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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57)화 (57/120)

57화

무서울 정도의 시력이었다. 이렇게 어두운 와중에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거래.

그 찰나의 순간 나의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갔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한들 이미 다 들통난 마당에 소용이 있을까.’

무엇보다 이게 카룬의 글씨라는 걸 알아본 이상, 루베르 앞에서 감추는 건 싸우자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난 결국 숨기고 있던 쪽지를 슬그머니 꺼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전하께서 제게 만남을 청하셨어요.”

“당신에게 무슨 일로 말입니까.”

루베르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 살벌하게 변했다.

싸늘함이 담긴 붉은 눈동자는 지금껏 보았던 상냥한 그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게…….”

사실대로 전부 얘기하려고는 했지만, 정말 이게 맞을까.

대공 성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사이가 좋지 않은 황궁의 손을 잡겠다는 건 그야말로…….

‘여기서 스파이 짓 하겠다는 말밖에 안 되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큼은 밝힐 수 없었다.

“사실 밖에서 몇 번 마주치고 나니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쓰러지기 전에 제게 만날 날짜와 장소를 적어준 쪽지예요.”

“……황태자가 당신에게 그런 걸 청했단 말입니까?”

루베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태도였다.

“쪽지의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저도 이제 처음 봐서요. 시간이 없었던 나머지 확인할 틈이 없었네요.”

어째서 이런 변명 같은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내 신세를 한탄하면서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아.”

쪽지에 적혀 있는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나는 빠르게 창가 쪽으로 다가가 달을 확인했다.

오늘 방 안에서 확인한 달력과 달의 상태만 보더라도 확실했다.

“루베르, 내일 보름달이 뜨는 날이죠?”

“그렇습니다.”

만나기로 한 날짜는 바로 내일이었다는 걸 알아챈 걸까.

루베르가 미간을 좁히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텔라, 평소라면 당신이 무얼 하든 언제나 그걸 존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네?”

“황태자를 만나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더구나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비밀 장소라니요.”

어느새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루베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저를 원망한다고 한들 저는 반대입니다. 아니, 저도 함께 가지 않는다면 동의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선대 대공은 물론이거니와 당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찾으라고!

내가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루베르가 내 말을 끊고 재차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당신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

“이건 무엇보다 제 일입니다. 제 일로 인해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루베르가 고개를 숙이면서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악몽 속에서 있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이제 충분합니다.”

루베르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방 앞까지 데려다줬다. 마치 내 행동을 감시하기라도 하듯이.

* * *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조상의 지혜가 여기서도 통할 줄이야.

“왜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오늘 외출은 엄격하게 막아달라는 대공 저하의 부탁이 있으셨습니다.”

루베르는 결코 나를 황태자와 단둘이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문 앞에 기사 두 명을 배치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 편이었던 집사를 꼬드겼을 리 없으니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한정된 이상 카룬의 정보는 꼭 필요한데!’

곤란했다. 이렇게까지 앞을 꽉 막고 있는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포피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왔어? 포피, 심심해. 언제까지 인형인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해?”

“「인형인 것처럼」이라니. 너 인형 맞거든?”

무엇보다 우리한테 하듯이 마음대로 움직였다가 귀신에 씐 인형 취급을 받고 태워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포피를 향해 그 점을 강조하며 확인을 받아낸 나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침대에 누웠다.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큰 성에 비밀 통로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런 건 왜 안 알려주는 건데!

“아, 능력이 아직 절반밖에 안 돌아와서 그런가.”

그건 또 왜 그런 건지. 어쨌든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내가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뱉던 그때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고개를 내민 건 다름 아닌 루시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디저트를 준비해 왔어요.”

루시가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찻잔과 디저트를 올려놓으면서 웃었다.

지금 그걸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거라도 드시고 기운이라도 차리세요, 탐정님!”

“하하, 고마워요.”

그렇지만 루시의 갸륵한 마음씨를 걷어차기엔 나는 아직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다.

내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하던 찰나 다시 문이 울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이번에는 집사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아무래도 준비를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라니요?”

내가 나갈 준비를 할 때는 한사코 말리더니 이제 와 무슨 준비.

절로 나오는 입술을 삐죽대고 있던 그때, 집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듯합니다.”

* * *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루시에게 이끌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로 내려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루베르?”

누가 보더라도 기분이 언짢은 듯한 루베르가 미간을 팍 좁힌 채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주름 하나 없는 정복은 완벽하게 그와 어울렸다.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는 말에 절로 공감이 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십니다.”

안으로 들어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입구 근처로 내려와 있던 대공 성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탐정님!”

옆에서 팔을 잡고 고개를 숙이는 루시로 인해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뚜벅, 뚜벅.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바깥에서 누군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굳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더라도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다들 고개를 들게.”

마치 자신의 집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듦과 동시에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카룬과 딱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카룬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휘었다.

누가 보면 참으로 멋진 100점짜리 미소라고 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웃어?’

누군 지금 자기 탓에 오늘 하루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저절로 이가 갈리는 상황에 카룬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루베르가 슬그머니 내 앞을 막아섰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 인사는 이제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더는 할 필요 없어요.”

카룬이 손을 내저으면서 루베르의 인사를 만류했다.

루베르도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빳빳이 고개를 치켜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여기 온 게 그렇게 달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장난을 치러 오신 거라면 지금은 조금 곤란할 듯하군요.”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신경전이 오갔다.

아니, 그건 일방적으로 루베르가 카룬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거라고나 할까.

카룬은 씩,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손님을 입구에 세워두고 얘기를 나누는 모양입니다.”

“…….”

“어찌 되었든 내가 여길 찾아온 것에 거짓은 없는데도.”

이윽고 루베르가 낮게 혀를 차고서는 뒤로 돌아섰다.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기다리던 말이군요.”

카룬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밝아 보인다면 착각일까.

마치 루베르를 놀리는 이 상황이 즐겁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그럼 함께 가도록 하죠.”

“무슨 소리십니까.”

“거기 있는 탐정이 그대의 상태가 호전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카룬이 정확하게 나를 가리켰다. 모든 사용인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루베르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하지만, 카룬은 그걸 알면서도 물러설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저자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으니 탐정도 함께 가지요.”

“…….”

“황제 폐하께서도 무척 궁금해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제국의 가장 높은 권력자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모두가 숨을 죽였다.

분위기만 보더라도 여기서 몸을 빼면 당장이라도 불이익이 돌아올 건 뻔했다.

‘아니, 오히려 좋아.’

카룬과 얘기를 나눌 기회를 원했던 나로서는 오히려 이득이었지만.

“알겠습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말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카룬의 말에 대꾸했다.

큭.

작게 웃는 소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었다.

* * *

“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서로를 높일 필요가 있을까, 루베르.”

응접실로 들어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하는 루베르를 향해 카룬이 대꾸했다.

루베르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무슨 꿍꿍이로 여기 온 거냐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그때, 카룬이 루베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직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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