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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62)화 (62/120)

62화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을 광장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길이 꽉 막혔다.

“더 들어갔다간 힘들어질 테니 여기서 그만 내리는 게 좋겠군요.”

루베르가 창밖으로 상황을 살피더니 마부가 있는 쪽으로 달린 창문을 열고서 말했다.

“여기서 세우지.”

마차는 곧이어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멈췄다.

루베르는 그 뒤로도 한참 가만히 있다가 망토를 두르고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괜히 눈에 띄면 귀찮아서 말입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쓴 루베르의 얼굴이 절반 정도 가려졌다.

그래도 그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적안과 더불어 날렵한 얼굴선을 모두 숨기지는 못했다.

그래, 저 얼굴이면 이런 곳에서 괜히 시선이 모였다가 귀찮아질 게 뻔해.

나는 자연스럽게 루베르의 말에 동의하면서 루베르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조심히 가십시오.”

삯을 받자마자 마부는 빠르게 마차를 출발시켰다.

먼지가 잠깐 일었던 골목에는 이제 나와 루베르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지요.”

루베르는 익숙하게 내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나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골목을 벗어나자 우리는 엄청난 인파 속에 파묻혔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아스텔라.”

“네?”

작은 키와 아담한 체구인 내가 여기저기서 치이고 있던 그때, 루베르가 아까와는 다른 방법으로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내 뒤로 바짝 붙으세요.”

그 말을 마친 루베르가 손을 잡아 당겨 나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아까만 해도 그렇게 사람에 치이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편해진 기분이었다.

‘루베르는 힘들지 않을까.’

나야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앞에서 길을 뚫고 있을 루베르는 꽤 힘들 텐데.

내 걱정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루베르를 보고 있던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 루베르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루베르의 날카롭던 적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잠시 뒤, 루베르의 붉은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괜찮아요.’

루베르는 그 말을 마친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맞잡은 두 손은 어느새 빈틈 하나 없이 맞닿아 있었다.

두근.

인파에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그의 분위기 때문인지 심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뛰었다.

달리기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 거야. 주책맞게.

‘이렇게 누가 나를 챙겨주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

루베르는 평소와 똑같이 나를 배려해준 것에 불과한데, 거기에 설레고 있는 꼴이라니.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는 볼에 대고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인파가 줄어든 골목 안으로 들어온 루베르가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의 문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좋겠군요. 물론 뭘 입더라도 잘 어울릴 테지만.”

확신에 찬 눈빛으로 따스하게 날 내려다보던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게 안에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반겼다.

루베르는 자연스럽게 후드를 내렸다.

“이 여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으로 추천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루베르의 모습에도 당황조차 하지 않던 여인이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위아래로 훑었지만, 그건 나를 무시하기 위함이 아닌 파악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시선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

“네, 네!”

묘하게 카리스마가 있는 어조에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뒤를 따라 얼마나 안으로 들어갔을까.

칸칸이 나누어진 널찍한 방으로 들어서자 여인이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 가게를 운영하는 엘른 프란시안입니다. 편하게 엘른이라고 부르셔도 되고, 그게 불편하시다면 프란시안 자작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아스텔라님이시지요?”

아니, 자작인데 평민인 나한테 「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가면서 얘기할 필요가 있나.

신분 사회에 익숙하지 않던 현대인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편하게 아스텔라라고 부르셔도 괜찮은데요!”

“아니요, 손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지요.”

엘른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서 옆에 있던 줄자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서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치수를 좀 재봐도 되겠습니까?”

“네?”

아까와는 다른 눈빛을 한 엘른이 엄청난 기세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 * *

소파에 기대앉은 루베르가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아스텔라가 안으로 들어간 지 어느덧 30분이 흘렀다.

치수만 재고 나오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건지.

루베르의 초조한 마음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그의 손가락만 보더라도 잘 드러났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은 그걸 보고서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철혈의 지배자로 불리는 그 대공이 여자를 데려오다니. 그것도 그렇게 자상하게 웃으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에도 사장인 엘른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온 여자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해진 그는 이제 심기가 불편한지 미간을 좁히고 앉아 있었다.

