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할 수밖에 없어.’
불가능한지, 가능한지 영역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제는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부 퇴치하라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서 문만 연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한번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내가 석궁을 고쳐 잡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위험합니다!”
챙!
갑자기 날아온 단도를 받아친 루베르가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습니까?”
“허.”
방금 나, 죽을 뻔한 거 맞지?
석궁을 든 손에 힘이 빠질 뻔했지만, 나는 간신히 석궁을 다시 고쳐 잡았다.
지금은 조금의 동요도 보여서는 안 됐다.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어딜 나가려는 걸까.”
귀신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안나가 씩, 미소를 짓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스텔라의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을 거야.”
안나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나를 가리켰다.
“정말 거슬리는구나.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뭐 저런 악담을 하고 그래?
살기가 넘실거리는 안나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있던 그때였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뭐?”
검을 거머쥔 루베르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안나가 미간을 좁히면서 되묻자, 루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을 처리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로.”
아까만 하더라도 안나를 죽이지 않을 것 같던 루베르의 마음이 변하다니. 그것도 갑자기?
물론 상황 자체가 안나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곳을 벗어나는 게 힘들 것 같긴 했지만.
‘다른 뭔가가 더 있어.’
루베르의 손에 힘이 실린 것만 보더라도 그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의 마음에 들었을 리가.
나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너도 역시 똑같은 족속이었구나.”
안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짓했다. 그러자 귀신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한 도발이 분명했다.
‘어차피 싸움을 피하는 건 이제 무리야.’
그러면 목숨을 바쳐서 깍두기 노릇을 하는 수밖에.
“루베르, 엄호할게요.”
“……고맙습니다.”
다행인지 루베르는 자신을 도우려는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했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 석궁을 조준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챙, 챙!
칼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루베르는 이를 악물고 더욱 강하게 자신의 앞에 다가온 귀신을 베어 넘겼다.
“으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귀신은 곧이어 검은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직도 이렇게나 한참 남았다니.’
곧이어 몰려드는 귀신을 보니 머리가 아팠다.
쉽게 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일이 귀찮아질 줄이야.
루베르가 다시금 검을 고쳐 잡으려던 그때였다.
“위험해요!”
루베르의 얼굴 옆으로 빠르게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악!”
날아간 불화살은 그대로 루베르의 뒤에서 그를 노리고 있던 귀신에게로 꽂혔다.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아스텔라.”
아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디선가 가져온 촛대를 휘둘렀다.
불꽃이 일렁이는 걸 지켜보던 귀신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스텔라는 누구보다도 든든하게 후방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아스텔라의 놀라운 실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욕을 내뱉은 아스텔라가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귀신의 공격을 피했다.
귀신에 쫓겨 달아나기에 바쁘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언제 저렇게까지 실력이 늘어버린 건지. 정말 알면 알수록 새로운 사람이었다.
루베르는 저도 모르게 올라오는 입꼬리를 내리면서 크리튼의 마력에 집중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간다.
루베르의 마음속에는 지금 그 일념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챙, 챙!
루베르는 앞을 막아서는 귀신들을 빠르게 베어 넘기며 앞에 서 있는 안나 쪽으로 다가갔다.
서둘러야 했다. 안나는 아까부터 얼굴을 찌푸린 채로 한곳만 지켜보고 있었다.
루베르는 그 시선의 끝이 어디로 닿아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악! 포피 살려!”
“그러니까 잘 매달려 있으라고 했잖아!”
아스텔라와 포피를 보며 이를 가는 안나는 누가 보더라도 저 둘을 노리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간 또 아스텔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으악!”
루베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앞을 틀어막고 있던 귀신을 베어 넘기고 안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안나의 손톱이 길어지더니 그녀가 손톱으로 루베르의 검을 막았다.
“내가 한눈이라도 팔고 있는 줄 알았니?”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짓는 안나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세월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녀를 해하지 않으려던 건 진심이었다.
그래, 이 여자가 아스텔라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그 다짐은 지켜졌겠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민 순간부터 루베르는 안나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스텔라, 그 아이는 언제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 언제나 날 방해했어. 지금처럼 말이야.”
“함부로 그 입에 어머니의 이름을 담지 마.”
아니, 이제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 여자만큼은 꼭 처리해야 했다.
루베르가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한 번 재빠르게 안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 또한 너무나도 가볍게 뿌리치고서 반격을 해왔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루베르는 크리튼의 마력을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아끼려고 하다간 오히려 화를 입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저 여자가 너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된 거니? 응?”
가까이 다가온 안나가 손을 휘저으면서 물었다.
루베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빠르게 반격했다. 안나는 부러진 손톱을 긴 혀로 한번 쓸어 올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재미있구나. 스텔라의 힘으로 저 아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윽고 싸늘한 표정을 지은 안나의 손이 정확하게 아스텔라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야. 스텔라 본인도 아닌 조그마한 힘 따위에 내가 밀릴 것 같아?”
“아스텔라!”
루베르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만들어진 날카로운 단도들이 정확하게 아스텔라를 향해 가고 있었다.
* * *
이제는 심장이 뛰는 이유가 너무 바쁘게 움직여서인지, 앞에 있는 귀신들 때문인지 모를 정도였다.
“으악!”
나를 향해 다가오려는 남자 귀신이 검은 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빠르게 포피를 주워 들었다.
“으앙!”
“뒤에 잘 붙어 있어.”
포피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내 머리끄덩이를 쥐며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누가 등에 붙어 있으랬지, 허공에 날아다니라고 했냐고 윽박지를 틈도 없었다.
철컥.
푸른빛이 석궁 주변을 맴돎과 동시에 불화살이 저절로 장전됐다. 「무한의 화살」란 능력은 생각보다도 쓸 만했다.
내가 무거운 석궁을 다시 한 번 고쳐 잡고 있을 찰나였다.
띠링!
안나의 부름으로 위층에 있던 귀신들이 연회장으로 몰려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