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어떻게 스테이크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의 표현으로는 입에서 살살 녹는 것이 풍미 또한 장난 아니라고 했는데,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제대로 맛을 음미할 새도 없었다.
“그럼 가져다드릴까요?”
마지막 후식까지 내온 직원이 이설에게 물었다. 식당에 들어오면서 맡긴 케이크를 말하는 것이다. 이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청혼할 시간이었다. 더 우물쭈물했다간 타이밍을 놓칠 게 뻔했다.
잠시 후 직원이 케이크를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눈 좀 감아줄래?”
이설은 얼른 백인서에게 말했다.
“지금?”
“어. 내가 뭣 좀 해야 할 게 있어서.”
백인서가 순순히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 위로 케이크가 놓였다. 이설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양초를 꽂기 시작했다.
초록색 케이크 위로 예쁘게 서 있는 일곱 개의 초를 보는 순간 심장박동이 무서운 속도로 치솟았다.
축하 인사를 건넨 후 직원이 돌아서자 이설은 떨리는 손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처음엔 ‘나’라고 쓰인 초에, 그다음엔 ‘라’라고 쓰인 초에, 마지막으로는 ‘래’라고 쓰인 초까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이제 눈 떠도 돼.”
천천히 눈을 뜬 백인서가 눈앞의 케이크를 보더니 잠시 말을 잊었다.
“놀랐어?”
이설은 두 손을 모으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아니, 사실 되게 많이.”
백인서는 약간 얼이 나간 듯했다. 자신의 생일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했었나 보다.
“어때? 선물 마음에 들어?”
“너무. 지금까지 받은 생일 선물 중 최고야.”
“그럼…… 받아주는 거야?”
“이런 선물을 안 받으면 백인서가 아니지.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던 일인데.”
백인서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설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꾸를 하면서도 이 상황이 못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아직은 이르다고 말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럴 리가. 사실은 나도 오늘 너한테 청혼하려고 했었어.”
“진짜?”
“그게 아니면 이렇게 차려입을 이유가 뭐겠어.”
백인서가 씩 웃으며 오른손으로 제 정장 상의를 툭 쳤다.
“그럼 내가 먼저 청혼해서 조금 아쉬웠겠네?”
“전혀. 나한테 중요한 건 우리 둘이 결혼한다는 사실이거든.”
그건 맞다. 누가 청혼을 먼저 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와 백인서가 이 결혼에 동의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거지.
“일단 촛불부터 끄자. 다 녹아내리겠어.”
이설은 얼른 백인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같이 끌래?”
백인서가 부드럽게 묻는다.
“그럴까?”
눈을 한번 맞춘 다음 인서와 이설은 환하게 불을 밝힌 케이크에 얼굴을 기울이고 동시에 숨을 훅 불어넣었다. 반짝반짝 살아 움직이던 불꽃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금방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이설은 기도했다. 백인서와 내내 행복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엄마와 오빠에게도 행복한 일만 있게 해달라고.
“이제 초는 빼도 되겠지?”
쑥스럽기도 하고 청혼도 무사히 끝냈으니 계속 저 알록달록한 초를 꽂아놓을 필요는 없었다.
“잠깐만.”
“왜?”
“사진부터 찍은 다음에.”
백인서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와 숱하게 만남을 지속했어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항상 사진을 찍고 휴대폰에 저장하는 일은 이설의 몫이었으니까.
찰칵.
그녀가 일주일 넘도록 가슴 졸이며 준비했던 청혼의 증거가 휴대폰 카메라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사진이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언제든 기억이 날 때마다 삶의 순간순간들을 꺼내 볼 수 있으니.
백인서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을 땐 봄기운이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날씨 정말 좋다.”
이설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삶의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빛이 났다. 호수 표면은 표면대로,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꽃나무는 꽃나무대로. 어느 것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빛이 나는 건 역시 백인서였다. 그에게선 늘 긍정의 기운이 넘쳐났다. 때론 그 기운이 흘러넘치다 못해 이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빛이 나는 사람 옆에선 다른 사람도 덩달아 빛이 나는 법이다.
이설은 제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인서의 손을 가만히 힘주어 잡았다. 빈틈없이 맞닿은 손바닥으로 기분 좋은 온기가 넘실댔다.
이렇게 충만한 순간이 또 있을까. 봄꽃이 화사하게 핀 산책로를 걸으면서 이설은 또 한 번 깨닫는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감사한 일은 다름 아닌 백인서를 만난 것이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어두운 터널 안에 갇혀 볼품없이 허우적댔을 것이다. 출구가 있음에도 감히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같은 자리에서만 맴돌다가 종국에는 서서히 시들어 버렸을지도.
늘 생각했었다. 수렁 같은 진창에서 구르는 건 저 하나로 족하다고. 괜히 백인서까지 끌어들일 필요 없다고.
어두운 터널에 갇힌 그녀에게 백인서는 주저없이 손을 내밀었다.
