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대공 저하는 저기 계십니다.”
기사의 말대로 사람이 몰린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 정말로 루베르가 서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낯선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루베르를 보니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이 모습이 루베르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루베르는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라는 설정이었지.’
그것도 마검을 다룰 줄 아는 대단한 능력자잖아.
어쩌면 지금 루베르와 아스텔라의 몸에 들어온 나의 거리는 딱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그걸 인정하자마자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가깝게 다가온 걸까.’
처음에는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만나야 할 등장인물에 불과했는데.
이제 루베르는 나에게 단순한 게임 속 등장인물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대공 저하, 기운을 차리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렴.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대공 저하신데!”
귀족들의 아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가운데 있는 루베르는 누가 보더라도 귀찮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푸흡.”
“탐정님?”
저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다니.
괜히 루베르의 어린 시절을 엿본 것만 같아 웃음이 터진 바로 그때였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십니다. 다들 예를 갖추십시오.”
시종의 커다란 외침이 이어지고 모든 귀족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눈치껏 사람들의 뒤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해주어 고맙군. 즐겁게 보내다 가길 바라지.”
그 말을 끝으로 끊어졌었던 음악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자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짝을 맞춰서 홀 중앙으로 몰렸다.
귀족들은 여자, 남자가 한 쌍을 이루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확실히 귀족이라 그런지 춤을 추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춤을 추고 나서라고 했지.’
나는 아까 보았던 쪽지 내용을 상기하면서 출구 쪽만을 바라봤다.
어차피 춤을 출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럴 재능도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귀족들이 나를 한번 훑으면서 속닥거리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 장소에 서 있었을까.
“아스텔라.”
대뜸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루베르, 고생이 많아 보이네요.”
“들어온 건 아까 보고 받았습니다. 상황이 그래서 진작 오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상황이었잖아요.”
딱히 루베르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루베르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루베르의 입꼬리도 아까 귀족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역시 그래도 아직 나랑 더 친한 게 맞네.
그래도 목숨을 걸고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한 전우로서 조금 서운할 뻔하긴 했는데.
장난스러운 생각을 이어가면서 키득대고 있던 그때였다.
“한 곡, 추겠습니까?”
루베르가 손을 내밀면서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지금 나보고 춤을 추자고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귀족도 아니고 이곳에 살던 기억도 없는 내가 춤을 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사정없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의 손을 밀었다.
“제가 춤을 추는 법을 몰라서요.”
“그렇습니까.”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꾸한 루베르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한 번도 누군가와 춤을 춰본 적이 없어서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더욱 마음이 쓰이잖아!
‘끙.’
어떻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춤을 출 수 있는 건 아닌데.
“다음 곡은 그래도 느린 박자의 곡이니 발만 잘 맞추면 될 것 같습니다만.”
루베르가 넌지시 그런 말을 던지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누가 보더라도 함께해주지 않겠냐는 바람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내 안전을 책임지고, 함께 사선을 넘나든 루베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다니.
‘게다가 서사는 또 얼마나 슬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잖아.’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이성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루베르도 한 번조차 춰보지 않았던 춤이니, 나랑 비슷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갑자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몰려왔다.
나는 시무룩하게 서 있는 루베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스텔라?”
“가요.”
졌다, 졌어.
도무지 루베르를 이길 수가 없었다. 워낙 많은 걸 알게 되어서일까.
루베르가 조금만 슬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도 그걸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오지랖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고 싶어.’
나는 당당하게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연회 홀 끝자락으로 향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당황한 채로 가만히 서 있자 루베르가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제 어깨에 손을 얹으면 됩니다.”
뜨거운 입김이 귀에 닿음과 동시에 훅,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갑자기 연회장 안이 너무나 덥게 느껴졌다.
“루베르, 춤추는 법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허.”
갑자기 느껴지는 배신감을 표현할 틈도 없이 루베르가 내 몸을 돌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와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아스텔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루베르의 적안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고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음악이 멎었다.
쪽.
루베르는 내 손에 입을 맞추고서 뒤로 물러났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야?”
“아, 대공 저하가 정신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던 탐정이 바로 저 여자인가 본데.”
“그러고 보니 들었던 인상착의가 비슷하군.”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렇게 눈에 띄면 곤란했다.
“아스텔라?”
“정말 정확하고 멋진 춤이었습니다, 대공 저하.”
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아차린 루베르가 나를 향해 다가오려고 했지만, 그건 곧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귀족들로 막히고 말았다.
음악도 잔잔해지고 사람들도 더는 춤을 추지 않았다. 지금이었다.
“전 화장실 좀 다녀올까 하는데요.”
“안내하겠습니다.”
“아니요, 어딘지는 아까 본 데다가 근처니까 괜찮아요. 황궁 내부라서 저를 호위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게다가…….”
나는 호위기사의 모습을 살폈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기사 정복을 입고 여자 화장실 앞을 두리번대는 기사라.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그냥 여기 계세요. 어차피 금방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내 뒤에 바짝 붙던 호위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황태자.’
루베르에게 이 얘기를 할까 말까, 여러 번 망설였다.
하지만, 루베르와 카룬의 사이가 좋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분명 반대할 게 뻔했다.
일전에 카룬을 만나지 못하도록 날 가둔 것만 하더라도 이미 경험은 충분했다.
나는 루베르에게는 사실을 감추기로 마음을 먹고서 출구 쪽으로 나섰다.
일을 귀찮게 만든 카룬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씹으면서.
* * *
불쾌하다.
루베르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 가득했다.
아버지의 일로 한창 바쁘고 힘들었을 그때는 모른 척하고 있던 자들이 아양을 떠는 꼴은 꽤 마뜩잖았다.
“춤 솜씨마저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 사교계 활동을 하실 만큼 쾌차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저희 가문에서 이번에 열리는 티파티에도 꼭 한 번 참석을…….”
“그만.”
루베르는 미간을 좁히면서 단호하게 백작의 말을 끊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렇게 대단한 가문도 아닌 듯했다.
사실 가문이 대단했더라고 한들 지금의 그에겐 중요치 않았다.
“내가 바쁜 일정이 있어서.”
“아, 그러셨습니까.”
루베르의 못마땅한 기색을 눈치챈 백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 모두 숨을 삼켰다.
다들 너무 오랜만에 그를 마주한 탓인지 그의 또 다른 별명을 잊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철혈의 지배자. 그는 인정사정없는 지배자였다는 걸.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백작이 물러남과 동시에 루베르의 시선이 아스텔라가 나갔던 출구 쪽으로 향했다.
루베르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바다가 양 갈래로 갈라지듯이 귀족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지금 여기서 루베르의 앞길을 막을 용기가 있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저하.”
“아스텔라는 어디 간 거지? 분명 그녀의 곁에 잘 붙어 있으라고 했을 텐데.”
싸늘한 루베르의 말에 호위기사가 각 잡힌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화장실에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셔서…….”
루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들이 화장실을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만큼 예의 없는 행동이 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위기사의 행동은 예를 지킨 행동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루베르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베르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내려다봤다.
아까 아스텔라가 나간 이후로 족히 10분은 흐른 상태였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진작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자신이 나가는 걸 보고 바로 따라갔어야 했는데.
루베르는 자신의 멍청한 행동을 후회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언제든 불안하다고 말하는 게 맞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럴 거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루베르는 헛웃음을 뱉으면서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때보다도 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루베르를 더는 막아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