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루베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돌아온 연회장 앞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게 저 호화로운 샹들리에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보석 박힌 옷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루베르는 당장이라도 뜨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빛이 새어 나오는 연회장 문고리를 붙잡았다.
“이게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뒤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에 루베르가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딱딱한 인사인가. 그래서 연회는 잘 즐기고 있나?”
“보시다시피 도망친 상태입니다.”
“하하! 그래, 그대가 깨어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탓이겠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황제는 조심스럽게 루베르의 얼굴을 살폈다.
“너무 힘들다면 조금 쉴 곳을 마련해줄 수도 있네.”
“아닙니다. 초대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그런 번거로운 일까지 부탁드릴 수는 없지요.”
“내 오랜 친구의 아들이잖나. 그 정도는 해줘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정말 아들을 걱정하는 듯한 눈빛의 황제를 바라보며 루베르가 뭔가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이제 원래 업무로 복귀하려 합니다.”
“업무라면…… 루크가 하던 그 일을 말하는 거겠지.”
“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일었다. 그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큰 파장으로 퍼질지를 알고 있어서였다.
“조금 더 쉬어도 괜찮아. 아니, 다른 자리를 마련해줄 수도 있어. 굳이 그런 어려운 길을 갈 필요는 없네.”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일을 제가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역시 그런가.”
루베르의 말에 황제가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을 테지. 루베르는 무엇보다 그 일에 진심이었으니까.
“다음 주부터 다시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대가 편할 대로 하게. 그대의 자리는 언제나 잘 놔두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 얘기까지 하는 게 맞을까. 루베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들 드러나지 않을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얘기하고 대놓고 행동하는 게 훨씬 나을 테지.
“폐하, 따로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지?”
“아버지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 건은 이미 모두 정리된 일이야. 더 파헤쳤다간 그대의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어.”
황제가 단호한 태도로 대꾸했다.
알고 있다. 루베르도 그 모든 걸 걸고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것을 위해 깨어난 게 아닌가.
“아버지께서 횡령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폐하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반대의 증거가 계속 넘쳐났고 귀족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모든 걸 안고 가기로 했던 거야.”
“…….”
“자네의 아버지였던 루크의 희생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만들 건가?”
루베르는 잠시 머뭇댔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이 일을 건드려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게 아버지에게 더욱 못 할 짓은 아닐까.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망설였던가. 하지만.
“아버지의 선택이 있듯 저 또한 제 선택을 믿어보려 합니다.”
아스텔라가 그런 자신의 손을 붙잡고 말해주었다. 괜찮다고, 함께 나아가자고.
루베르는 따스한 그 손을 붙잡은 걸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건은 다음에 좀 더 얘기하기로 하지.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아. 듣는 귀도 그만큼 많을 거란 소리지.”
황제의 말에 루베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버지, 여기서 뭘 하시고 계신 겁니까?”
“그렇게나 폐하라고 부르라고 했거늘. 너는 대체 또 어디서 시간을 보내고 온 거냐?”
뒤에서 불쑥 나타난 카룬을 지켜보던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그랬다. 언제나 저렇게 친구 같은 부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되어서 자리를 비우고 돌아다니다니, 이런 골칫덩이 녀석 같으니라고.”
“화장실 정도는 잠시 다녀와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 가운데서 할 수는 없잖아요.”
“뭘 한다는 거야!”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이윽고 주변을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더는 자리를 비우지 말거라. 사람들이 너를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모였는데, 그렇게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
“어휴, 잔소리는. 알겠습니다, 폐하.”
카룬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연회장 문을 열어 젖혔다.
환한 조명이 어두웠던 복도를 가득 채우고 카룬이 연회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경비 태세는 이곳에 집중되어 있어.”
이곳의 경비 태세가 만반인 걸 보니 아스텔라가 조금 더 안전하게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따라나서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루베르가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려던 그때였다.
“폐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알겠다. 금방 가지.”
뒤에서 들리는 황제와 보좌관의 대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사신이라니.
타국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루베르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 * *
두 사람이 떠나기가 무섭게 내 앞에 아까 모습을 드러냈던 남자가 나타났다.
“이쪽입니다.”
남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와중에 정말로 다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일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때였다.
“기다리십시오.”
앞서 나가던 남자가 나를 가로막더니 벽으로 붙어 건너편을 살폈다.
안전한 일이 되겠다고 생각한 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게 무슨 일이래.
안심하고 있던 마음에 다시금 경각심이 새겨졌다.
그래, 여기는 황궁이고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는 거야.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꼬불꼬불한 복도를 헤집고 나아갔을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대뜸 가볍게 날 안아 든 남자가 복도 끝에 있던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윽!”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나니 어느새 우리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
“죄송했습니다.”
남자는 나를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황궁의 뒤편은 화려하던 정문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으슥한 느낌의 숲이 뒤로 펼쳐져 있으면서 주변에 있는 잡초들은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고 한들 여긴 황궁이었다.
이렇게까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황궁의 모습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가시죠.”
내 궁금증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남자가 코너를 돌아 담쟁이덩굴이 자라 있는 벽으로 붙어 섰다.
이윽고 남자가 벽면에 있는 벽돌을 하나 누르자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끼익.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벽들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작은 통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황궁에 이런 비밀 통로가 하나씩 있을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시죠.”
나는 놀란 마음을 다잡고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내부는 꽤 어두웠다.
하지만, 남자가 사용한 마법 덕분에 우리는 금방 그 통로를 벗어나 작은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 테니 잠시 뒤로 가 계십시오.”
남자의 말을 따라 뒤로 물러서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이윽고 빠른 속도로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나가야 하나.
내가 고민하고 있을 찰나 문이 조금 더 열리더니 먼저 나갔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셔도 될 듯합니다.”
내부로 들어가자 그 안은 아까 깨끗하기만 하던 황궁의 내부와는 천지 차이였다.
“여긴 어디예요?”
“황궁의 지하입니다. 계단으로 움직이기엔 너무 많은 경비가 지키고 서 있어 비밀 통로를 이용했습니다.”
“그렇군요.”
어디선가 올라오는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축축하고 습한 공기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코를 막으면서 주변을 살피자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누가 오진 않는지, 다른 위험 상황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해서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주머니에 넣어뒀던 지도를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 비밀 서고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감시는 물렀어도 위에는 아직 경비가 삼엄하고, 30분마다 이곳을 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어딘지는 알고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 대충 알겠다고 대꾸했다.
남자는 그런 와중에도 저편에 보이는 계단과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럼 갈게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남자는 그 말을 마치고서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지하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저벅저벅.
나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덜컥.
“어?”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나는 빠르게 복도에 있던 기둥 뒤로 숨었다.
끼익.
이번 건 확실하게 들었다. 이건 문이 열리는 소리가 확실했다.
이상했다. 분명 아까 그 남자의 말로는 아직 경비를 돌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기둥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문을 열고 나온 건 망토를 둘러쓴 여인이었다.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붉은 머리와 하녀복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했다.
저 여자는 분명 내게 길을 잘못 가르쳐준 그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