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만 당겨. 어차피 소용없어.”
“뭐?”
갑자기 얼굴을 내민 포피가 조그만 손으로 내 뺨을 두드렸다.
“너는 몰라도 저 녀석들은 마력으로 루베르의 위치를 찾아낸 거야. 아까 마주칠 뻔한 것들도 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지.”
“…….”
“루베르는 알고 있는 거야. 여기서 몸을 피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도망쳐보려고 했다니.
지난 내 노력이 전부 수포가 되는 기분이랄까.
“저와 함께 가시지요. 마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어긋난 턱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그 틈으로 나오는 날카로운 음성에 소름이 끼쳤다.
‘잠깐만.’
방금 마님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안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잖아!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바로 앞에 있는 장신의 집사가 한쪽 팔을 경련하듯 떨었다.
꿈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은데.
온몸이 아찔해지는 감각에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루베르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을 따라가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뭐지?”
“가보시면 아시게 될 일이지요.”
“싫다고 한다면?”
“그럼 강제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요. 도련님이 어리셨을 때처럼?”
집사가 끽끽,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사이 나오는 여자의 음성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그렇지 않나요, 도련님?”
“…….”
“왜 그러세요? 도련님이 가장 따르던 샬럿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이제는 대놓고 루베르를 도발해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을 거야.”
루베르가 이를 악물면서 칼을 세게 쥐었다. 그도 만만치 않게 분노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루베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여기 잠깐만 계세요.”
“네?”
루베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검에서 검은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저게 대체 뭐야?
“루! 힘을 쓸 생각이야!?”
“이러지 않으면 내가 더 위험할 수 있어.”
“힘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 녀석은 아직도 네가 틈이 생기길 노리고 있다고. 알면서 왜 그러는 거야!”
대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대충 저 검을 다루는 게 위험한 듯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것 같진 않잖아?”
루베르의 붉은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시선의 끝엔 아직도 기괴하게 목을 꺾은 집사가 가만히 서 있었다.
“루!”
포피의 만류를 끝으로 루베르가 빠르게 집사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어떻게 좀 해봐! 저 녀석은 루가 아직 상대하기엔 버거운 녀석이란 말이야!”
내 볼에 자신의 말랑거리는 얼굴을 붙인 포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까지 팔락팔락 움직이며 얘기할 정도로 포피는 무척 심각해 보였다.
‘나라고 이렇게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닌데.’
무엇보다 루베르가 지금 가장 고생하고 있다는 건 인정했다.
마검으로 한차례 힘든 시련을 이겨내고 귀신들을 물리치느라 지쳐 있었으니까.
그런 몸으로 검의 힘을 무리하게 써야 할 정도로 강한 집사와 마주하다니.
‘진짜 위험할지도 몰라.’
포피가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걸 보면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약점이 불이라고 했으니, 가지고 있는 촛대로 어떻게 할 방법이 있을지도?
내가 아이템 창을 눌러 촛대를 꺼내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위험해!”
“악!”
뒤에 있던 포피가 앙증맞은 손으로 내 머리를 쭉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힘 때문에 내 몸이 속절없이 뒤로 넘어가며 고개가 위로 향했다.
“뭐야! 저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날카로운 쇠창살이 정확하게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저기에 맞으면 최소 죽음인데.
“아스텔라!”
소란으로 인해 뒤를 쳐다본 루베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루베르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그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쇠창살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쇠창살을 보고 있자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온몸이 얼어붙었다.
죽는다. 또 이렇게 허무하게.
이미 피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아플까.’
손발이 벌벌 떨렸다. 또 그때의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니.
죽었을 때 느꼈던 통증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죽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은 바로 그때였다.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울림과 동시에 내 몸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움직였다.
“악!”
등 뒤에 매달려 있던 포피가 내 품으로 쑥 떨어졌다.
아스텔라의 능력 활성화!: 「반사 신경」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