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설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인서가 상체를 폈다.
“저녁은 먹었니?”
현관 키 패드에 손을 얹고 백인서가 물었다.
“나 오늘…… 김 과장님 만났어.”
이설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백인서가 키 패드에서 손을 떼고 내려다보았다.
“김 과장님은 왜?”
“너 때문에.”
어젯밤 네 표정이며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나 때문이라니?”
“엄마 얘기…… 다 들었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 아니라며.”
“…….”
“여기로 오면서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너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해. 근데 막상 네 얼굴을 보니까 아무런 생각도 안 나.”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이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왜 지금껏 백인서를 뭐든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백인서도 얼마든지 상처받을 수 있고, 그 상처 때문에 오랜 시간 아파하는 보통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고통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그가 얼마만큼 아픈지는 돌아볼 여력도 없었다. 위한답시고 밀어내기나 하고.
“위로 안 해줘도 돼.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잖아.”
커다란 손이 이설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냥…….”
너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어떤 말을 꺼내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아, 나 참 바보 같다. 이렇게 말주변이 없었나?”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설은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 이러려고 전화도 없이 찾아온 건 아니었다. 성숙한 어른처럼 백인서를 다독여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였다. 그런데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논리적인 말은 한마디도 나와주지 않았다. 그저 심장 한가운데가 예리한 칼로 베인 듯 아프기만 했다.
어떡하지, 인서야? 너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너와,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 그걸 옆에서 전부 감내해야만 했던 아저씨, 할머니까지. 다들 상상이나 했었을까.
쉼 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이설은 문득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그녀가 지금껏 백인서의 앞에서 흘린 눈물은 전부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인서는 언제나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 주었으므로.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었다. 이설은 순전히 백인서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 돼서야 깨달은 뼈아픈 자각이었다.
사귀기 전에도 그랬고,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 이후에도 그랬다. 생각해보면 항상 백인서가 있었다. 그녀가 끔찍하리만큼 힘들었던 순간마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았다.
이설은 최대한 호흡을 가라앉혔다. 백인서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야 했으므로. 하지만 입술이 떨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내밀한 곳에서 무언가가 이미 통제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 호흡도 목소리도 그녀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가야 할 곳으로 습기 찬 마음만이 퍼져나갔다.
“너 모르지?”
이토록 숨 막히는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인서였다.
“……뭘?”
“나 지금 굉장히 많이 위로받고 있다는 거.”
“……어떻게? 난 그냥 네 앞에서 울기만 하고 있잖아. 제대로 말도 못 하면서.”
“그래서 위로가 된다고.”
무슨 말인가 싶어 이설은 백인서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정이설 네 머릿속엔 나밖에 없잖아. 아니야?”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모동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온통 백인서에 대한 걱정만이 꽉 들어차 있어서 다른 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나한텐 그게 가장 큰 위로라고. 다른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어.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거든.”
“……정말?”
“언제나 그랬어. 정이설 네가 나한텐 가장 큰 위로야.”
“…….”
습관처럼 길쭉한 손가락이 이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 때문에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들을 귀 뒤로 넘겨주는 동작이 더없이 다정해서 이설은 습한 마음이 더욱 습해졌다. 정제되지 않은 울음이 자꾸만 꾹 다문 입술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이리 와. 안아줄게.”
볼이 흥건하게 젖도록 울고 있는 이설을 인서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너른 가슴에, 걱정과 안쓰러움으로 쉼 없이 떨고 있는 두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견고하게 바닥을 딛고 선 탄탄한 다리에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너랑 이러고 있으면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뭐든.”
머리 위로 깊고 낮은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렸다.
“고맙다, 이설아. 이렇게 찾아와 줘서.”
“……응, 언제든 찾아와 줄게. 네가 힘들든 힘들지 않든.”
이설은 인서의 품속에 갇혀 있던 팔을 빼서 그의 등 뒤로 둘렀다. 판판하고 너른 등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 수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백인서는 그녀와 있으면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런 느낌을 먼저 가진 사람은 자신이었다.
