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루베르를 이끌고 골목을 나서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벌써 기가 빨리는 느낌이네.’
원래 살던 곳에서도 사람이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주말에도 게임으로 보냈던 내게 이보다 더 힘든 일정이 있을까.
“아스텔라, 괜찮습니까?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만.”
“괜찮아요!”
한숨이 절로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루베르의 행복이 우선이었다.
옷도 해주고 잘 곳과 안전까지 책임져준 루베르를 위해서 이 정도쯤이야!
나는 없던 영혼까지 잔뜩 끌어모아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인파와 더불어 광장을 에워싼 많은 가게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하지 못하면 즐기는 게 좋지 않겠어?
일류의 마음가짐으로 고쳐먹은 나는 마음을 다잡고서 루베르를 향해 물었다.
“루베르는 마을 축제 때 와본 적이 있어요?”
“아니요, 보통은 일하느라 바빠서 참석할 틈이 없었습니다.”
“어릴 적에도요?”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 바쁘셨던 터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릴 때 그런 추억이 있었다면 그 모자지간을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란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즐거운 추억 하나 정도는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가장 향이 강한 꼬치 가게를 가리켰다.
“와, 저기에 맛있는 꼬치를 판대요. 한번 먹어보고 싶지 않으세요?”
모름지기 이런 곳에 오면 노상에서 음식 하나 정도는 사 먹는 추억이 있어야지!
“어서 가요!”
내가 손을 붙잡고 잡아당기자 루베르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그냥 끌려 왔다.
매서운 그의 눈매와는 완전 딴판인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예쁜 한 쌍에게 맛있는 꼬치 추천해드립니다.”
노상 주인이 아직 열기 때문에 김이 나는 꼬치를 내밀면서 말했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닌데요!”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자 노상 주인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요. 하지만, 축제가 끝날 때가 되면 다들…….”
나는 노상 주인의 음흉한 미소에 빠르게 꼬치를 받아 들었다.
“자, 그러면 2실링 되겠습니다.”
“네?”
노상 주인의 손이 어서 돈을 내놓으라는 듯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꼬치를 받아 든 내 손이 아닌 빈손은 빠르게 옷 주머니를 뒤졌다.
적어도 돈이 한 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미 음식을 받아 든 사람이 돈을 내지 않는다면 그건 완벽한 무전취식이잖아.
“손님?”
“자, 잠시만요!”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스텔라의 주머니 속에는 돈이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운명처럼 만날 수 있는 꼬치 아저씨를 위해 지폐 몇 장 정도는 들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붕어빵을 먹기 위해서 겨울마다 주머니에 천 원을 넣고 다녔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재정 상태였다.
“돈이 없으면 왜…….”
“여기 있습니다.”
뒤에서 슥 다가온 손이 곧이어 상인의 손에 동전을 쥐여주었다.
“루베르?”
“이게 먹고 싶었습니까?”
루베르가 활짝 웃으면서 내 손에 들려 있던 꼬치 두 개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잘못하면 옷에 묻을 것 같아서요. 사람이 없는 곳까지는 내가 들고 가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동전을 받아 든 상인의 얼굴에 다시금 상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까 돈이 없어서 뒤적거리던 내 모습을 보던 표정과는 대조적이었다.
“사람이 좀 없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저쪽에 있는 벤치에서 잠깐 쉬도록 하죠.”
루베르가 내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나 뚫기 어렵던 인파는 루베르에 의해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전의 조그맣던 루베르와는 정말 다르구나.’
고작 그의 가슴께에 오는 키에 나보다 두 배는 큰 체격을 올려다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이제 루베르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울고 있던 작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 * *
“여기 있습니다.”
어디선가 물을 가져온 루베르가 내 옆에 물 잔을 내려놓으면서 꼬치를 내밀었다. 그것도 두 개 전부.
아니, 내가 그렇게 식욕이 넘쳐흐르게 생겼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루베르가 건넨 꼬치 중 하나를 집어 들면서 대꾸했다.
“하나는 루베르 거예요.”
“제 거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루베르가 손에 든 꼬치를 빤히 쳐다봤다.
왜 저렇게까지 보지? 설마…….
“혹시 제가 제 것만 살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니죠?”
“그냥 꼬치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 것까지 생각해주다니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감사해야 하는걸요. 루베르가 사준 거잖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꼬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나중에 꼭 갚을게요. 이건 제가 빌린 돈이에요! 나중에 꼭 저에게 줄 돈에서 까세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아니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그나저나 이 꼬치, 엄청 맛있네.
나는 허겁지겁 꼬치를 먹으면서 루베르를 향해 말했다.
“매번 도움을 받기만 했고, 드레스도 결국 루베르가 사준 거잖아요. 이거라도 제가 내게 해주겠어요?”
“그러면 감사히 먹도록 하죠.”
가만히 있던 루베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남았던 고기를 모두 입 안에 넣고 물을 마셨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르던 하늘이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플 때도 됐지.’
해가 떠 있을 때쯤 나왔는데 벌써 하루가 다 가고 있다니, 시간이 정말 빨랐다.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고 게임 속에서 나가야 할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니까 조바심이 났다.
축제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틈이 없는데. 나, 너무 생각이 없진 않았나?
한숨이 절로 나와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때.
“아스텔라.”
“네?”
루베르의 커다란 손이 예고조차 없이 내 입술을 슥, 훑었다.
당황한 채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도 루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입 근처에 소스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루베르의 붉은 혀가 그의 엄지에 묻어 있던 소스를 핥아 없앴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자 루베르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스텔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붉은 입술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었다.
자극적이면서도 뭔가 위험한 그런 분위기.
찰싹.
나는 빠르게 내 뺨을 후려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루베르가 화들짝 놀라며 나의 볼에 손을 얹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
“…….”
우리 둘 사이에 처음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 상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루베르가 먼저 입을 뗐다.
“볼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음료라도 사서 올 테니 여기 있으세요.”
“아, 네! 고마워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마자 루베르가 저 멀리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워낙 장신이어서 그런지 인파 속에서도 루베르는 너무나 잘 보였다.
‘그냥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 것뿐인데.’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루베르와 괜히 어색해진 이 분위기에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심장 한구석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면서 멀리 보이는 루베르를 지켜보고 있던 그때였다.
히힝!
멀리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와 더불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말 좀 잡아줘요!”
갑자기 나타난 말 한 마리가 광장을 마구 휩쓸며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엄마!”
“우리 아들 좀 도와주세요!”
아까 보았던 남자아이가 도망치려다가 털썩 넘어졌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인파에 휩쓸려 이미 광장 구석으로 비켜서 있었다.
힝!
말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했다. 곧이어 말의 고개가 넘어진 아이에게로 향했다.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를 보고 있던 그때였다.
띠링!
미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출하세요! 성공 시 마을 내에서 아스텔라의 명성이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