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어떻게 하지.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능성이 낮은 곳에라도 기대를 걸어야 할까.
“그래,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
내가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골목을 나서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이런 곳에서 또 마주칠 줄은 몰랐군요.”
구석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당신은…….”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용의자 1로 기록되어 있는 황태자, 카룬이었다.
“대공 성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다들 그렇게 고집이 센 편입니까?”
“네?”
이건 또 무슨 신개념 시비야.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카룬이 처음으로 뱉은 말은 내 어이를 털기엔 충분했다.
“그렇게나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파헤치는 게 대공과 아주 똑같아서 말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자백 수준이 아닐까.
내가 카룬을 흘겨보자 그가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은 꽤 위험하지 않나?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골목에는 나와 카룬밖에 없었다.
지금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단둘이 그것도 이렇게 으슥한 곳에 있다니.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딱 좋은 환경이잖아!
“왜 그럽니까? 아까만 하더라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카룬이 한 발짝,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아, 젠장.’
누가 보더라도 이 남자를 의심하는 듯한 티를 팍팍 내다니. 이건 내 실수였다.
땀이 차오르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쥔 나는 카룬을 빠르게 훑었다.
검은 망토가 온몸을 두르고 있는 터라 안에 무엇이 있는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저 안에 칼이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지.’
무엇보다 내가 이곳에서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제국의 황태자님께서.”
“당신과 만날 때면 언제나 내가 황태자라는 걸 까먹게 되는데, 그래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잊지 않은 모양이군요.”
“뭐라고요?”
“자연스러운 인사 생략은 기본이거니와 이런 태도로 나를 대하는 사람은 꽤 드물단 얘기지요.”
그래서 어쩌라고. 죽이기라도 하게?
카룬이 나와 눈을 맞추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쭈, 웃어?
“이번에 꽂힌 건 그 수면 향입니까.”
“네?”
카룬의 시선이 정확하게 내 손으로 향했다.
재빨리 뒤로 감춰보려고 했지만, 크기도 컸고 무엇보다 이미 들킨 상태였다.
‘그래, 어차피 다 걸린 거 숨겨봐야 뭐 해.’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있어도 되는 거잖아.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가능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뭐든 살펴봐야지요.”
“그래도 탐정이라 그런지 감은 좋은 편인 모양이군요. 희소성이 있는 물건만 콕콕 집어서 파헤치는 걸 보니.”
이 남자에게 내 소개를 한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친절하게도 뒷조사까지 끝마친 상황이시고.’
어차피 뒤를 밟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바로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는 걸까.
“저를 놀리러 오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치고는 지금 너무 활짝 미소 짓고 있는데.
하지만, 카룬의 미소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골목을 이리저리 살피던 카룬이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장신이라 올려다보지 않으면 구경하기 힘들었던 카룬의 얼굴이 아래로 쑥 내려왔다.
카룬은 나와 키를 맞춘 채로 한참을 내 눈동자만 쳐다봤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그때였다.
“이곳에서 물어봐야 들었을 답변은 뻔하죠.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틀립니까?”
“……그걸 알려드려야 할 의무는 없지요.”
“그 태도를 보니 역시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카룬이 뒤로 물러나면서 푹 한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려 하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건가?
카룬이 범인이라면 지금 당장 정보를 캐고 다니는 나를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대공 성에서는 아직 수수께끼의 답에 근접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내가 전부가 아닌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친다는 건 사실상 바보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쨌든 최대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힘들게 얻어낸 정보를 이 남자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어디서 이런 사람이 온 건지, 참.”
“뭐라고요?”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거리야.
짜증이 울컥 올라와서 카룬을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던 그때였다.
“아스텔라, 당신은 정말로 그 모든 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한 카룬이 내게 질문한 것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감당이라니. 대체 뭘?’
대체 어떤 배후가 숨겨져 있길래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감당까지 해야 하는 건데.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맞을까.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렇다고 한들, 지금 내 상황에서 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긴 해?
정답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남자가 아니라면 정보를 얻을 곳은 더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네.”
“…….”
“무려 제국의 황태자에게 협박까지 듣고도 이렇게 찾아다니는 걸 보면 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요?”
어차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똑바로 카룬을 노려보면서 대꾸하자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곧이어 카룬이 숙였던 허리를 올리면서 뒤돌아섰다.
“그럼 해야 할 얘기가 좀 있겠군요.”
“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람끼리 거래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거래요? 갑자기? 당신이랑 내가?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그때, 카룬이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일단 여긴 보는 눈이 많을 수도 있으니 자리를 옮기죠.”
“네?”
“이쪽입니다.”
몇 걸음 걷지 않은 카룬이 벽의 한 부분을 누르자 거짓말처럼 그 부분의 벽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이건 대체 무슨…….”
“들어가죠.”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내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카룬이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는 뜻이겠지.
‘이게 맞아?’
진짜로 이 남자와 손을 잡는 게 맞냐고.
잠깐 그런 고민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러니까 인간 깍두기 옵션을 준 거겠지.’
죽는 건 싫었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카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쿵!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 있던 벽이 닫히며 내부가 제대로 길을 찾아갈 수도 없을 정도로 깜깜해졌다.
“저기…….”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에 있던 카룬이 벽을 한번 건드렸다.
팟!
그러자 벽면에 붙어 있던 촛대에 불이 붙었다.
“들어가죠.”
카룬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체 이 길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카룬의 뒤를 따랐다.
* * *
“잠깐 뒤로 물러나 있으십시오.”
“네?”
얼마나 안으로 들어왔을까. 대뜸 카룬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문은 안으로 열리거든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룬이 특이한 리듬으로 노크를 하자, 갑자기 안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대체 여긴 어디야.’
문을 나서는 카룬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우리를 반겼다.
안은 생각보다도 별다른 게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어디 건물 안인 것 같은데.’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대체 왜 그러지?
내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어?”
뒤를 돌자 그곳에는 아까 마주했던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가 어딘지는 뻔했다.
“이런 곳을 숨겨두고 계셨군요?”
“어째서 손님이 전하와 함께 오신 겁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게 많아.”
카룬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를 쳐다봤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전하, 정말로 그 얘기를 하실 겁니까?”
“그렇게 안 하면 이 탐정님은 계속해서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할 것 같더군.”
무슨 천방지축 딸을 둔 아빠처럼 얘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 건 확실했다. 그리고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면 나에게도 비밀을 말해줄 생각인가 본데.’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상인이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나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를 준비하지요.”
“고맙군.”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상인이 반대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카룬은 익숙하게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를 향해 손짓했다.
“탐정, 당신도 앉아요.”
“…….”
“얘기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카룬이 굳은 입매를 풀고서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지요. 나는 자유롭게 다닐 수족이 필요하고,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필요하죠. 맞지 않습니까?”
“그렇죠.”
“루베르를 저렇게 만든 범인을 잡아내겠다는 목표도 같으니 그대와 내가 손을 잡는 건 꽤 괜찮은 조건일 겁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지요?”
턱을 괸 카룬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은 패를 내어놓을 때였다.
“좋아요.”
“그래, 그럼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부터 얘기하지요.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수면 향에 대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