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훔치긴 뭘 훔쳐!
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머리를 만지고 있던 하녀를 바라보자 루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언니! 그런 얘기는 실례죠. 탐정님의 매력이 얼마나 넘치는데 훔치다니요!”
“알았어, 루시. 너는 평소엔 괜찮다가 탐정님 얘기만 나오면 언제나 활발해지더라.”
하녀가 하하, 웃음을 터뜨리면서 다시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마침 작은 축제가 열려요. 지금 나가시면 재밌는 걸 많이 구경하실 수 있을 거예요.”
“불꽃놀이도 오늘 저녁에 한다니까 오붓하게 보고 오면 되겠네요.”
“아니, 그게……!”
정말 데이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축제를 구경하고, 옷을 고르고, 거기에 불꽃놀이까지.
‘정말 데이트라도 나가는 기분이잖아!’
그걸 인지하기가 무섭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자 루시가 싱긋 웃으면서 옷을 들이밀었다.
“이건 어떠세요?”
엄청나게 화려하진 않지만, 노란색에 꽃이 그려진 원피스.
보는 사람마저도 상큼하게 만드는 원피스는 절로 시선이 갔다.
“……그걸로 할게요.”
“후후, 네!”
어차피 내가 싫다고 한들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 들겠지.
나는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하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그럼 잠시 뒤에 만나요.
그러면서도 자꾸 내게 속삭이듯 말했던 루베르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았다.
전부 다 이 사람들 때문이야. 괜히 데이트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묘하게 긴장되면서 손에 땀이 났다.
이게 다 무슨 짓이람. 루베르는 정작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일 텐데.
그걸 깨닫기가 무섭게 마음 한구석에 실망이 드리웠다.
이유는 대충 알 것도 같았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면서 눈을 감았다.
하녀들의 준비는 아직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듯싶었다.
* * *
준비를 마친 루베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시간을 딱히 정해놓진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스텔라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그녀를 신경 쓰게 된 걸까.’
처음에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대신해서 목숨을 내놓았던 그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루베르는 언제나 자신이 생각한 범위 내에서 자신이 예측 가능했던 선택만을 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밀려온 알 수 없는 감정에 이토록 흔들릴 줄이야.
‘이상하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런 자신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루베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걸음을 뗀 루베르의 발걸음이 이윽고 아스텔라가 머무는 방 앞의 복도에 멈췄다.
안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퍽 시끄러웠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아스텔라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다는 것에 묘한 질투심이 밀려 올라오던 바로 그때였다.
끼익.
“저, 저하!”
어린 하녀 하나가 문을 열고 나서다가 루베르의 얼굴을 보고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니, 루시?”
잇따라 나온 여자 하녀의 표정 또한 빠르게 굳었다. 방 안에 가득 흘러넘치던 웃음이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루베르는 이 무거운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루베르?”
약간 열려 있던 문이 갑자기 확 젖히며 아스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루베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벌써 출발해야 하나요?”
노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스텔라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순간, 루베르는 모든 게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루베르?”
처음 보는 그녀의 꾸민 모습에 놀란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루베르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아스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루베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요.”
“그래요?”
아스텔라가 어색하게 원피스 자락을 만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인 아스텔라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루베르는 문득 그런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루베르는 맥박이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면서 숨을 내뱉었다.
“저는 이렇게 밝은 옷은 입은 적이 없어서 어색하네요. 정말 이상하지는 않나요?”
“그냥 당신의 옷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정말 예뻐요.”
헉.
루베르의 말을 들은 하녀들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사색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아까와는 다르겠지.
루베르는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올라간 입꼬리라도 가려보려는 작은 시도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얼굴을 들어 루베르를 마주 본 아스텔라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더욱 발그레했다.
역시 귀엽다.
루베르는 눈앞에 있는 아스텔라를 향한 마음을 숨기는 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루베르가 손을 내밀자 아스텔라가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네!”
이윽고 루베르의 손에 따스한 온기가 깃들었다.
루베르는 맞잡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뗐다.
아까 방을 찾아올 때보다 훨씬 더 느린 발걸음으로.
* * *
성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마치 우리의 외출을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화창했다.
나는 내 옆에서 발을 맞춰 걸어주는 루베르를 올려다봤다.
‘친절하기는.’
따스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주는 걸 보면 언제나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어떻게든 루베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꼭 잡고야 말겠어.
“아스텔라?”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는 나를 바라보던 루베르가 고개를 갸웃댔다.
왜 손을 놓았냐는 듯한 표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치 엄마를 바라보는 아기 새를 보는 것 같달까.
말하면 부정할 게 뻔하니 말은 하지 않고서 마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뗀 바로 그때였다.
“아스텔라, 그쪽이 아닙니다.”
“네? 하지만 여기서 마차를 탔던 것 같은데.”
거무칙칙한 대공 마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루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그 마차를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 시선이 집중될 위험이 있어서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 축제가 열렸다고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루베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오늘은 어떤 마차를 타고 가는 거예요?”
“잠시만요.”
물어보기가 무섭게 내 뒤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는 특이한 점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마차였다. 딱 중세 시대에 평민들이 타고 다녔을 법한 마차.
마차는 나와 루베르의 앞에 멈춰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오늘 타고 갈 마차가 이 마차인 듯했다.
“정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마차네요. 루베르는 대공이니까 귀족 마차를 타고 갈 줄 알았어요. 눈에 확 들어올 만큼 멋진 마차잖아요!”
“저쪽의 마차가 더 마음에 듭니까?”
“아니요!”
이 세계에 강제로 끌려 들어오면서 가장 싫은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이었다.
‘지금 둘 다 하고 있긴 하지만.’
굳이 여기서 눈에 띌 일을 늘릴 필요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손까지 내저으며 루베르의 말을 부정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격하게 부정하지 않아도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만.”
“그래요?”
나를 바라보면서 계속 웃는 루베르를 보자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니, 아까부터 왜 저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거야.
오늘의 루베르는 평소에 내가 마주했던 그와는 묘하게 달랐다.
‘안전한 곳으로 돌아와서인가.’
얼마 만에 돌아온 현실인데 모든 게 다 반갑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그래, 그렇게 즐거우면 마음껏 웃어라. 우리 루베르, 하고 싶은 거 다 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루베르를 바라만 보고 있던 그때였다.
“네, 얼굴에서부터 저 마차에 타고 싶지 않다는 게 딱 보였거든요.”
“제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네요.”
“알기 쉬운 건 아닙니다.”
“네?”
뚜벅뚜벅.
몇 발치 떨어져 있던 루베르가 뚜벅뚜벅 걸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감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루베르의 손이 내 얼굴 옆을 지나쳐 뒤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루베르의 머리가 내 귓가 근처로 훅 내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거든요.”
“네, 네?!”
딸깍.
예고도 없이 다가온 잘생긴 루베르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루베르가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쳤다.
“위험합니다.”
“아.”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마차의 손잡이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대로 뒤로 더 갔다간 그대로 머리를 찧었을 정도의 거리였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루베르가 뒤로 물러나면서 내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치웠다.
“아니에요, 루베르 덕분에 다치지 않았는데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입니다.”
햇빛이 루베르의 머리 위를 비추자 예쁜 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럼 이만 출발해볼까요?”
“네! 그래요!”
루베르가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루베르의 손을 잡고서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좌석에 앉으니 마차가 덜컹대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는 그렇게 마을 광장 쪽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