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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23화 (123/130)

123화

취한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이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인서가 드라이어의 전원을 켰다. 곧이어 ‘윙’하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바람이 이설의 머리카락 위로 흩어졌다.

이설은 눈을 감은 채 백인서의 손길을 가감 없이 음미했다. 때론 흡족한 미소까지 머금고서. 머리카락을 말리는 일이 이토록 행복인 일인가 싶었다.

보송보송해진 머리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너는 안 누워?”

저를 빤히 응시하며 앉아 있는 백인서에게 물었다.

“누워야지.”

제 옆으로 자리를 잡는 백인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너무 기분 좋다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은은하게 퍼지는 프리지어 향기를 맡고 있자니 마음이 사뭇 너그러워졌다.

“꿈인 것 같아.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이설은 인서의 너른 품으로 파고들었다. 꽃향기에 섞여드는 백인서의 체취가 그녀의 감각을 기분 좋게 일깨웠다. 손을 뻗어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몸과 맞닿은 근육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운동선수도 아니면서 이 근육들은 뭐야?”

손바닥으로 허리 부분을 위아래로 쓰다듬자 이번엔 코앞의 울대가 표나게 오르내렸다.

“형사도 체력단련 많이 해야 하는 거 몰랐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범죄자들 잡으려고?”

“그 이유도 있고.”

“또 다른 이유는 뭐야?”

“여자친구하고 있을 때도 겸사겸사 필요하고.”

“여자친구하고 있을 때는 왜?”

“설마 몰라서 묻는 거야?”

“아…….”

행간의 의미를 깨달은 이설의 볼이 확 붉어졌다.

* * *

야근까지 마치고 돌아온 아파트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인서는 담담한 시선을 들어 적막에 잠긴 공간을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아빠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던 날의 모습과 가구 따위가 하나도 없어 휑뎅그렁하기 그지없던 거실과 주방 풍경, 그 안을 부유하는 어색하고 낯선 삶의 기척 같은 것들이.

선이 굵은 얼굴 가득 수많은 감정을 품어 안은 아빠와 거실 유리문을 열고 나갔을 때 마주한 건 베란다를 온통 물들이고 있던 진홍빛 여름 노을과 그 뒤로 무심하게 펼쳐지던 회색빛 아파트 단지였다.

어린 눈에도 제법 그럴싸한 전망이었다. 낡고 비좁았던 예전 아파트와는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으니까. 아파트 내부도, 바깥도.

아빤 그날도 평소와 같은 행동 패턴을 보였다. 맥락 없이 우수에 잠기는가 하면, 뜬금없이 분위기를 바꾼답시고 껄렁한 농담을 던져댔다. 낄낄대는 웃음소리를 추임새처럼 곁들여가면서.

그때 아빠랑 무슨 얘기를 나누었더라. 맞다. 약속을 하자고 했었지. 언제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상의하자고.

인서는 피식 웃었다. 정말 힘들 땐 옆에 있어 주지도 못할 거면서. 안 그래, 아빠? 살아 있을 땐 하루가 멀다고 범인 잡으러 다니느라 집에도 잘 없더니,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니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가버렸잖아.

지금은 어때? 혹시 엄마는 만났어? 엄청 보고 싶어했잖아.

그때는 일부러 모른 척했는데, 모동 아저씨랑 늦게까지 술 먹고 들어온 날 밤이면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우는 거 다 알고 있었어. 다 알면서도 아빠 민망할까 봐 입 꾹 다물어준 거야.

인서는 사십 대의 아빠가 그랬듯 베란다 난간을 손에 쥐고 밖을 응시했다. 예전엔 반대쪽 끝으로 정이설이 사는 아파트를 가늠하며 설레는 감정을 다독였었다. 지금은 그저 모르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을 뿐이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어둠에 잠긴 아파트 단지 풍경을 더듬었다. 밤늦은 시간대임에도 불을 끈 가구 수보다 불을 밝힌 가구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다들 뭐를 하고 있는 건지.

인서는 가끔씩 생각했다. 위아래로 포개지듯 층층이, 얇은 시멘트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모여 사는 주민들 모습을 보면서 답답할지언정 외롭지는 않겠다고. 아빠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게 뭐가 됐든, 혼자서만 버티는 건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은 절대 권장하지 않는다고.

「그렇잖아. 어떨 땐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 못 하는 일도 있거든. 그럴 땐 둘이 버티면 제법 위로가 되는 편이지. 그러라고 사람인 거고. 사실, 혼자서만 감당해보라고 누가 등 떠민 적도 없었는데 괜히 미련하게 굴었단 생각이 들어. 속이 다 곪아 터지는 줄도 모르고.」

돌이켜보니 전부 아빠와 정이설 두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마음 약한 아빤 결국 본인이 말한 걸 지키지도 못하고 영원히 가버렸다.

