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포피가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쳐다봤다.
뭐 이 정도로 놀라고 그런담. 아까도 잘 옮기는 거 봤으면서. 새삼스럽긴.
나는 빠르게 루베르를 업어 들었다. 장신인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무게였다.
“너 같은 애는 포피 견생에서 정말 처음 봐.”
포피가 혀를 내두르면서 하는 말을 가뿐히 무시한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크리튼이 뚫고 간 구멍 너머로 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이걸 고려하고 간 건가.’
기왕 고려할 거면 루베르가 깰 때까지만 좀 기다려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키고 루베르를 들어 올렸다. 어쨌든 여기 있는 건 너무 위험했다.
‘어째 아까의 상황이 반복되는 기분인데.’
쓰러진 루베르를 옮기는 지금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아까보다도 더 익숙하게 루베르를 둘러업고 방 쪽으로 걸어갔다.
* * *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게 될 줄이야.
루베르는 자신을 뒤엎는 이 지독하고 끔찍한 꿈에 몸부림쳤다.
―네가 없었다면 모두 해결됐을 일인데!
―마님이 돌아가신 건 모두 도련님 때문이지 않나요?
울분에 찬 어머니의 목소리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타인의 입.
어릴 적 루베르를 괴롭히던 모든 상황이 지금 한순간에 몰려오고 있었다.
루베르는 조소를 내비치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모든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꼴이란.’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지 않나.
이곳에서 차라리 생을 마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웃기는 생각이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베르가 재빠르게 뒤로 돌아섰다.
“내 마력을 깎아가면서 살려줬더니 이런 하찮은 꿈에서 우는소리나 하고 있고 말이야.”
크리튼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 다가왔다.
“네가 대체 여길 어떻게…….”
“뭘 그렇게 놀라나. 네 꿈에 들어온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어깨를 으쓱한 크리튼이 이윽고 루베르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너, 희한한 애를 하나 달고 다니던데. 뭐, 그 녀석의 힘이 어마어마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소리지.”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던 크리튼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이렇게 굴 거야. 내가 그런 여자의 뒤나 봐주면서 여기 온 건 이딴 꼴이나 보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야.”
“아스텔라를 말한 건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하면 되겠네.”
크리튼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루베르를 향해 나불거리던 입도, 그를 노려보고 있던 시선도 모두 사라지고 적막만이 남았다.
“정신 차려. 둘 중 누구도 너를 탓한 사람은 없어.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아.”
“…….”
그 말이 진짜일까. 루베르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울부짖던 아버지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스텔라를 죽음으로 빠뜨린 걸지도 몰라.
어렸던 루베르를 향해 내뱉었던 말은 아직도 생생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루베르는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 루베르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크리튼이 빠르게 다음 말을 뱉었다.
“네 곁에는 루크도, 스텔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언제나 잊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크리튼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 빌어먹을 약속만 안 했어도 되는 거였는데, 젠장. 루크 녀석, 하여튼 자식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아버지가 나를 부탁하신 건가.”
“그러니까 잠도 못 자는 네게 그런 걸 가져다주지 않았겠냐. 멍청하기는.”
크리튼이 그 말을 끝으로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작별이다. 앞으로는 몸 좀 사려가면서 움직여야 할 거야.”
“…….”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알 수 없는 힘이 떠돌고 있다는 건.
그런데, 그 힘의 주인이 바로 앞에 있는 검일 줄이야.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상황이었다.
루베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남자끼리 징그럽게 왜 이래? 빨리 정신이나 차리라고.”
크리튼이 몸을 파르르 떨면서 경기했다. 루베르는 어느새 다시 손에 쥐어진 크리튼을 붙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었다.
* * *
“윽.”
“루베르.”
루베르가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눈을 떴다. 이윽고 그의 적안이 거세게 일렁댔다.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바로 앞에서 걱정스럽게 이리저리 자신을 살피는 여자는 다름 아닌 스텔라, 루베르의 어머니였다.
“루베르, 정신이 좀 드니?”
