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루베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건…….”
루베르가 꺼낸 건 다름 아닌 내가 안나의 방에서 발견했던 그 약이었다.
“이게 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손을 뻗은 란이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던 약을 가져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곧이어 란은 약물을 코 근처에 가져가 대고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이건 플로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내 어머니가 그 약물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타살에 의한 일이었지요.”
“그렇단 말입니까.”
루베르의 말에 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당신은 분명 가족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고 했지요?”
“공화국에도 얘기가 들어간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당신이 혼수상태에 빠졌던 지난 반년을 얘기하는 겁니까?”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루베르가 책상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올려뒀다.
“루베르, 그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루베르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나 조사하고 다녔던 수면 향이었다.
“이 수면 향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그걸 확인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란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슬며시 수면 향을 받아 들었다.
내용물을 이리저리 확인한 란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평범한 수면 향입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거기에 증거가 있다고 파란빛이 말해줬었는데.
내가 다시 한 번 수면 향을 훑어보기 위해서 손을 내민 그때였다.
“아, 미안하군요.”
란이 들고 있던 수면 향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안에 든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향이 들어 있던 내부가 훤히 들어다 보임과 동시에 란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만요.”
란이 다시 수면 향을 들어 올려 향로의 입구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달그락.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소리와 함께 향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주둥이 쪽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이건 간과할 수 없겠군요. 정말로 당신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모양이니.”
란이 심상치 않은 눈초리로 한참이나 그걸 노려봤다.
그게 중요한 증거라는 건 이제 확신이 들었다. 주변을 맴도는 파란 빛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게 뭡니까.”
“우리가 찾고 있던 물건이지요.”
“뭐라고요?”
찾고 있는 건 플로라라는 하얀 약물이 아니었나? 저건 푸른빛이 돌고 있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루베르가 다시 한 번 입을 연 찰나였다.
똑똑.
“무슨 일이지.”
루베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꾸하며 뒤에 들어온 집사를 바라봤다.
“저하, 다름이 아니라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해가 뜨기는 했지만, 아직 누군가가 찾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루베르도 그걸 알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집사가 루베르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루베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님이 찾아오신 터라 잠시 응대를 해야 할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식사하십시오.”
대체 무슨 손님이길래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거지?
루베르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다이닝룸 안엔 란과 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색한 침묵은 차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먼저 란을 향해 물었다. 무엇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했었고.
“당신이 찾고 있다던 건 플로라라는 약물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마력으로 가공된 플로라, 플로리스를 찾고 있었죠.”
“플로리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마력으로 가공하다니?
내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란을 바라봤지만, 란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루베르가 오지 않는 이상 더 얘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도 없을 무렵,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더는 이런 무례를 참지 않을 거라 했을 텐데.”
“나는 직접 황제 폐하의 말을 전하러 온 거야. 거기엔 탐정님도 포함되어 있어. 게다가 그녀에게는 직접 사과하고 싶군.”
“네 마음대로 이곳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볼 순 없어.”
“이건 황제의 명이야, 루베르. 더욱이 우리는 손을 잡은 사이가 아니었나?”
“이미 그건 네 이기심으로 인해 끊어진 지 오래지.”
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다이닝룸의 문을 열었다.
“여기 있었군요.”
앞을 막아선 루베르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목소리의 정체는 카룬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어제의 일로 사과를 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카룬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면서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황궁의 의원이 만든 최상급 포션입니다. 이걸 먹으면 치료가 더 빨라질 거라고 하더군요.”
이게 바로 진정한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카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렇게 위험한 일에 당신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해 정말로 미안합니다.”
카룬이 나를 향해 90도로 몸을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아니, 됐어요. 이젠 됐으니 그만하세요.”
“이번 일은 나의 실책입니다. 거기서 화재가 발생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예상을 할 수 있었겠어.
거기서 불이 날 줄 알았으면 일단 나부터 거길 안 들어갔을 텐데.
내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카룬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화재를 일으킨 자를 추적하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정확한 경위도 조사하지 못한 터라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곳에 있었던 당신의 증언을 좀 듣고 싶어서…….”
숙인 고개를 세우던 카룬의 시선이 내 뒤로 향했다.
그러더니 카룬의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저 여자는 설마……!”
“네?”
뒤로 돌아보자 그곳엔 문 근처로 다가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잠시만!
“여기에는 왜 나와 계신 거예요?”
“당신들끼리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안에서 기다린단 말입니까.”
이러면 황궁에서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잖아!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미처 내뱉지는 못했다.
내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내젓던 그때, 루베르가 나와 카룬의 가운데를 막아서면서 으르렁거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보낼 테니까.”
“잠시만요, 루베르!”
나는 루베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그를 진정시켰다.
물론 카룬에 대한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밀 서고에서 가져오라고 했던 그 정보를 찾아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루베르의 도움을 받아서 그 내용을 비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카룬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론은 하나였다.
“전하께서는 지금 누구를 의심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그」와 카룬이 생각한 범인이 일치한다면 더 들을 수 있는 정보가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다 알고서 비밀 서고로 들어간 게 아닙니까?”
“서로 돌려 말하는 건 그만두었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내 단호한 말투에 카룬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뗐다.
“나는 내 아버지, 황제 폐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띠링, 하는 알림음이 들린 것도 같았다.
* * *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은 카룬은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내뱉었다.
“어릴 때부터 아니길 바랐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증거들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
“솔직히 이번에 서고를 불태우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제 아버지, 황제 폐하죠. 그걸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룬은 진심으로 이 상황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황궁에서 봤던 황제와 카룬은 그렇게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던 거겠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거야.’
내가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저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란이 책상 위에 무언가를 얹었다.
“나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건 물어보고 싶군요.”
란이 올려놓은 건 아까 본 파란 가루였다.
“공화국과 제국 사이의 거래에 플로리스의 항목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물건이 여기 반입되어 있는 겁니까?”
“그게 대체 뭐길래 그럽니까.”
“플로리스는 플로라에 마력을 응축해 만든 마약입니다. 여기에 열을 가하면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연기가 되어 사라지지요.”
란이 앞에 놓인 초에 파란색 가루의 일부를 흩날리게 했다.
그러자, 촛대 근처에서 약간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향이 참 좋네.’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으면서 킁킁대던 그때, 뒤에 있던 루베르가 재빨리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이 향은…….”
“당신이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도 전부 이 약물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베르의 시선이 곧 란의 손 위에 있는 푸른 가루로 향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어디서 이게 나온 건지도 모르는 거 같고. 잘 때면 언제나 저 향을 켜고 잔 모양이군요.”
“역시 그 수면 향에 뭔가가 있던 겁니까?”
란이 옆에 있던 수면 향로를 가져와 내부를 보였다.
내부에 있던 숨겨진 공간을 확인한 루베르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자결이라도 하려고 이걸 준비한 겁니까?”
“그건 내 아버지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겁니다. 그건 여기 있던 사용인들에게만 물어봐도 충분히 알겠지요.”
“선대 대공에 대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제 아버지는 끝까지 믿으셨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군요.”
말하지 않더라도 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명백했다.
누군가가 선대 대공이었던 루크를 죽이기 위해서 이 모든 걸 준비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플로리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향로는 누구로부터…….”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거지요.”
가만히 있던 카룬이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