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알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대꾸한 시종이 그대로 알현실을 나섰다. 아마 앞에 있을 황태자에게 말을 전해주러 간 것이겠지.
황제는 턱을 괴고서 가만히 문 저편을 응시했다.
“폐하, 그전에 아직 하나 전달 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뒤에 있던 황제의 보좌관이 슬그머니 황제의 옆으로 다가왔다.
“지하 수습 도중 한 병사가 비밀 서고의 탈출로를 이용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서고의 탈출로라면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용한 사람이라니.
“누가 들어왔었다는 소린가.”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쩌면 정체를 모를 그 침입자는 내용을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손에 땀이 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걸 알게 된다면 필시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
“폐하?”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지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머릿속에는 보좌관의 생각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비밀 서고에서 무언가를 알아채고서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비밀 탈출로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럴 만한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꽤 잘 숨겨둔 그 탈출로를 알아챌 만한 녀석이라면 분명 한두 번 거기에 들락거린 게 아닐 터였다.
더욱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엔 언제나 병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걸 뚫고서 안까지 들어갈 만한 존재라면…….
황제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건네는 카룬의 모습에 황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윽고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구기고 있던 얼굴을 폈다.
“그래, 황태자. 네가 이 시간엔 어쩐 일로 날 찾아왔지?”
평소에 신경증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황제임을 알고 있었던 카룬이기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게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말을 잘 듣고 맡은 바를 충실히 행하는 아들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이 상황이 마음에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황제가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매만지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카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윽고 황제와 카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카룬의 눈빛에는 작은 장난기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구나. 황제는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카룬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심각한 얼굴을 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들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황제는 황태자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의 카룬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서 말해 봐. 준비하던 일 중에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릴 일은 황제 폐하께 드리는 말이 아니라 제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대뜸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니.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황제는 이제 거의 일어설 듯한 자세로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아버지, 당장 그 연구를 그만두십시오.”
“뭐라고?”
황제는 진심으로 빌었다. 자신이 지금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말은 그런 황제의 바람을 완전히 깨부쉈다.
“그걸 상용화했다간 수많은 범죄가 판을 칠 겁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카룬이었나.
무슨 얘기인지 굳이 묻지 않더라도 카룬이 말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황제의 신경이 예민한 이유는 다름 아닌 황궁의 지하에 침입한 불청객 때문이었는데.
황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다시금 카룬이 말을 이어갔다.
“모든 걸 알고서 이곳에 온 겁니다, 아버지. 플로라의 중독성은 너무 위험합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비밀 서고에 몰래 들어간 거냐.”
황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아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이야.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왜 황태자인 카룬이 수상하다고 여기지 못했을까.
황궁 내에 있는 비밀 통로를 꿰고 있는 데다가 비밀 서고의 위치도 잘 알고 있을 녀석인데.
믿고 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면서 숨을 내뱉었다.
아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외부인의 소행이 아닌 황태자의 소행이라면 자신의 선에서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테니.
황제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그걸 안전하게 사용할 방법이 나올 수도 있어. 그건 내가 보증할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거라.”
“20년이나 흐른 일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지금 당장 그걸 상용화하면……!”
“나는 분명 네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또다시 자신을 막으려 드는 존재의 등장에 황제의 노기가 표출됐다.
이제는 내 아들인 너조차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
황제는 마음 구석진 곳부터 올라오는 열등감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그 말을 하려고 내 서고에 드나들면서 금지된 보고서를 보았던 거냐.”
“…….”
“어서 말해. 네가 그런 거냐.”
“네, 제가 그랬습니다.”
카룬의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그래서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상용화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요. 이제는 그만두십시오, 아버지.”
“황태자.”
황제가 단호하게 손을 올리면서 말을 끊었다.
“이번 일로 네게 크게 실망했구나. 당분간 너는 네 방에서 근신하고 있거라.”
“아버지!”
“나는 지금 아버지로서 너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야. 황제로서 황태자인 네게 벌을 주는 것이다.”
카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인지도 몰랐다.
“황태자는 자신의 방에서 근신하면서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도록.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나갈 수 없을 거다.”
“폐하!”
황제가 옆에 있던 기사들에게 턱짓함과 동시에 그들이 다가와 카룬을 붙잡았다.
카룬은 그 손을 거세게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기사들의 힘을 혼자 내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부터 황궁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한다. 황궁 내부에 일어난 화재 사건은 우연이 아니야. 귀족들에게도 그걸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황제의 명을 받고 옆에 있던 신하에게 그걸 전했다.
황제는 카룬이 붙잡혀 나가는 걸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모든 일이 벌어진 건 황태자인 카룬이 존재할 때였다.
무엇보다 카룬이 루베르와 다른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경계심을 갖고 지켜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방으로 들어갔던 건 카룬이 아니겠군.”
그런데도 카룬이 자신이 그랬다고 말을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
그곳에 있던 존재는 꽤 중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카룬이 그 정도로까지 생각하면서 진실을 함께 파헤치고자 하는 존재라면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녀석이 있었지.”
불타는 황궁에서 마지막으로 쓰러진 여인을 붙들고 나왔다던 루베르.
어쩌면 그 남자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 비밀 출구를 알고서 들어갔었다면?
“빌어먹을.”
그을음이 가득 묻어 나온 모습만 봐도 루베르가 그 근처를 얼쩡거렸음은 분명했다.
“잠깐만.”
연회장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루베르가 다른 사람을 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존재는 분명…….
“그 탐정!”
루베르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던 여자 탐정.
생각해보니 그 탐정이 옆에 붙어 있는 모습은 크게 보이지 않았었지.
“젠장.”
사신의 방문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것 하나 신경 쓰지 못할 정도가 될 줄이야.
자신이 어리석었다. 황제는 혀를 차면서 펜과 종이를 집어 들었다.
만약, 루베르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자신을 몰아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어두운 밤, 알현실 안에 있는 황제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대공 성의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는 카룬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나빠진 탓이었다.
또다시 하루가 저물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 되었다.
더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루베르의 집무실에 모였다.
“황궁으로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니, 아무래도 황제가 서고로 들어간 걸 알아챈 모양입니다.”
루베르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공문을 내려놓았다.
집무실에 모여 있던 나는 물론이거니와 함께 있던 란의 표정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황태자로부터 연락이 없는 게 지금 사흘째입니다. 아무래도 이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란의 말이 뚝 끊겼다.
루베르는 잠시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허리춤에 검을 매단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황궁을 감시하고 있던 녀석에게서 서신을 받았습니다.”
루베르의 시선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건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었다.
루베르가 빠르게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곧이어 내용을 확인한 루베르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아무래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 같군요.”
“무슨 소리입니까?”
루베르는 되물어온 란의 앞에 아까 받아 든 종이를 내려놓았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란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황태자가 근신 처분을 당했다고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황제를 설득하는 건 실패한 거겠죠. 정확한 상황은 내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베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별 소득조차 얻지 못한 채 우리는 빠르게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