아름답게 미소를 짓고 있던 스텔라가 이윽고 루베르의 머리를 쓸었다.
“넌 할 수 있어. 나는 항상 널 믿고 있단다.”
“…….”
“아, 물론. 네 아빠도.”
화들짝 놀라며 말을 잇는 스텔라의 모습을 보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루베르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네 탓이 아니야, 루베르.”
스텔라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그의 등을 다독였다. 따스한 온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넌 우리의 축복이야.”
“…….”
“그걸 언제나 잊지 말렴.”
“네.”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루베르는 더욱 세게 스텔라를 안았다.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을 꽉 쥐어진 사람처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베르?”
“……!”
아까와는 전혀 다른 여자의 목소리에 루베르가 빠르게 고개를 내리깔았다.
“죄송하지만, 숨이 좀 막혀서요.”
아까만 해도 분명 스텔라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당황한 아스텔라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겠지.
“미안합니다.”
루베르가 빠르게 손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이젠 좀 괜찮으세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건 아스텔라였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힘들 때면 귀신같이 알고 손을 내밀어주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던 자신이 이렇게도 빠르게 마음을 내려놓은 걸까.
루베르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정말로 실수했습니다. 매번 이런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 같군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무사히 일어나신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데요.”
아스텔라가 손사래 치면서 루베르의 말을 부정했다.
“몸은 정말 괜찮으신 거죠?”
“네,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루베르가 옆에 놓인 크리튼을 세게 한번 쥐었다. 이 녀석에게마저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쓰러지고 나서.”
“아, 그게요.”
우물쭈물하던 아스텔라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 검의 영혼이 저희를 도와줘서 무사히 마력을 채울 수 있었어요.”
“믿습니다.”
“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스텔라가 마법사여서 자신을 되살렸다고 한들. 그게 아니라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고 한들.
아니, 이제는 아스텔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덕분에 또 목숨을 구했습니다. 고마워요, 아스텔라.”
“아뇨, 제가 한 건 별것도 아닌데요.”
“뭐가 별것도 아니야! 포피는 죽을 뻔했단 말이야!”
포피가 바닥에서 꼬리를 붕붕 흔들면서 소리쳤다.
죽을 뻔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루베르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또 위험한 순간이 있었던 거군요.”
“아, 정말 괜찮았어요. 그 검이 지켜줘서요.”
아스텔라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치였다.
결국 이번에도 물러나는 건 루베르의 몫이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이곳을 나가서도 쭉 그녀와 이렇게 지내고 싶을 정도로.
“이 일이 마무리되더라도 아스텔라와는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군요.”
누군가를 이렇게 곁에 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루베르가 아는 한 자신의 인생에서 이 정도로 타인을 신뢰해본 적은 없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우리 가문과 계약을 맺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 상단에서 함께 일하면 의뢰를 정리하는 것도 더욱 수월해질 겁니다.”
루베르가 저도 모르게 집착의 불씨를 키워나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 그건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네?”
루베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거절의 충격은 생각보다도 컸다.
“어째서입니까?”
“저는 여기를 떠날 계획이라서요.”
“떠날 거라고요?”
“네, 일단은 여기저기 수수께끼를 찾아 방황하는 탐정인지라.”
아스텔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떠나다니. 그 말만 떠올려도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알아주고 지켜줬던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루베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보내고 싶지 않아. 가지 말라고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한다면 또 내 욕심에 불과하겠지.
어린아이 모습일 때부터 자신을 지켜줬던 그녀에게 응석받이로 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돈이든 뭐든 무엇을 주어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당신이란 사람을 감히 내가 붙잡을 수 있긴 할까.
루베르의 적안이 머리 위로 내려앉은 그림자로 인해 짙어졌다.
그는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스텔라, 그녀는 이미 너무나도 깊게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빠르고 조용하게, 하지만 깊숙이.
아스텔라와의 인연을 여기서 끝맺음할 수 있을까.
아니, 여러 번 생각해보아도 루베르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루베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스텔라를 신뢰함과 동시에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