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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29화 (129/130)

129화

백인서는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그녀를 위해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을 백인서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운전석에서 내려 보닛을 빙 돌아왔다.

“어?”

이설은 저를 향해 걸어오는 백인서를 보고 멈칫했다. 한껏 꾸민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백인서 역시 어디로 보나 완벽한 차림이었다.

그는 짙은 네이비 색감의 정장 재킷 안에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셔츠를 갖춰 입었으며 마무리로는 세련된 디자인의 타이를 매고 있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마저 말끔하게 뒤로 빗어넘기는 바람에 한층 더 어른스럽고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최고급 정장 화보에서 막 빠져나온 모습 같다고나 할까. 어떤 탑 모델과 견주어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아우라와 핏이었다.

“오늘 되게 멋있는데?”

이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섰다가 백인서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칭찬을 늘어놓았다.

“좀 그런가?”

평소 단정한 점퍼에 운동화 차림만 고수하다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보니 백인서는 스스로도 굉장히 어색한 듯했다.

“아니야, 너무 잘 어울려. 맘 같아서는 매일 보고 싶은데 업무상 불가능하겠지?”

“너도 오늘 무척 예뻐. 쥬얼리도 잘 어울리고.”

“아아, 이거?”

이설은 제 양쪽 귀와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쑥스러운 손놀림으로 더듬었다.

“너무 과한 건 아니지?”

“전혀. 너한테 딱이야.”

백인서가 손을 뻗어 이설의 볼을 슬쩍 쓰다듬었다가 놓아주었다.

“내가 해줄게.”

차에 오르자 백인서가 상체를 숙여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저를 응시하던 암갈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고마워.”

이설은 반 박자 늦게 말이 나왔다. 수만 번도 더 보았을 백인서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달리 깊고 진했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가?

금방 거리를 벌릴 줄 알았는데 백인서는 그녀에게 상체를 기울인 자세 그대로였다.

“……왜?”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키스하고 싶어서.”

아주 짧게 대답한 백인서가 이설의 턱을 가만히 그러쥐고는 얼굴을 기울였다. 숨결이 뒤섞이고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처음엔 가볍게, 그다음엔 진하게. 뜨끈한 혀가 입안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너무 좋아 이설은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입술은 한참 만에야 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백인서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상체를 깊이 숙인 채였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서.

입술 끝이 확연히 올라가 있는 백인서는 정말 근사했다. 이설은 저에게 고정되어 있는 암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얽으며 생각했다. 키스는 입술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백인서는 지금 그녀의 얼굴 곳곳에 키스하고 있었다. 이마와 눈동자, 두 뺨, 턱과 목덜미 전부에.

시선이 닿는 곳이 못내 간질간질해서 이설은 방금까지 백인서의 입술과 맞물려 있던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더듬었다. 타액이 묻은 입술 표면이 마냥 매끄러웠다.

백인서가 다시 얼굴을 기울였다. 츕, 아랫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 이설의 손가락 위로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손끝과 손톱, 손가락은 물론 손등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닿는 입술이 사뭇 다정했다. 가끔은 그 사이로 혀가 나와 슬쩍 핥아댈 때면 전신이 움찔대기도 했다.

이설은 온통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저를 삼킬 듯 응시하는 뜨거운 눈동자와 대면했다. 깊은 곳이 사정없이 반응했다. 손등에 하는 키스가 이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은밀한 행동이었던가?

달달 떨리는 손을 겨우 내리자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우아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던 백인서는 이제 없었다. 그는 이설의 좁은 입안에서 탐욕스럽게 움직였다. 매끄러운 치아를 핥아 올리고 입안 점막 깊숙한 곳까지 철저히 비벼대더니 종국에는 그녀의 혀를 자신의 혀에 밀착시킨 후 질척한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이설은 눈을 감은 채 완전히 깨어나 버린 자신의 감각을 백인서에게 내맡겼다.

차창 밖으로는 도로를 따라 벚꽃이 절정이었고 그녀는 오늘 백인서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사한 키스를 즐길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할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아니, 서로가 원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지금과 같은 키스를 할 수 있었다. 이설은 이제 가빠진 숨소리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겨우 입술이 떨어진 건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잠깐만 여기서 세워줄래?”

차가 디저트 카페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이설은 손짓했다.

“금방 다녀올게.”

