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당황하던 것도 잠시였다. 란은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히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진 않은 모양이군요.”
“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란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나를 구해준 건 고맙습니다, 대공. 하지만, 지금 난 여기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건 물론 황궁에 따로 사신을 보낸 것 때문이겠지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요?”
란이 화들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에 비해 루베르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 보고가 올라가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랬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뭡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생각보다 팽팽한 기류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따로 사신을 보내서 부탁할 얘기라면 당신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겠지요.”
“…….”
“더욱이 황제의 비밀 서고를 알아내 그곳까지 침투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던데요.”
란의 시선이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너도 황제의 서고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루베르가 피식, 웃음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무슨 얘기를 말입니까?”
“서로가 원하는 게 같은 것 같아서 말이죠.”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곧이어 매섭게 변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공화국 내에서 암암리에 퍼지는 밀수 건을 붙잡고자 협조 공문을 보낸 게 아닙니까?”
“…….”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제국을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지요.”
“네? 그게 무슨!”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그 말을 내뱉자 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현재 밀수되고 있다고 추정되는 물건은 아마…….”
“대공의 말이 맞습니다. 나는 플로라의 밀수를 조사하고 있지요.”
란이 작게 신음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탓이었다.
“플로라를 유일하게 수출하는 곳은 이 나라입니다. 물론 밀수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것이지만, 근래에 들어 더욱 그 양이 많아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무역을 진행 중인 제국에 협조 요청을 한 겁니까?”
“켕기는 게 없다면 무역 때 진행한 장부를 보여줄 테니까요. 내가 요구한 건 약 30년 정도 되는 무역 자료였습니다. 그런데…….”
“황궁에서 그걸 거절했군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내가 아는 것과 이어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루베르가 보낸 서신이 의심의 불을 키우게 한 것이다.
황제가 조사를 거절한 이유는 단순히 제국 내의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었다.
란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
“당신이 주었던 그 약물은 분명 플로라였습니다. 그때 당시 당신의 아버지였던 루크 경이 분명 밀수에 관련됐다고 들었죠.”
“그건 오해입니다. 나도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당신이 부탁한 무역 보고서를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어쩌면 이 일에 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죠.”
그런 일도 있었단 말이야?
말하는 걸 들어보자니, 란이 처음 의심했던 건 아마 루베르인 듯했다.
란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국 내에 있던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겨서 그만둔 사람이 누명을 덮어쓴 것까지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공화국에서 가진 문서와 당신이 전달해준 문서의 내용이 달랐습니다. 당신이 진짜 흑막이었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직접 전달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도 있지요. 그건 후에 전달 드리죠.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란이 슬그머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루베르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저게 대체 뭐길래 그런 반응이지?
“알베르토.”
“네, 저하.”
그렇게 얼마의 침묵이 흘렀을까. 곧이어 루베르가 뒤에 있던 집사를 불렀다.
“지금 당장 서고로 가서 아멜 공화국과의 무역 보고서를 모두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뒤로 돌아선 알베르토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타기 전에 딱 하나, 보고서를 들고 왔지요.”
“그 위급한 와중에도 대단하군요.”
란이 침대 위에 그것을 내려놓으면서 씩, 웃었다.
두께도 두께지만, 무게도 굉장했을 텐데 이걸 들고 어떻게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놓인 보고서를 가지고 와 내용을 살폈다.
“이건 20년 전의 내용이군요.”
“그래요, 20년 전부터 약 10년 동안의 기록이 적혀 있더군요.”
란이 이를 으득, 악물면서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내 아버지가 가장 골치를 앓았던 그때의 기록.”
루베르와 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걸 보고 있는 나는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가져왔습니다.”
곧이어 들어온 집사의 뒤로 기사들이 여러 권의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쿵!
바닥에 내려놓은 양은 꽤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볼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던 터라 모든 걸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루베르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구석에 놓인 책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거군.”
루베르는 그대로 보고서를 엮어둔 책을 들고 와 바로 옆에 펼쳤다.
하나하나 내용을 확인해가던 우리 세 사람의 눈에 누가 봐도 이상한 내용이 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역시 이곳에서 밀수가 일어난 건 확실한 모양이군요.”
황궁에서 란이 가지고 온 보고서와 루베르가 가지고 있던 보고서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도 오로지 플로라라는 약물의 수량에서.
“원인을 알아냈으니 이제 황궁에 가서 따지기만 하면 되겠군.”
“그건 곤란할 텐데요. 당신은 이곳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들어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루베르의 말에 란이 이를 악물면서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그래서 지금 내 공화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범인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요?”
“아직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물어볼 게 남아 있기도 하고요.”
“그게 뭡니까?”
루베르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 걸까.
내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 루베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나라의 황제 폐하를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란이 입을 딱 다물고는 가만히 루베르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먼저 입을 뗀 건 다름 아닌 란이었다.
“황실에서 관리하던 장부가 잘못되어 있고, 그걸 최종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건 이 나라의 황제입니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래서 이 증거를 들고 그를 압박할 생각입니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요?”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책의 모서리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무단으로 입국한 수장이 타국의 비밀문서를 훔쳐 죄를 폭로한들, 그걸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황제의 편에 서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그래서 당신에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루베르의 적안이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나와 손을 잡고서 이 사건을 더 파헤쳐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다름 아닌 공조 제안이었다.
띠링!
곧이어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대충 무슨 내용이 뜰지는 예상이 갔다.
「란」과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친밀도를 높여 그녀의 도움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