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나는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심장은 계속해서 쿵쾅거리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황궁을 걸어 잠글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황궁에서 무슨 할 말이 더 있다는 거야?’
무슨 일인지를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나는 잠옷 위에 대충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머, 탐정님!”
뒤에서 쫓아오는 루시가 내 옷차림에 대고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시를 어르고 달랜 내가 그렇게 복도로 막 나섰을 때였다.
“대공, 황제 폐하로부터 명이 내려왔습니다.”
신하가 건넨 두루마리를 받아 든 루베르가 그걸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별일이군. 이미 황궁은 굳게 닫혀 누구도 출입이 안 된다고 들었는데.”
“대공, 내일부터 다시 연구실장 자리에서 업무를 수행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쿵.
심장이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듯이 크게 진동하는 느낌이 울렸다.
어제 루베르의 얘기를 들어 그가 황궁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황제가 직접 루베르를 그곳에 불러들인다는 건…….
“황제 폐하께서 추가로 대공에게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잠시 숨을 고른 시종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있었던 방화 사건의 위험성 때문에, 황궁은 당분간 출입이 엄격히 금지될 예정입니다. 따라서 그 위험성과 보안의 안전을 위해 황궁 내부의 연구실에서 한 달간 근무를 명하셨습니다.”
“한 달이라.”
루베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두루마리를 힘주어 잡았다.
“연구실의 보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지켜지고 있을 텐데, 한 달 동안 묵을 필요가 있나?”
“이번 방화 사건으로 연구 건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기신 듯합니다.”
자신이 일으킨 방화로 이제는 루베르의 발을 묶겠다는 심산이 뻔히 보였다.
“입궁 일은 바로 내일입니다. 다른 일정이 없으시다면 꼭 날짜에 맞추어 입궁해주십시오.”
“무작정 통보라니 조금 서운하군.”
화가 날 법한 일임에도 루베르는 조소를 내비치기만 할 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공 저하.”
인사를 마친 황제의 수하들이 빠르게 대공 성을 빠져나갔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방문에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도 넋을 놓고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엔 나도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루베르를 향해 다가갔다.
“루베르!”
“아스텔라, 좋은 아침입니다.”
대체 뭐가 좋은 아침이라는 건지.
미소를 지어주면서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는 건 좋았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을 텐데.
나는 빠르게 루베르의 앞에 서서 그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응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황제가 왜 루베르를 황궁으로 부르는 건데요?”
“아마 그날 일을 알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날? 그날이라고 칭할 정도로 중요한 날이라면 방화 사건이 일어났던 날밖에 없었다.
그런데 뭘 알게 됐다는 거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베르를 바라보자 그가 생긋 웃으면서 내 옷깃을 여며줬다.
“아무래도 지하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내가 행동한 것 때문에 루베르가 지금 위험에 처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날 마지막으로 탈출구를 닫고 나왔어야 했어!’
기운이 다 떨어지고 그때 당시는 당장 이곳에서 나가는 게 먼저라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나는 진심으로 과거의 나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미안해요, 루베르. 나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어차피 그곳에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상황이었는걸요. 큰 차이는 없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가!
자신의 의지로 황궁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와 지금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가 루베르를 의심하기 시작해서 그곳에 가두는 거라면 생명의 위협을 또 받게 될지도 몰랐다.
이대로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소리기도 했고.
“루베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이건 너무 위험해요. 이대로 적진의 손아귀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요!”
“아스텔라,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루베르가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는 이미 란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마 황제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에 숨어 있었던 듯했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다시 루베르를 향해 섰다.
“루베르, 진심으로 그곳에 혼자 들어갈 생각이에요?”
“지금은 그게 최선입니다. 직접 들어가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게 가장 좋지요. 무엇보다 그 연구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지금은 나밖에 없으니까요.”
루베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 황제의 뜻에 따라 쉽게 당할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황궁 안에는 아직 사신들이 남아 있다는 뜻이지.”
소파에 앉아 있던 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긴 덕분에 우리 사신들이 용의자로 지목이 되어서 말입니다. 지금 황궁에 발이 묶인 채라더군요.”
“네? 그게 무슨…….”
“아마 안으로 들어가면 정보를 주고받기가 더 쉬워질 테지요. 더욱이 플로리스나 플로라를 이용한 독살은 더는 불가능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란이 어깨를 으쓱대면서 자신의 목을 매만져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빛이 박힌 원석이 아름다운 목걸이 하나였다.
“플로라와 플로리스의 존재가 근처에 있으면 색이 변하는 목걸이죠. 이걸로 아마 독살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란이 루베르를 향해 그것을 건네자 루베르가 그걸 받아 들면서 물었다.
“이제는 나를 신뢰하기로 한 겁니까?”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요. 적어도 당신이 황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면 손을 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걸이를 건네주는 손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준비를 하는 김에 내 사신들에게도 물건을 좀 전달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그걸 준비해 오도록 하죠.”
란은 그 말을 마친 채 미련도 없는 것처럼 방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집무실 안에는 루베르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가지 말라고 한들 들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미 준비까지 마치고 있는 상태인데.
‘거기다가 대고 내가 뭐라고 얘기한들 들을 것 같진 않아.’
어제 보았던 루베르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이 일을 빨리 처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루베르의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스텔라.”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자 루베르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요, 뭐…… 그런 건 없는데.”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겁니까?”
루베르가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도 모르게 루베르의 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루베르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보십시오. 저에게 화가 난 게 있는 거잖습니까.”
“아니에요!”
“무엇 때문인지 알려주지 않을 겁니까?”
사실 그게 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말렸으면서.
그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간다는 얘기를 이렇게 꺼낸 게 서운했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더 미안해.’
내가 그날 마지막 뒤처리만 잘했더라도 루베르가 이렇게 의심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루베르를 향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그때였다.
“내가 황궁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싫습니까?”
“당연하죠!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어요! 거기 들어갔다가…….”
그 뒤의 말은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 진짜로 일어날까 봐 너무 두렵기도 했다.
루베르는 이제 나에게 있어 단순히 게임 속 한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함께 슬픔과 기쁨, 곤경을 파헤치고 이겨나가면서 여기까지 온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스스로 위험한 일을 하겠다는 게 너무나 싫었다.
‘루베르도 이런 기분으로 나를 언제나 막았던 거겠지.’
그걸 깨닫고 나니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스텔라.”
“…….”
“아스텔라, 이쪽을 좀 봐주세요.”
루베르가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던 루베르가 움직였다.
곧이어 루베르의 따스한 손길이 볼에 닿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내 고개를 돌려 루베르를 보게 만들었다.
붉은 그의 적안에 담긴 상냥함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아스텔라.”
“……네?”
“나를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루베르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눈물을 닦아줬다.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거기서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네? 그게 무슨…….”
루베르가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루베르?”
루베르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미래를 놔두고 죽을 만큼 저는 멍청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