하긴, 어린 아들에게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른인 자신도 감당 안 되는 일을 이제 갓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말하는 일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을 테니까.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이해한다.

문제는 아빠에게 그는 스무 살이 되어도 언제나 초등학생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자신보다 덩치가 커졌어도 아들에게 기댄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못 했을 것이다. 아빠로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대신 혼자서만 속앓이를 하느라 내밀한 속대가 죄다 망가져서 문제였지.

정이설은 다행히 용기를 내주었다. 혼자서만 버거운 삶을 짊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작은 거 하나라도 그와 나누겠다며 물기가 촘촘히 배인 눈을 하고서 그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거면 되었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 서랍 앞에 가지런히 무릎을 꿇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서랍을 지나쳐 마지막 서랍에 손끝이 닿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마지막 서랍이 열렸다. 떨리는 손으로 눈에 익은 서류철을 끄집어냈다. 오래된 사건기록이었다.

인서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사건기록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돌아가신 아빠의 유품 정리를 하면서 본 게 처음이었고 지금이 사실상 두 번째였다.

유품이 돼버린 증거 자료 안에서 그의 엄만 유혈을 낭자하게 뒤집어쓴 채 함부로 짓이겨져 있었다. 사건 배정을 받고 출동을 나갔던 동료 형사로부터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전해 듣는 순간 아빠는 정신이 나갔더랬다. 적나라하게 찍힌 증거 사진은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태였다. 마음속 바람은 오직 한 가지였다. 아내를 이렇게 만든 살인자를 검거하는 것.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비에 씻겨 나간 상태였다. 현장 주변을 이 잡듯이 뒤져 그나마 건져낸 건 고작 비에 덜 젖은 담배꽁초 한 개가 전부였다.

DNA 분석결과가 나왔으나 불행하게도 유전자은행은 물론이고 대조군도 없던 시절이라 범인 특정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집요하게 탐문과 수색을 이어갔음에도 용의자는 오리무중이었고 수사 개시 한 달이 넘어가자 사건은 장기로 넘어갔다.

그 사이 장례가 치러지고 휴가를 받아 쉬라는 형사과장의 충고에도 아빤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렸다. 어린 인서는 할머니에게 맡기다시피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날은 손에 꼽았다.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가끔씩 집에 돌아올 땐 무슨 생각에서인지 과자 뭉치를 한 보따리씩 사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잠든 인서의 볼에 제대로 깍지도 않아 수염이 거칠게 난 볼을 비벼대곤 했다.

할머닌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불쌍한 녀석이라고.

그땐 단순히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아빠가 많이 불쌍한가 보다 하고.

과자를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아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마디 굵은 손으로 인서의 머리를 투덕투덕 쓰다듬어 주었다. 어떨 땐 한두 번으로 그쳤고, 또 어떨 땐 작은 머리통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오래도록 쓰다듬기도 했다.

이러면 과자를 어떻게 먹으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인서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수염이 삐쭉 돋아난 얼굴에 핏발 선 눈동자를 하고 저를 바라보는 아빤 할머니 말처럼 너무 불쌍해 보였으므로.

「아빠, 이거 먹을래?」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내밀었다.

「인서가 먹여줘.」

「내가?」

「응, 그래야 먹을래.」

고사리손으로 먹여주자 아빤 냉큼 받아먹었다.

「더 줘. 배고파.」

「더? 지금까지 밥 안 먹었어? 밤 열 신데?」

「묻지는 말고 빨리 줘.」

「알았어.」

아빠는 서너 번 과자를 얻어먹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이불도 제대로 안 덮고. 끙끙대며 베개를 베어주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아빠 자?」

슬쩍 물어보면 코 고는 소리만 요란했다. 순식간에 자버리네? 신기한 얼굴로 아빠 옆에 누우면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아빠가 팔을 뻗어 인서를 끌어안았다.

「으, 땀 냄새.」

아들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모르고 아빠는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인서는 숨이 막혀 할딱거리면서도 그런 제 아빠를 안아주었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부르듯 두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부자지간이었으므로.

가끔은 제가 아빠라도 된 양 널찍한 등을 조막만 한 손으로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그럼 아빤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그 큰 덩치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장기 미제로 처리될 것 같던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용의자가 잡혔다. 사건이 일어나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 관내에서 일어난 퍽치기 수사 과정에서였다. 범인이 피고 버린 담배꽁초를 수거해서 분석 의뢰한 결과 동일한 DNA가 검출됐기 때문이다.

해당 퍽치기 담당 수사관이었던 아빤 그 즉시 수사에서 배제되었다. 용의자와 수사관이 개인적으로 얽혀 있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뿐더러, 수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차원이었다.

어딜 가든 항상 엄마의 사건기록을 카피해서 가지고 다닐 정도로 범인 검거에 열을 올렸던 아빤 군말 없이 수갑과 권총을 반납하고 사건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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