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네?”
아스텔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랑스럽다. 그걸 본 루베르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참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제 와 보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이렇게 여유가 없어진 모습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루베르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천천히 아스텔라의 얼굴을 살폈다.
잿빛 눈동자는 어둡지만 이 밤을 담아낸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결 좋은 저 검은 머리칼은 또 어떤가. 당장이라도 그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그 마음을 꾹 참아내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지금도 놀란 아스텔라가 다음부터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멋대로 이렇게 행동해놓은 주제에 그런 걸 바라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루베르의 적안이 어둠에 침식되었다. 평소엔 불을 담아낸 것처럼 붉던 그의 눈동자에도 어둠이 약간 깔렸다.
“제 말에 많이 당황했나 보군요.”
“아.”
아스텔라가 낮게 탄식을 내뱉으면서 제 입가를 두 손으로 가렸다.
다람쥐처럼 날랜 움직임은 여전히 그녀와 잘 어울렸다.
루베르는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서 말을 이어갔다.
“아스텔라, 당신은 내게 돌아갈 곳을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그래, 그건 확실했다.
돌아갈 곳 없는 루베르를 끝조차 보이지 않는 악몽에서 구해주었던 그 손을 잊을 수 없었으니.
루베르에게 있어 아스텔라의 손은 이제 뿌리칠 수 없는 절대적인 것과도 같았다.
“이제 돌아올 곳이 있기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요.”
아스텔라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악몽 속에서 보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못났었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또 보일 필요는 없지. 그럴 마음도 없고.
루베르는 고개를 저으면서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아스텔라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스텔라, 그렇기에 나는 꼭 이곳에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이곳엔 당신이 있고 저는 그런 당신과 있는 시간을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루베르.”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믿어주지 않겠습니까?”
루베르가 천천히 아스텔라의 손을 붙잡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너머로 아스텔라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루베르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지금을 후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짹짹.
날이 밝아짐과 동시에 방 안으로 햇살이 드리웠다.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터에 눈이 따갑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일어나셨어요?”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온 루시가 빠르게 내 머리 손질을 도왔다.
“어머, 탐정님.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너무 어두우세요!”
“아, 잠을 좀 못 자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자려고 눈을 감으면 바로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던 루베르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루베르의 입에서 그 순간,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어떤 반응을 해줄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어제 내린 결론은…….
―다, 다음에 얘기해요! 저는 먼저 들어가볼게요! 내일 뵈어요.
횡설수설하면서 방으로 도망치듯 걸어 들어온 것뿐이었다.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얼굴이 빨갛다고 놀려대는 포피 때문에 더욱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건 비밀이지만.
어찌 되었든 오늘은 루베르가 황궁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런 중요한 날에 늦잠이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탐정님?”
“응?”
옷을 가다듬고 있는 날 바라보던 루시가 고개를 갸웃댔다.
“평소와는 다르게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오늘 약속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없는데!”
나는 이리 묶었다가 저리 묶었다가 하던 리본을 풀어 헤치고선 대충 묶었다.
그래, 이게 뭐라고 자꾸 시간을 쓰고 있는 거야!
내가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네!”
아래에서 출발한다고 알려주려 하나?
루시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내 머리를 다듬다 말고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끼익.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루시가 작게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왜 저러지?
내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젯밤 내내 날 잠 못 들게 했던 루베르였다.
쾅.
루시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내 방 안에 가득 침묵이 흘렀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잘 다녀오라고? 내려갈 참이었는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냐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신경이 쓰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루!”
그때, 침대에 가만히 눕혀져 있던 포피가 폴짝 뛰어올랐다.
“포피.”
루베르가 활짝 웃으면서 포피를 향해 다가갔다.
포피는 루베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올 수가 있어.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해. 사정이 좀 그렇게 됐어.”
“아니야, 그래도 아스텔라가 나랑 놀아줘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포피는 루베르의 손에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아스텔라.”
“네, 네?”
포피를 살짝 떼어놓은 루베르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꿀꺽.
침을 삼키며 루베르를 천천히 올려다보자 루베르가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어제는……!”
“잠은 잘 잤습니까?”
“네?”
뜬금없이 이어진 내 잠자리 안부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치고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조금 더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떠나시는 거예요?”
내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지자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오전 중으로 들어가야 정리가 조금 수월할 듯합니다.”
정말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격이잖아.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루베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 다녀오세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내가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그 때문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마음은 불편해졌다.
“아스텔라.”
“네?”
“저는 이제 갈 겁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내 얼굴을 봐주네요.”
“아.”
그러고 보니 루베르를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었구나.
내가 작게 탄식하자 루베르가 생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한 얘기와 관련된 말은 다녀와서 나누도록 해요.”
“네, 네?!”
“그러면 시간이 충분하겠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베르는 미소만 짓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꼭 얘기해줘요. 당신은 어떤 마음인지.”
말을 마친 루베르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옆으로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 탓에 괜히 볼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얘기를 듣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약속했어요. 분명.”
“물론이죠.”
루베르는 살짝 뒤로 물러나면서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지금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사진으로 남기는 것처럼.
“루,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옆에 있던 포피도 한마디 거들면서 낑낑댔다.
그러자 루베르가 포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응, 이라고 대꾸했다.
“목걸이를 찾아서 정말 다행이네, 포피.”
“아스텔라가 찾아줬어.”
“정말 고맙습니다, 아스텔라.”
“아니요, 딱히 제가 한 건…….”
많긴 했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베르가 다시 한 번 픽, 소리가 나게 웃고서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네?”
“이 모든 건 어차피 예견된 것이었으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란 얘기입니다.”
알고 있었구나.
루베르는 나를 자상하게 위로하면서 내 손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요. 알겠지요?”
“하지만 루베르…….”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막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아요.”
루베르가 내 코끝을 톡, 건드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친절한 그의 손짓에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요?”
“아쉽습니까?”
루베르가 뒤로 돌면서 화색을 띠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 능글거리는 성격이었던가.
“가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아스텔라가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듯이 나를 봐서 말입니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루베르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향해 다시 다가왔다.
“루베르?”
“네, 아스텔라.”
이윽고 오른손을 붙잡은 루베르가 작게 입을 맞추며 나를 올려다봤다.
쪽.
언제나 내려다보던 눈빛이 이번엔 아래에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얼어 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루베르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문 근처까지 간 루베르를 보고서야 정신이 든 나는 빠르게 그를 불러 세웠다.
“루베르!”
“네.”
나는 포피를 안아 들어 포피의 노랗고 작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싶어서였다.
“잘 다녀오세요.”
“네, 아스텔라. 포피.”
찰칵.
루베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정말로 이별이구나.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걱정 때문에 나는 루베르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