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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68)화 (68/120)

68화

“이 길이 맞나?”

약도를 몰래몰래 보면서 찾아오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워지는 복도 탓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인적에 드문 걸 확인한 다음에 그가 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근처가 확실한데.

내가 쪽지를 바라보며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엔 몇 발자국 앞에 하녀복을 입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마침 잘됐다.’

나는 다시 한 번 약도를 확인했다.

화장실 근처에 있는 테라스니까 분명 황궁에 있는 하녀라면 위치를 알고 있겠지.

“저기…….”

내가 말을 걸려고 하던 그때, 주변을 살피고 있던 하녀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무슨 일이시지요?”

“혹시 화장실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이 근처라고는 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

“화장실 말씀이십니까.”

하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곧이어 하녀는 내가 걸어온 곳과 정반대 방향의 복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니요, 부디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뭐지?’

이상하게도 저 하녀가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찰나에 마주친 눈에 깃든 적의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나?’

그게 진실이었든, 아니든.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네, 당신도요.”

나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복도 안으로 들어서면서 화답했다.

하녀는 씩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아니,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데?”

아무리 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가도 화장실은커녕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약속 시간에 늦을 텐데.

‘그 하녀가 길을 잘못 알려준 것 같아.’

더는 이렇게 들어가도 화장실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아까 거기로 다시 돌아가는 게 낫겠어.”

뚜벅뚜벅.

다행스럽게도 한 길로만 걸어와서 그런지 다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네.

빠르게 마음을 바꿔먹은 내가 몸을 돌려 아까 그 복도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악!”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곧이어 뒤로 떠오른 달빛에 내게 말을 건넨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터라 멀리서 보였다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후드 안에 슬쩍 보이는 얼굴을 보니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황태자?”

“그래도 제가 황태자라는 신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는 한가 보군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카룬이 씩 웃음을 내비쳤다.

“언제나 나를 대할 때면 옆집 친구를 대할 때보다도 더 정이 없어서 내가 황태자라는 걸 잊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꽈배기세요?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서도 어찌나 날 놀리려는 게 느껴지는지.

그런데 이 남자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당신이 저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무지 나타날 생각을 안 해서 미리 마중이라도 나와 있을까 싶었습니다.”

카룬이 슬쩍 뒤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황궁이 꽤 복잡한 구조인 터라 헤맬 것 같아서요.”

그럴 걸 예상했으면 좀 더 상세하게 약도를 그려놔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을 용기는 없었다.

“그럼 갈까요?”

카룬이 주변을 살피면서 빠르게 뒤돌아섰다.

마치 이곳에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는 듯이.

황태자가 자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궁에서 이렇게 조심할 필요가 있나?

‘대체 이 남자의 진심은 뭐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나는 카룬의 안내를 받아 약속되어 있던 테라스로 들어섰다.

덜컥.

테라스에 들어오자마자 카룬이 빠르게 문을 잠갔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카룬은 자신의 앞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커튼을 쳤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주변을 경계하던 카룬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전에도 들었던 말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카룬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 사이에 정확하게 해야 할 게 있지 않나요?”

“무슨 말입니까?”

모른 척하기는.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당신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죠.”

“나는 루베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요. 그것 말고 확실하게 제가 믿을 수 있어야 저도 이 거래를 받아들일 거예요.”

단호하게 선을 그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카룬이 헛웃음을 내뱉으면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룬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계속 생각했는데, 당신은 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겠지요.”

잠시 숨을 고른 카룬이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나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반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죄.”

“네?”

카룬의 푸른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었다.

죄에 관한 걸 생각하고 있는 듯한 카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무척 괴로워 보였다.

“나는 루베르의 아버지에게 죄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럴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루베르의 아버지였던 선대 대공을 추궁하러 왔던 건 황태자인 카룬이라고 들었으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추궁은 해놓고서 그에게 죄가 없는 걸 알고 있었다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묻자 카룬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 말인지. 하지만, 일하는 걸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는 저와 루베르는 무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에게서 모든 직위를 앗아가신 건데요?”

“그게 제가 저지른 죄입니다. 저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선대 대공과 폐하의 사이는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걸 질투하고 원망하는 수많은 귀족이 많았던 게 문제였지만.”

“설마…….”

그 때문에 루베르의 가문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황궁을 위해서 일해줬던 대공을 그렇게 내친 게 황제였다는 얘기죠?”

“직접 실행에 옮긴 건 저입니다. 폐하께서도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하.”

그게 황제가 되었든, 황태자가 되었든 큰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죄를 지었다라.’

이제야 카룬이 얘기한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갔다.

황제는 일이 잘못되기가 무섭게 선대 대공이었던 루크를 잘라냈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이용해서.

“나는 그걸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루베르를 위해 손을 빌려주기로 했지요.”

“그런데요?”

“그 또한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철회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또다시 귀족들의 시선이 대공 가문에게로 향하자 황제는 모든 접촉을 막으려 들었다는 말이 이어졌다.

결국, 자신의 걸 잃기 힘들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루베르의 가문을 모른 척한 셈이었다.

‘그것도 진실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남인 내가 들어도 이렇게 속이 뒤집힐 것 같은데.

“이제는 나에게도 힘이 생겼습니다. 정말로 진실을 파헤쳐 나갈 힘이. 그래서 루베르와 선대 대공이었던 루크 대공에게 걸렸던 누명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카룬의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진심인 듯이 보였다.

이 말을 전부 믿어야 할까. 아니, 어쩌면 아직 숨기고 있는 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일단 거래는 진행되어야 했다. 지금의 내게 있어 정보는 중요했으니.

“알겠어요. 그럼, 거래 조건을 말해보세요. 저를 여기로 불러낸 이유가 뭔데요?”

“당신이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 말을 마친 카룬이 주머니에서 이번에는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폐하의 비밀 서재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나조차 출입이 금지된 곳이죠.”

“네?”

그런 게 왜 당신 손에서 나오는데?

얼떨결에 이걸 받아 들긴 했지만, 지금 여기서 이걸 쥐여준다는 의미는 너무나도 확실했다.

“나보고 여길 들어가라고요?”

“내게는 너무 많은 감시가 붙어 있습니다. 특히, 루베르와 함께 공식 석상에 서는 날은 더욱이.”

카룬은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직접 조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의 내가 욕심을 부리면 많은 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윽고 카룬이 다른 종이 한 장을 내게 쑥 내밀었다.

“이건 그곳으로 들어가는 지도입니다. 이번에는 손으로 그린 게 아니니 잘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잠깐만요.”

“거기에 들어가서 아멜 공화국과 거래했던 거래 장부를 빼내주십시오.”

아멜 공화국. 그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대 대공이 멍청하게 자신의 책임이 따르는 업무에서 대놓고 횡령을 시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거래 중에 무슨 일을 벌인 거겠지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장부를 조사해보려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이지 않습니까?”

카룬의 눈이 번뜩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입가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내가 정말로 대공 가문을 쓸어버리려고 했던 범인인지 아닌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지금 이 시점에서 카룬을 흑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카룬이 정말 흑막이었다면 열쇠를 얻은 그날, 곧바로 쳐들어가 어떻게든 그 자료를 불태웠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에게 직접 들어가서 확인을 시켜준다니.

‘카룬은 정말로 루베르와 루베르의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문득 그를 믿고 한 번 움직여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짓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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