「혼자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돼. 지금껏 넘치도록 애썼잖아. 내가 나눠 가지겠다고. 나와 헤어지고 싶을 만큼 정이설 네가 버거워 미치겠는 그거. 다 감당하겠다니까?」
그때도 지금도 백인서는 참 투명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상대 앞에선 재고 따지는 것이 없었다. 이설이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그는 보란 듯 더 다정해졌다. 때론 더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하고서.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저에게 맹목적으로 구는 백인서가 안쓰러워서. 이제는 안다. 무엇이 백인서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들었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그런 거니까. 아무리 온 힘을 다해도 그런 마음 앞에선 위태롭게 막아놓은 벽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기 마련이다.
「응? 이설아. 내가 구속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그게 족쇄든 뭐든 상관없이.」
다정하게 불리는 제 이름 석 자에, 기꺼이 구속되어 주겠다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 이설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슬쩍 올려다본 하늘이 유독 파랬다. 가을 하늘 같은 봄 하늘이었다. 구름은 또 어찌나 새하얀지. 이설의 마음 역시 두둥실 떠올랐다.
“산책 끝나면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얼굴 가득 봄 햇살을 묻히고서 백인서가 묻는다.
“음…… 반지 사러 가는 건 어때?”
“반지?”
“오늘 청혼했잖아. 반지까지 서로 교환해야 완벽하지.”
“아아.
백인서가 감탄사 비슷한 말을 내뱉는다.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갈까?”
“우선 호수부터 한 바퀴 돌고. 아니, 이참에 두 바퀴 돌까?”
“도암호수가 얼마나 넓은데 그런 소리를 하냐. 그리고 너 힐 신어서 그렇게 오래는 못 걸어. 발 아프다고. 다음에 많이 돌자.”
“반지 사러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뭐, 그런 이유도 있고.”
“백인서가 원한다니까 호수는 그만 돌까?”
이설은 못 이기는 척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인서가 그녀의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걸음을 옮긴다.
고마워, 인서야.
입술 안쪽에서 이설은 작게 속삭였다.
「오기 힘들면 내가 가?」
언젠가 백인서가 물었다. 그렇게 말할 때의 그는 정확히 달빛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가 본 가장 따뜻한 눈빛을 하고서.
그는 이설이 어렵게 한 발을 내딛자 더는 가까이 오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한 뼘 남은 공간을 순식간에 좁히면서 그녀를 자신의 너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잘하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것 말이야.」
칭찬을 건네던 순간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던 백인서의 숨결을 이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무 따뜻하고 상냥해서 복잡하게 얼크러져 있던 내면을 깊숙한 곳까지 다독여주던 숨결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되돌려 줄 때였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계속 그 어둠을 되새김질하고 있어선 안 되니까. 그게 터널을 빠져나오도록 도와준 사람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삶에 대한 예의였다.
사실, 터널을 통과해서 나온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백인서 역시 그녀 못지않게, 어쩌면 더 길고 어두울 수도 있는 터널을 지나왔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스스로 길잡이가 되어 터널을 빠져나온 반면, 그녀는 그가 내뿜는 빛에 의존해서 힘겹게 빠져나왔다는 것이 다를 뿐.
이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 그 아래로는 흐드러지게 핀 봄꽃 천지였다. 오랜 시간 그녀를 가두고 괴롭혔던 터널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TV에서 우연히 봤어.”
담담히 말을 꺼내자 백인서가 호기심을 담고 쳐다본다.
“환절기엔 두 가지가 함께 온대. 하나는 안개, 그리고 또 하나는 감기.”
“그래?”
“갑자기 생각나서 말해봤어.”
“둘 다 좋은 거네?”
“어떻게?”
“아침에 안개가 진하게 낀 날은 분명 맑은 날이 될 테고, 감기는 당장엔 성가시고 아프지만 며칠 앓고 나면 건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잖아. 몸이 가뿐해지는 건 물론이고.”
누가 긍정의 아이콘 아니랄까 봐 백인서는 말도 참 기분 좋게 했다.
“우리 창문 열고 갈까?”
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돼 물었다.
“바람 쐬고 싶어?”
묻고는 있지만 백인서의 손은 이미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응, 날이 너무 좋아서.”
스르르 내려가는 차창으로 쨍한 봄 햇살과 한낮의 뜨뜻한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설은 잠시 눈을 감고 그 모든 것을 폐부 깊숙이 받아들였다.
“손.”
“어?”
“잡게 달라고.”
“아아.”
이설은 얼른 제 왼손을 백인서에게 내밀었다. 온기를 가득 품은 손이 그녀의 손을 빈틈없이 맞잡았다. 열린 창으로는 봄꽃 내음을 가득 실은 산들바람이 넘나드는 가운데 인서와 이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에 깍지를 꼈다. 공기 한 점 들어갈 틈도 없이 촘촘히. 그런 다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들 사이로 부드럽게 섞여 들어갔다.
〈구속되어 줄게, 기꺼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