백인서가 곁에 있음으로 인해서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비겁할 수 있었다. 그를 좋아하면서도 매번 뒷걸음을 친 이유 역시 다른 사람은 전부 그녀를 떠나도 백인서만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저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겁쟁이는 아빠만이 아니었다.
백인서가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벽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그의 오랜 기다림에 응답해주어야 할 때였다. 이렇게 저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투명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이설은 손바닥을 둥글게 모은 다음 인서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상체를 깊숙이 숙인 인서가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는 이설을 더욱 깊게 안았다. 달빛 아래로는 봄을 맞은 벚꽃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민 가운데, 두 사람의 몸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촘촘히 감겨들었다.
* * *
언제 잠이 깼는지 모를 일이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밖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정확히 네 시 오십 분이다. 이설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린 후 옆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여전히 잠에서 깨진 않은 상태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댔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박동과 고르게 퍼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이설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픈 눈빛의 백인서는 처음이었으므로.
다시 눈을 감았다. 도로 잠이 들 기색은 없다. 레지던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동기들 말을 들어보면 알람을 서너 개씩 맞춰놓아도 아침만 되면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다는데 이설은 예외였다. 다섯 시 전후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침잠이 없기는 엄마와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내력인 듯했다.
손을 들어 뻑뻑한 눈 주위를 문질렀다. 어젯밤 펑펑 울어서인지 많이 부었다.
샤워라도 할까?
몸을 일으키기 전 고개를 돌려 잠든 백인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진 백인서는 어린 시절의 백인서를 떠올리게 한다. 수줍음 많고 순수하고 태권도밖에 모르던 열두 살의 백인서를.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어쩜 이렇게 길 수가 있지? 볼 때마다 신기했다. 반듯한 이마 아래 속눈썹이 비현실적으로 길어서. 게다가 숱도 많아 빽빽하기까지 하다.
손을 거두고 눈앞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잠든 백인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동공 속으로 잘 정돈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뭐랄까…… 놀랍도록 잘생겼지만,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어제의 여파인 듯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백인서의 얼굴을 앞에 두고 지금처럼 애잔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조용히 응시하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백인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
이설은 괜스레 헛기침을 해보았다.
“몇 시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백인서가 물었다. 이설은 손을 뻗어 휴대폰을 가져왔다. 그새 시간이 또 흘렀다.
“5시 5분.”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목소리로 대답해주자 백인서가 부드럽게 웃는다.
“일찍 일어나는 건 여전하네?”
이르긴 하지?”
잠기운이 서서히 걷혀가는 시선과 말간 시선이 얽혀들었다. 자동반사적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설은 지레 목이 탔다. 백인서와 눈을 마주하면 항상 이런 상태가 된다.
“레지던트는 출근 시간이 빠르니까 일어나는 시간도 빨라야지.”
교과서 같은 대답을 내놓고 이설은 시선을 돌렸다.
“피곤하진 않고?”
백인서가 팔을 뻗어 이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습관 돼서 괜찮아. 넌? 숙취 없어?”
“별로. 오히려 푹 잤어. 얼마 만에 이렇게 마음 편히 잤는지 몰라.”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암갈색 눈동자가 더욱 깊은 빛을 머금었다. 심장이 조여들 정도로 근사한 색감이었다.
“그럼 자주 여기 와서 자야겠네?”
“나야 좋지만 네가 귀찮지 않을까?”
“전혀. 백인서 네가 편히 잘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해야지.”
이설은 인서와 눈을 맞추고 살포시 웃었다.
“내가 왜 정이설 너한테 푹 빠졌는지 알아?”
“왜 푹 빠졌는데?”
“상냥해서.”
“나 상냥하다는 말 너한테 처음 들어. 오히려 못돼먹은 쪽 아닌가?”
멋쩍게 웃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이 또 두서없이 콩닥댄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무려 열두 살 때부터 봐왔는데 아직도 눈만 마주치면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다고?
“나 샤워 좀 할게.”
이설은 얼른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벌써?”
“일찍 준비하면 좋지.”
머뭇거리다간 또 허리를 잡힐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