각할지도 몰랐다.
‘그래, 차라리 맡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어차피 눈앞의 여자는 짐을 주지 않으면 자리를 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는 지퍼를 다시 한 번 올리면서 가방을 두어 번 쳤다.
안에 있을 포피를 향한 인사 대신이었다.
“네, 그럼 용무가 끝나시면 옆에 있는 손님방에서 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시녀는 자신이 말한 옆방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가 된 상황이었다. 나는 두 볼을 짝, 한번 내려치고서 입구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손님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들라고 해.”
그 말과 동시에 육중한 문이 양옆으로 열리더니 엄청나게 큰 내부가 드러났다.
가운데 있는 커다란 의자.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대의 얘기는 잘 전해 들었어.”
황제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네.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부른 것이니 편하게 있어도 돼.”
“감사합니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기엔 이전 연회에서 봤던 황제가 나를 보고 웃으며 서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이 엄청난 긴장감.
절대로 나를 좋은 의미로 부른 게 아니라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그대가 루베르의 병을 낫게 했다지?”
“우연히 걸린 마법을 해제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의학을 익히지는 않아서요.”
“그래? 어떤 마법이 걸려 있던가.”
황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사진의 손등에 턱을 받쳤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뜻이겠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마법인지라 직접 꿈으로 들어가 탈출을 도왔습니다.”
“그렇군. 그런 마법도 있다니, 나도 조심해야겠어.”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놓고서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황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목숨이 위협받았다고 들었네.”
“아.”
역시 이 얘기가 나왔구나.
예상했던 건 빗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나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런. 많이 놀랐을 텐데 그래도 루베르가 무사히 도와줘서 다행이었어.”
“네, 다행이었지요.”
어색한 침묵이 황제와 내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보내주면 안 될까.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을 그때였다.
“그런데 혹시 황궁의 지하 계단 근처에 있었나?”
“네?”
“쓰러진 그대를 둘러메고 온 루베르가 그 근처에 있는 출구를 통해 탈출했다고 해서 말이야.”
왜, 아주 그냥 내가 지하를 갔었는지를 물어보지 그러냐.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걸 간신히 막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반박했다.
“그런 곳까지 간 줄은 몰랐습니다. 계단이 보이긴 했지만, 제게 중요한 건 화장실을 찾는 일이라서요.”
“그런가. 그럼 수상한 자가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고?”
“네, 저는 갑자기 나온 연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그 뒤의 일은 잘 모릅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군.”
“네?”
황제가 미간을 좁히면서 말을 이었다.
“그 복도에서 침입자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있던 자네가 모른다는 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