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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속 대공을 구출하겠습니다 (53)화 (53/120)

53화

‘이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안나와 싸울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나 미울 정도로 빠르게 반응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는 알림음이 들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잡을 수가 없던 그때였다.

‘내 힘의 근원이 스텔라의 마력이라고 했었나?’

맞아, 그랬지. 포피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걸 생각해보면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스텔라의 힘이 다하면서 포피가 사라지고 나에게 있던 그 알 수 없는 힘도 사라진 건 아닐까.

“악!”

“아스텔라? 왜 그럽니까?”

“아무래도 능력이 사라진 것 같아요.”

“사라졌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인간 깍두기인 나를 보호해주고 있던 모든 장비가 사라지고 벌거벗겨진 기분이랄까.

‘이렇게 되면 위험한 상황 속에서 죽게 되는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끝이라는 거잖아!’

그걸 깨닫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루베르를 향해 전(前) 인간 깍두기라고 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나도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만 거니까.

이대로는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능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머리를 쥐어짜며 신음을 하고 있던 찰나 앞에 앉아 있던 루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테이블을 돌아 내 쪽으로 다가온 루베르가 손을 내밀었다.

“많이 복잡해 보이는데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산책이요?”

움직이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루베르가 건넨 손을 맞잡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루베르가 안내한 곳으로 걸어 나가니 예쁜 꽃이 무성한 정원이 펼쳐졌다.

이렇게 예쁜 정원을 몇 번이나 그냥 지나쳤다니.

‘나도 참 바쁘게 살았구나.’

하긴 번질나게 밖을 나다니면서 협박이나 받고 지냈는데 이런 걸 볼 시간이 어디 있어.

괜히 느껴지는 내 불쌍한 생활에 한탄하고 있던 그때였다.

“이번에 황궁에 들렀을 때 황태자를 만났습니다.”

“네?!”

그렇게나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결국 일어났었다는 것에 절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루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놀랄 일이었습니까?”

“아, 아뇨. 그냥 좀……. 별일은 없으셨죠? 괜찮은 거죠?”

“네,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만 빼면 모두 괜찮았습니다.”

“무슨 소리요?”

루베르가 이를 아득 갈았다. 마땅찮은 듯한 싸늘한 표정은 이제껏 내가 보던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 남자와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도 나눴었다고 했었지요, 그러고 보니.”

“네, 뭐.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고 하기엔 당신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더군요.”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전에 카룬의 얘기를 듣고 반가워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대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대조적인 태도를 보일 수가 있어?’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이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두 분은 사이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나쁜 거예요?”

이건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이가 좋은 경우라면 절대로 용의자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전에 루베르가 보였던 반응은 분명 괜찮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고민하고 있던 그때 루베르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면서 단호하게 대꾸했다.

“나쁩니다.”

“이전에는 분명 좋으셨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를 여쭤봐도 되나요?”

“…….”

루베르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너무 개인적이고 들춰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물어본 걸까.

괜히 눈치를 보면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때, 루베르가 작게 웃으면서 내 미간을 콕 찔렀다.

“말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요.”

그 말을 마친 루베르가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더니 옆자리에 손수건을 깔아주었다.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손길에 나는 손수건이 깔린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한 루베르가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내가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얘기했었죠?”

“음, 대충은 들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루베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럴 것 같았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베르가 이윽고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셨고, 늘 정보를 얻으면 제재당하기 일쑤였지요. 그때였습니다. 황태자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게.”

“…….”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극물이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천천히 용의자를 좁혀나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진행됐는데. 내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내 뜨거운 눈빛을 읽기라도 한 걸까. 루베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조사를 진행하던 와중 많은 일이 일어났지요. 아버지는 재혼하셨고, 이후 안나를 따라 많은 사용인이 함께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요. 대공이 수상한 약을 밀매하고 있다는 소문이었죠.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습니다.”

루베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치 그때의 분노를 담아내고 있듯이.

“그리고 일이 터졌습니다.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던 자의 몸수색 때 정말 약이 발견되었지요. 카룬은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저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카룬이 어떻게 내가 들고 간 약물을 알고 있었는지가 이해가 갔다.

“만남은 주로 단골 약방이나 아는 상단의 지하에 있는 비밀 장소에서 이루어졌죠.”

그러고 보니 그 약방에 익숙하게 앉아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쩌면 그 약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던 이유가 두 사람의 접견 장소여서는 아닐까.’

그렇다면 내게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줄 수 있던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그때 발견했던 약물을 다른 곳에서 발견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젠 제가 그걸로 더 조사할 수 있겠죠. 고마워요, 아스텔라.”

“아뇨, 저도 우연히 찾은 것에 불과한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반응하자, 루베르도 다시 입을 뗐다.

“그러던 어느 날 카룬이 대공 성에 들른 적이 있죠. 그때 한 여자를 보고서 녀석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어떤 여자요?”

“카나였습니다.”

“카나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를 한번 죽였던 귀신의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그때의 공포와 더불어 고통이 생생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얘기를 계속해주시겠어요?”

루베르의 따스한 온기 덕분인지 떨림은 금세 멈췄다.

“카룬은 내게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요.”

루베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릴 때의 루베르가 어째서 이런 감정과 악몽 같은 일을 경험해야 했는데.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해자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그때의 고통을 곱씹는 그런 상황 따위 빌어먹게도 싫었다.

나는 루베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에게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고마워요.”

루베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웠다.

아니, 이 남자가?

의외의 저돌적인 행동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긴 했지만, 그의 떨림이 아직 계속되고 있었던 터라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베르도 다시 입을 뗐다.

“처음에는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뭔가 이상해졌습니다.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거나 나를 보는 눈빛이 점점 이상해진다거나.”

“…….”

“그 여자를 피할 방법을 알려준 카룬이 그녀를 조사해보겠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제게 공포였죠.”

루베르가 이어서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카나의 그런 행동에 안나가 이상할 만큼 쩔쩔맸다는 것과 그런데도 카나는 계속해서 제멋대로인 행동을 계속했다는 말이었으니까.

마치 두 사람의 권위가 바뀌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 신중을 기울이던 어느 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루베르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이윽고 침묵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말을 아끼는 걸까.

“비가 미친 듯이 쏟아붓던 밤이었죠. 누군가가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설마……!”

“주변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죠.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분명 자기 전에 초를 하나씩 켜두고 자는 버릇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악몽 속에서 카나의 말을 들은 이상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루베르의 손을 꽉 붙잡으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기다렸던 말이 나왔다.

“촛불에 비친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기절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를 이해할 틈조차 없었죠.”

“카나가 당신을 납치하려 했다던 게 바로 그때의 일이었나요?”

“그래요.”

루베르가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도 되지 않은 내게 고백하더군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런 지옥 같은 곳이 아닌 자신과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해보자고요.”

“…….”

“그걸 위해서는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걸 버릴 준비?

그건 카나가 죽기 전에도 분명히 했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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