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렇게 얘기하는 루베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스텔라, 당신이 비밀 서고로 들어간다고 얘기했던 그때 내가 함께 있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루베르,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어요.”
“그래도 함께 있었다면 당신이 그렇게까지 기절하는 일은 없었겠지요.”
루베르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쓰러진 당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혹여나 다시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루베르의 적안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만큼 그때를 떠올리는 게 힘든 모양이었다. 루베르는 정말로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당신을 볼 때면 언제나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소리인지를 알면서도…….”
“…….”
“당신에게 이런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당신이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아 너무 두렵습니다.”
루베르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낮게 신음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루베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스텔라?”
루베르를 꽉 껴안은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절대로 어리광을 부린 게 아니에요.”
무엇보다 루베르는 악몽 속에서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용인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를 눈앞에서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도 또 나를 잃을 뻔했다는 걸 알았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미안해요, 루베르.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서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루베르는 언제나 내가 하려던 길을 응원해줬다.
반면에 내가 루베르를 위해 했던 건 뭐가 있었지?
특히나 악몽 속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했는데, 내가 현실에서 또 그런 악몽 같은 상황을 재현해주지 않았던가.
그걸 깨닫고 나니 미안함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저릿했다.
이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스텔라?”
나를 응시하고 있던 루베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직도 떨리는 손길이 마음의 진정이 아직 되지 않았다는 걸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루베르, 우리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하러 갈까요?”
“지금 말입니까? 피곤하지 않겠어요?”
루베르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되물었다. 벌써 10시를 훌쩍 넘은 시간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간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루베르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어차피 잠을 자지 못할 거면 조금 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너무 피곤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함께 가도록 하죠.”
루베르는 항상 그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가도록 할까요.”
“좋아요.”
루베르가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나섰다.
* * *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날이 완전히 쌀쌀해지지는 않은 터라 딱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나는 루베르를 올려다봤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책임을 지고 살아갈까.
루베르의 삶은 감히 내가 짐작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겠지.
‘나도 내 일을 해야 해.’
그런 생각이 번쩍 들자마자 나는 빠르게 루베르를 향해 말을 건넸다.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저도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공화국을 위해 여기까지 밀수범을 잡으러 왔다는 게 대단하긴 하지요.”
“아까 들어보니 적법한 절차로 들어온 건 아닌 거죠?”
“네, 정확하게는 밀입국으로 판단되겠지요. 완벽한 범죄행위입니다.”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엄청난 소란이 일 정도로 커다란 범법 행위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중요한 건 란이 범법 행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장부에 관한 얘기를 나눴는데 정확하게 뭐가 달랐던 건가요?”
“그전에 일단 이것부터 걸치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베르가 내 어깨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었다.
“저녁에는 날이 쌀쌀합니다.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릴 거예요.”
“고마워요.”
나는 옷깃을 여미면서 루베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루베르가 싱긋 웃으면서 어깨를 한번 들썩해 보였다.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행동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선대 대공이었던 제 아버지와 당시 황태자였던 지금의 황제 폐하가 진행하던 무역 건은 플로라라는 약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방금 그때의 장부를 비교해본 결과 수입한 플로라의 양이 달랐습니다.”
“네?”
내가 가만히 루베르를 쳐다보고 있자 루베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연구를 위해 빠진 수량이 달랐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럼 그건 연구를 위해서 빠진 일종의 연구비라고 보면 되는 건가요?”
“대충 얘기하자면 그렇긴 하지만, 그중 일부에 황제 폐하께서 쓰시는 물량도 포함되어 있지요.”
“아.”
카룬이 얘기했던 플로라가 황제의 신경증에 이용된다는 걸 말하는 거겠지.
이제야 루베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대충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난 그전부터 안내 창이 하도 울려댔던 터에 미리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지만.
“공화국에서 만약 연구비에서 나온 차이를 가지고 추궁했더라도 금방 빠져나갔을 겁니다.”
“……그렇죠. 루베르의 말대로라면 연구비에는 이미 황제가 사용하는 양이 들어 있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가 직접 실험체가 되어 그 약물을 써보고 계셨는데 그 양도 연구비로 빼고 있습니다. 황궁에선 그 차이를 그렇게 설명했겠지요.”
잠깐만.
얘기가 오가는 도중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루베르가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듯했다.
밀수라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충분히 수습이 가능한 인물 그리고 약물을 취득하기가 쉬웠던 인물.
그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인물은 몇 없었다.
그걸 알기에 루베르도 지금 조용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루베르.”
“네.”
“당신은 혹시 황궁에 있는 그 사람을 의심하고 있나요?”
루베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그러지 않길 바랐지만, 모든 증거가 그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실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저도 그래요.”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루베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도 그 말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띠링!
알림과 동시에 푸른 창이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황태자 카룬과 황제 가렌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