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네?”
수면 향을 공수해 온 게 오랜 기간 거래한 상단이라고 들어서 당연히 향로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걸 준 게 황제라니.
“제가 있던 장소에서 주었던 일이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향로는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겁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내 아버지를 위해서 말이지.”
옆에 있던 루베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수면 향 가루가 아니라 향로 자체에 이걸 넣어뒀을 줄이야.”
진작 떠올리지 못한 게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이제야 모든 게 방향을 잡은 듯했다.
“믿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아버지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니.”
카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예전부터 조사했던 만큼 그가 수상하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크게 상처 받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너에겐 정말로 할 말이 없군.”
카룬이 씁쓸한 표정으로 루베르를 바라봤다.
루베르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서 그저 란이 조사하는 걸 계속해서 응시했다.
“이건 플로라에 마력을 응축해서 만든 플로리스입니다. 그나저나 알려주지도 않은 방법을 잘도 알아냈군요.”
“폐하께서는 그 물질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계시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죠.”
카룬이 가까이 다가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플로라에 대해 무척이나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특히 다른 약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진통 효과에 매료되었죠.”
“잠시만. 그건 애초에 연구가 중단되었던 항목이잖아.”
“황제가 대공의 말에 뜻을 굽힐 수가 있나.”
카룬은 자조적인 미소를 터뜨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은 즉, 플로라와 관련된 실험은 계속되었다는 말이겠지.
“루크 대공이 왜 그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야 했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아.”
“뭐?”
“처음부터 모든 걸 함께해온 루크 대공은 연구비로 그만한 양이 꾸준히 나가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알았을 테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거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경악을 내비치자 카룬이 나를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뭐라고요?”
카룬이 허공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는 그 당시의 대공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뭐라고요?”
고작 열등감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카룬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 카룬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폐하는 분명 그걸 상용화할 생각입니다. 이렇게나 위험한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걸 막아야 합니다.”
“막는다고 막아질 사람이었으면 나를 죽이려 들지도 않았겠지.”
루베르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에 충격에 휩싸인 상태인데.
내가 눈치를 보면서 이곳저곳을 살피자 카룬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남의 얘기는 이미 들리지도 않는 거겠지. 그러니 내가 나서겠어.”
“뭐?”
“아버지와 얘기해서 담판을 지어보겠어. 적어도 그 연구를 중지하는 것까지는 부탁해볼게.”
카룬은 그대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카룬이 이윽고 뒤를 돌아보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다, 루베르.”
“네가 간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이러지도 않았을 거야!”
“예전에 너와 한 약속이 있었지. 네가 두 분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는 그날까지 너에게 협력하겠다고.”
루베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벌이야. 이번에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네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 비밀을 모두 파헤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황위를 이을 유일한 황태자를 죽이진 않겠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룬은 문을 열고 걸음을 뗐다.
“만약 사흘 내에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땐 나는 생각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뭐?”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카룬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
* * *
“처리는 어떻게 됐지?”
“지하 서고는 완전히 전소하였습니다. 안에 있던 물건들도 모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보고를 전해 들은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보여달라고 하던 그 어린 수장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더 빨리 진행되었을 터였다.
이미 종착을 지은 사건이라는 말에도 란이라는 여자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서신에 번번이 거절의 답을 보내는 것도 귀찮아질 무렵이 되니, 이제는 사신을 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신이 참석하지 않으려야 그럴 수도 없는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노려서!
이대로 있다간 당장이라도 서고에 들어가 보고서를 억지로라도 가져갈 기세였다.
“뒷수습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못해도 보름 이상은 걸릴 듯합니다. 타는 내가 너무 심하시면 일단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니야, 됐다.”
굳이 이런 귀찮음과 위험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태울 필요는 없었지만, 되도록 확실한 게 좋았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다. 뭐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했고, 그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래서 황제는 예전부터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수석으로 졸업했다니, 정말 대단해. 역시 대공자야!
아카데미 시절 때부터 번번이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선대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가렌을 꾸중했다.
언제쯤이면 수석의 자리를 받아올 수 있겠냐며. 하지만, 그건 아카데미가 끝날 때까지도 실현되지 못했다.
분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에서 하는 파티에 꼭 참석해줬으면 좋겠어! 루크!
―다음 달엔 우리 가문에서 해!
언제나 루크의 근처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자신이 아닌 그의 주변에.
―황태자 전하, 꼭 시간이 되시면 와주세요.
좀 더 정중한 어조이긴 했지만, 시간이 되지 않으면 굳이 올 필요는 없다는 뜻이겠지.
언제부턴가 가렌은 있는 그대로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보나 마나 자신을 통해 루크와 연결되고자 하는 이들이겠지.
대체 왜. 자신은 무려 황가의 피를 이은 황태자인데, 왜 루크에게 더 많은 시선이 향하는 걸까.
이해하려도 해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아멜 공화국과의 교류 얘기를 꺼낸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어느 순간 루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까지 해치우고 있었다.
―역시 대공 저하십니다. 어떻게 그 단단한 벽과도 같은 아멜 공화국의 수장을 설득하신 겁니까?
그러면서도 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루크가 나서서 먼저 한 것에 불과한데.
저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또 뻔뻔하게 입만 놀리고 있었다.
끝은 그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황제를 열 받게 한 건 그토록 믿어오던 친구의 배신이었다.
―플로라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어서는 안 돼. 이게 얼마나 위험한 약물로 사용될 수 있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뭐라고?
그렇게 좋은 티를 내면서 내 공적을 가로챌 때는 언제고.
―연구를 이대로 접을 수는 없어. 이건 제국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기회라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제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이게 얼마나 위험할 정도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지 너는 잘 알고 있잖아.
그렇게 얘기한 루크의 시선이 곧바로 가렌의 왼손으로 향했다.
붉게 올라온 반점은 그가 계속해서 더 많은 양을 주입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가렌은 그걸 들킨 순간 발가벗겨진 기분마저 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 연구는 중단해야겠어.
누구 마음대로.
이제는 자신을 대신해서 이 제국을 물려받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분노에 치민 그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옛 친구를 치워버릴 책략을 세웠다.
무너져도 언제고 다시 일어나는 루크가 아닌 그의 가족을 건드림으로써.
―스텔라를 제 손으로 죽이라고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스텔라의 친구, 안나를 보고 있자니 같잖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누구보다 루크의 옆자리에 서고 싶어 하면서 왜 그 기회를 잡지 않으려는 건지.
어차피 자신도 가렌과 같이 스텔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
이제 와 착한 척이라니.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면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
그리고 가렌은 실제로 그걸 해냈다. 안나의 집안을 약점으로 그녀를 흔드는 건 생각보다도 무척 쉬운 일이었다.
감시이자 하녀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척하라고 붙인 끄나풀도 꽤 쓸모가 많았다.
그렇게 오명을 씌워 루크를 치우고, 그 뒤를 캐보려는 자식마저도 같은 방법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래, 모든 걸 이제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믿었건만.
“이제 와 깨어날 건 또 뭐란 말이야.”
이제는 황제가 된 가렌이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암시장에서 플로리스를 유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중요한 시점에.
이 상황이 마뜩잖아 자꾸만 짜증이 치밀던 바로 그때였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차를 마시러 들르곤 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온 적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황제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