어서 사장인 엘른이 나오길.

직원이 두 손 모아 절절하게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던 그때였다.

“늦었군.”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려서 죄송합니다, 대공 저하. 다름이 아니라 손님께 딱 맞는 옷이 하나 있어서요.”

“뭐?”

루베르의 미간이 이내 더욱 좁아졌다.

당연했다. 루베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옷을 맞추기 위함이지, 누구나 다 입는 기성복을 사기 위함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분명히 치수를 재고 내일까지 옷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온 것이었는데, 말이 다르군.”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저희는 옷을 입는 손님의 생각을 우선 반영하는지라.”

“그게 무슨 말이지?”

“직접 보시면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말을 마친 엘른이 씩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자신이 나온 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곧이어 문이 열리고 어색한 얼굴을 한 아스텔라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

직원의 입에서 작은 탄사가 흘렀다. 그건 모두 아스텔라가 입고 나온 노란색 드레스 때문이었다.

“일전에 제가 만들어보고 싶어 제작해뒀던 드레스 치수와 꼭 맞으시는 것 같아서요.”

“…….”

“마침 색상도 손님과 잘 어울리시고, 손님도 이 옷으로 입고 싶다고 하셔서 의사를 듣고자 이렇게 착용을 권해보았습니다.”

과한 장신구나 보석이 박혀 있지 않은데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노란색 원피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저 옷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직원은 그 옷을 엘른이 얼마나 아끼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옷은 주인을 찾을 때까지 절대로 내비치지 않을 예정이야.

분명 그렇게 얘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직원이 놀란 눈을 하고서 빠르게 아스텔라의 모습을 살폈다.

“이상한가요?”

아스텔라가 쭈뼛대면서 빛이 있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휘황찬란한 원피스들 사이에 있으면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무난하고 눈에 띄지 않을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노란 드레스는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아니요.”

루베르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래요?”

직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칼에 잿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손님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의상을 제 것처럼 소화해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라고 해도 믿을 법하달까.

“네.”

루베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직원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옷인 것처럼 완벽합니다.”

“네?! 그 정도는…….”

“그 정도인걸요.”

루베르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아스텔라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아스텔라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 옷이 마음에 듭니까?”

“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딱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이 옷을 손님께 팔고 싶습니다.”

눈빛을 주고받은 루베르와 엘른 사이에 빠른 결정이 오갔다.

“그럼 이걸로 하지.”

루베르는 망설임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아스텔라의 모습을 눈에 담은 그의 적안이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직원은 확신했다. 그 철혈의 지배자에게 봄이 찾아왔음을.

* * *

내일까지 배송해준다는 말을 끝으로 루베르와 나는 가게를 나섰다.

“정말 아스텔라와 잘 어울리는 옷이었습니다.”

“어휴, 그만하세요.”

나는 또다시 붉어지려는 두 볼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렸다.

아까 드레스를 입고 나온 것을 본 후부터 루베르는 계속해서 그 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 민망할 정도라니까.’

괜찮다는 말 정도였으면 이렇게나 부끄럽지는 않았을까.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루베르, 당신은 옷 안 사요?”

“…….”

“루베르?”

나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엄마, 나도 저거 먹고 싶어요.”

“그거 먹고 또 저녁을 안 먹으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루베르는 골목의 저편, 광장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 걸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과 그걸 혼내는 엄마.

루베르에게 있어선 꿈과도 같은 광경이 아니었을까.

“아스텔라?”

내가 루베르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기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루베르, 혹시 오늘 특별한 일정이 있나요?”

“아니요, 오늘은 옷을 고르는 것 외에는 특별히 없습니다.”

“그러면 저한테 시간 좀 내주세요.”

“시간이요?”

루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루베르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네, 축제가 어떤지 구경하고 싶어졌거든요.”

루베르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나니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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