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여기에 날 구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어요.”
“사람들이요?”
그러고 보니 포피도 말했지. 여기에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여기 오는 길에 한 사람은 만났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귀신이 아닌 존재를 보는 건 루베르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비명이라도 내질렀겠지.’
아니면 내가 지르는 비명을 듣고 오든가.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귀신에게 죽거나 아니면…….”
질끈.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루베르가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 일을 맡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신도 그렇게 얘기하고 날 떠날 거잖아요. 여기서 죽을 수도 없는 날 버리고 그렇게 가버릴 거잖아요.”
죽을 수도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에 관해서 질문하려던 그때, 루베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공의 책상으로 향했다.
드르륵.
서랍의 아래를 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 든 루베르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루베르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단도였다.
이윽고 단도의 칼집을 벗겨낸 루베르가 그대로 단도를 자신의 팔목으로 내리찍었다.
“뭐, 뭐 하는……!”
찰그랑.
단도는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나는 여기서 스스로 죽을 수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겠죠.”
“…….”
“내 말이 틀려요?”
네, 틀려요. 저도 인간 깍두기인데요.
당장이라도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눈물을 한가득 머금은 붉은 눈동자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는 여기 있을래요.”
“네?”
“어차피 당신도 나를 버리고 떠날 거라면 그냥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아요.”
이 악몽 같은 저택에서 계속 있겠다는 선택지를 택할 정도로 그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는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여기에 그 정도로 있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긴. 나는 아직 살고 싶다는 뜻이지.
루베르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이상, 내가 선택 가능한 방법은 하나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내려놔요!”
“알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되겠는데요.”
나는 그대로 무릎을 감싼 채 웅크려 있던 루베르를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이 몸이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은 모양인데?’
운동을 꾸준히 하기라도 했는지 아스텔라의 몸은 가뿐히 아이 하나를 감당하고 있었다.
“너, 너! 왜 그러는 거야! 루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아, 네네. 친절하고 착하고 거기에 이 넓은 북부 영지를 다스려나갈 차기 대공 저하시지.”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무례한 짓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포피의 주먹을 받아라!”
변함없이 하찮은 솜 주먹을 가뿐히 무시한 나는 아직도 품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루베르를 내려다봤다.
“그런 분이 거짓말은 잘 못하시는가 보네.”
“뭐!?”
“대공 저하.”
내 목소리에 루베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증은 확신으로 변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런 곳에 있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루베르는 아까부터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 계속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이 그렇게 포피를 반가워하셨어요?”
“……포피랑은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오던 친구니까 당연히 반가워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쾅!
이윽고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에 루베르가 몸을 웅크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파르르 떨리는 두 손. 그는 누가 보더라도 이곳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데도 계속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하실 건가요?”
“…….”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무서우시잖아요. 여기가 끔찍하게 싫으시고.”
루베르는 이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짓말이 들통난 게 부끄러운 것 같기도, 지금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여기에 둘 생각이 없어요.”
“네?”
“이렇게 무서워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도 저 혼자 가라고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못 해요.”
떨리는 루베르의 손을 붙잡자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사람이 이렇게 파랗게 질릴 수가 있을까.
“저하, 이렇게 여기서 계실 바에는 차라리 한 번만 더 저를 믿어보시는 게 어때요?”
“…….”
“제가 이래 봬도 의지 빼면 시체거든요.”
나는 생각보다 강인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것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른다는 목표가 있는 의지의 한국인.
목표는 심지어 내 목숨을 부지한다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루베르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그의 앞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할게요. 당신을 두고 절대로 혼자 나가지 않겠다고.”
“…….”
“그러니까 저하께서도 조금만 용기를 내주실 순 없을까요?”
인간 깍두기인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루베르와 다를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원조 깍두기와 새로운 깍두기의 만남이 아닐까.
“이렇게 약속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싫어요. 이제 어른들 말은 안 믿을 거예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루베르가 울음을 터뜨렸다.
“루, 울지 마. 포피가 있잖아. 포피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응?”
포피가 당황스러워하면서 하찮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짧디짧은 손은 루베르의 목 근처 허공을 맴돌았다.
“포피야.”
“루!”
포피를 꼭 껴안고 자리에 주저앉은 루베르를 보니 이제야 그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게 느껴졌다.
어른인 내가 들어도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는 상황이 온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아이인 루베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철혈의 지배자인 그의 이미지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게 문득 실감 났다.
나는 루베르의 옆에 앉아 그의 등을 다독여줬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어깨가 여태껏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오고 있었는지를 알려줬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요?”
루베르가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올려다봤다.
“당신이랑 같이 가면 정말로 그럴 수 있나요?”
“…….”
그럴 수 있을까. 사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베르도 이런 상황에 놓인 게 처음이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나는 고작 1일 차를 시작하다가 게임 속에 빨려 들어온 풋내기였다. 그런 내가 정말로 이 아이와 게임을 깰 수 있을까.
짧은 찰나에 수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별다른 방법이 있어?’
없다. 그 빌어먹을 상태 창에 적힌 퀘스트를 깨는 것 외에는.
하지만 이제야 겨우 진정한 어린애에게 이런 얘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저하, 제가 누군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죠?”
“네? 아까 분명 아스텔라라고 했잖아요?”
“그건 제 이름이고, 제 직업에 관해서는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직업이요? 그냥 사용인 중 한 사람인 게 아닌가요?”
내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자 루베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궁금하니 어서 얘기해보라는 듯한 그 시선에 나는 목소리를 한껏 깔고서 대답했다.
“저는 사실 이 저택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집사님이 직접 데려온 명탐정이에요.”
“명탐정이요?”
“제 손에 들어왔던 수수께끼 중에 풀지 못했던 건 단 하나도 없었어요.”
“……우와.”
정확하게는 게임 설명에 적혀 있던 내용에 불과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거짓말은 아니잖아.’
아니, 거짓말이라고 하면 또 어때.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얀 거짓말 정도는 하늘에서도 동의해줘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대놓고 뻔뻔해지기로 한 나는 어깨를 쫙 폈다.
“대단하다.”
루베르는 아까의 무서움은 온데간데없이 호기심 가득한 붉은 눈을 반짝였다.
누가 보더라도 내 말을 믿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양심이 좀 찔리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나가려면 루베르의 협력은 필수였으니까. 나중에 나보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어때요. 이런 제게 저하의 수수께끼를 맡겨보시겠어요?”
다시 한번 내민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던 루베르가 이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었다.
* * *
마음을 굳힌 루베르와 다시 방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기까지는 큰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무엇보다 짐이 없기도 할뿐더러 인원도 두 사람과 인형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포피를 안아줘! 루!”
“응, 포피.”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흔드는 포피를 안은 루베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음…….”
나는 눈앞에서 아직도 반짝거리고 있는 화살표를 쳐다봤다. 저 길을 따라가면 분명 뭐가 있긴 할 것 같은데.
‘이 얘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어찌 되었든 루베르는 게임 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 아이한테 여기가 게임 속이니, 너는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이니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좋을 일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고민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루! 그걸 찾아보는 건 어떨까?”
“뭘?”
“아버지가 언제나 마물들을 처리하려고 들고 다니던 마검 말이야. 그게 있으면 귀신들도 다 쓱싹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크리튼을 얘기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