백인서를 차에 두고 잰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녹차 케이크와 특별히 주문한 양초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밖으로 나오자 백인서는 핸들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이설이 가게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약시간에 늦은 건 아니겠지?”

차에 오르며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넉넉하게 출발했으니까 상관없어.”

백인서가 손을 내밀어 이설의 볼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여기야?”

이설은 눈앞에 보이는 4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응, 한 시 예약이니까 지금 들어가면 딱 맞을 거야.”

백인서가 손을 내밀었다. 이설은 저를 향해 내민 손에 얼른 제 손을 얹었다. 평소보다 더 촘촘하게 손깍지가 껴진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있어 곧바로 탈 수 있었다. 좁은 공간에 백인서와 둘만 서 있자 기다렸다는 듯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좀 설렌다.”

이설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신경은 이제나저제나 손에 들고 있는 케이크 상자에 쏠려 있었다.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청혼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초 일곱 개가 들어 있는.

많이 놀라면 어떡하지?

백인서 앞에서 보란 듯 케이크를 꺼낼 생각을 하니 얼크러진 심장박동이 더 제멋대로 뛰었다.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다 못해 흥건해질 지경이었다. 심장이 터지면 어떡하나 진지하게 걱정이 되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작 수초에 불과할 짧은 시간임에도 이설은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할딱였다. 청혼이 이토록 심장 두근거리는 거였다니. 사람들은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다들 척척 해냈다는 건지 모르겠다.

식당 내부로 들어서자 직원이 두 사람을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도암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와, 뷰 너무 좋다.”

이설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에 익은 분수대와 산책로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들과 함께.

“기억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저기로 자전거 타러 왔던 거?”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여기로 예약한걸?”

백인서 역시 추억이 되살아났는지 목소리가 제법 잠겨 있었다.

“그땐 너나 나나 되게 충동적이었어, 그치? 꽤나 먼 거리였는데 겁도 없이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하다니.”

“나한텐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어.”

“왕복 한 시간도 넘는 거리였는데?”

“그게 뭐라고. 네가 원하면 더 먼 곳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갔을 텐데.”

백인서의 눈꼬리가 둥그렇게 휜다. 화보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새로 저렇게 웃으니 심장이 단번에 툭 떨어졌다.

“그렇겠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백인서 너니까.

부드럽게 수긍하는 이설의 머릿속으로 자전거 한 대가 달려왔다. 얇은 교복 상의가 펄럭이도록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 백인서와 그의 너른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열아홉의 이설이 자전거 위에 앉아 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장마철 습기를 머금은 채 눅눅했으며, 벌겋게 부어오른 볼은 펄럭이는 옷자락에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지만 이설은 묘하게 설레었다. 이따금씩 보여주는 백인서의 미소와 자상한 행동들 때문에.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을 때 희미하게 나던 땀 냄새가. 그러면서도 싫지 않았던 그 냄새들 속에 묻어 나오던 청량한 체향이.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그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는 것인지 신기했다. 어쩌면 전면으로 보이는 도암호수 풍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식사 마치면 저기로 산책하러 갈래?”

이설은 손가락으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책로를 가리켰다.

“그러지 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면 언제든 오케이 하는 백인서답다. 본인의 생일날에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다.

“또 하고 싶은 건 없어?”

너그러운 제안이 이어졌다. 이설은 도암호수 풍경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청혼 계획이 떠올랐다. 입안이 도로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있긴 있는데.”

정말 하고 싶은 일이.

“근데?”

“어, 그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직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았건만.

이설은 새가슴이 된 심장 부위를 손끝으로 가만히 눌렀다. 그래도 콩닥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이러다간 청혼도 하기 전에 심장마비에 걸릴지 모른다.

“뭔데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 어려운 거야?”

백인서가 상체를 기울이며 이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먼저 주문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뭐 먹을지도 결정 안 했잖아.”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런가?”

“응, 빨리 주문부터 하자.”

허둥대는 모습이 영 낯선지 백인서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던데 그거로 할까?”

“알고 있었어?”

그제야 백인서가 상체를 똑바로 펴며 물었다.

“동기 중에 한 명이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스테이크가 예술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라고. 그래서 너랑 언제 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

직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오자 두 사람은 셰프 특선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이설은 다시 한번 결심을 되새겼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꼭 청혼을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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