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백인서는 그녀에게 온전한 믿음이 뭔지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엄마를 사랑하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대상이라기엔 너무나 유약한 존재였으며, 오빠는 기대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보살펴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항상 생각했다. 사랑하면서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데 백인서가 그랬다. 그는 이설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어도 자꾸만 다가왔다. 때론 날이 새파랗게 선 가시에 찔려 아프고 따끔거릴 텐데 개의치 않고 무던히도 다가왔다. 마치 이런 가시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떻게 그게 돼? 너도 아팠잖아.
이제는 알고 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 시절, 자신에겐 백인서만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는 걸. 미련하게 그 버팀목에 몸을 맡기는 대신 알량한 양심으로 무장한 채 밀어내느라 귀한 시간을 허비해서 그렇지.
다시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백인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한 번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두 번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무슨.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볼을 쓰다듬던 손이 미끄러져 내리듯 목덜미로 이동했다.
“너를 알지 못했으면 지금 같은 행복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기는커녕 시선이 머무는 여자나 있었을지 모르겠네. 전부 정이설 너니까 가능했던 일들이야. 미치도록 보고 싶고, 뭐든 함께 하고 싶고, 끝도 없이 안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은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감정들이거든. 그러니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
뭉클한 마음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데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는 백인서의 옆모습 위로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인서가 먼저 결혼하자고 말하길 기다리는 거야? 정말 좋아하면 먼저 청혼해도 될 것 같은데. 꼭 남자가 먼저 하라는 법 없잖아.」
이설은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있잖아.”
백인서가 돌아본다. 여상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설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좀 더 근사한 곳에서, 더 진심 어린 방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오다가다 던지는 안부 인사처럼이 아니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어, 그게…… 금방 까먹었어. 내가 요즘 잘 이래. 나이 먹었나 봐.”
이설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싱겁기까지.”
백인서가 픽 웃는다.
언제가 좋을까. 이설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에 골몰했다. 백인서에게 청혼하기 적절한 때가 언제인가에 대해.
아, 맞다. 조금 있으면 백인서 생일이었지.
이설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일정표를 확인했다. 마침 토요일인 데다 당직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하라고 등 떠미는 수준 아닌가?
“뭔데 혼자 웃고 그래?”
오피스텔 방향으로 차를 꺾으며 백인서가 물었다.
“네 생일 말이야. 다음 주 토요일인 건 알지?”
“그런가?”
“뭐야, 자기 생일도 확인 안 하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중요하지 그럼 안 중요해?”
무려 백인서 네가 세상에 태어난 날인데.
“갑자기 생일은 왜?”
“다른 약속 잡지 말라고.”
백인서는 이유도 묻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는 듯.
* * *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인서에게서 받은 프리지어를 화병에 꽂는 일이었다. 진한 꽃향기가 이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꽃향기가 맡아졌다.
“샤워할래?”
셔츠 단추를 손에 잡은 채로 백인서와 눈을 맞췄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함께 말이야.”
“……어?”
점퍼를 벗고 있다가 백인서가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무슨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가만히 이설을 쳐다보았다.
“같이 씻자고.”
“지금?”
“부담스러우면 말고.”
이설은 볼을 설핏 붉히며 몸을 돌렸다.
“내가 언제 싫댔어?”
재빠르게 다가온 백인서가 이설의 손을 잡았다.
“난 또 대답을 안 해서 부담스러운 줄 알았지.”
“그거야 놀라서 그랬던 거고.”
“왜?”
“잊었어? 항상 내가 먼저 함께 샤워하자고 졸랐잖아. 넌 마지못해 허락하는 분위기였고.”
“마지못해서는 아니었거든? 민망해서 망설였던 거지.”
“오늘은 안 민망하고?”
백인서가 조금은 짓궂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화르르 피어오를 만큼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민망하긴 한데, 그러고 싶으니까.”
“그게 전부야?”
은근한 목소리가 속마음을 더 드러내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백인서 너를…… 사랑하니까?”
이설은 말을 뱉어놓고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든 얼굴 위로 흡족한 시선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끝이 물음표로 끝나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뭐 함께 샤워를 청하는 이유로 충분하고도 넘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번쩍 들렸다. 이설은 놀라서 백인서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옷이라도 먼저 벗고.”
“들어가서 벗으면 되지.”
백인서는 아무 문제 없다는 표정이다.
“안 돼.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축축하게 젖은 옷 입고 출근할 셈이야?”
“그건 또 그러네.”
영 아쉬운 얼굴로 백인서가 이설을 내려놓았다.
“같이 살면 이런 불편함도 없고 참 좋을 텐데.”
독백처럼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셔츠를 벗기 시작한다.
“잠깐만.”
이설은 이미 두 번째 단추로 옮겨가기 시작한 백인서의 손을 서둘러 붙잡았다.
“내가 벗겨줄게.”
“……직접?”
사뭇 여유만만하던 백인서의 목소리가 설핏 떨렸다. 그럴 만도 했다. 먼저 샤워를 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인데 옷까지 벗겨주겠다니 조금은 얼떨떨할 것이다.
“오늘 처음이 되게 많네?”
관자놀이까지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 백인서가 피식 웃었다. 이설은 서른이 넘어도 저렇게 수줍은 얼굴을 할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백인서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190이 넘는 덩치로 벌게진 얼굴을 하고 있는 데도 지독히 매력적인 남자 역시 백인서뿐일 거라고.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제법 다부지게 말했다.
“이제부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말을 하느라 잠깐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 아래서 세 번째 단추가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못 그랬거든.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원하면서 매번 망설이고 뒷걸음치고. 그게 너한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면서.”
네 번째 단추를 풀다가 손이 도로 멈췄다. 지척의 거리에서 백인서의 너른 가슴이 빠르게 들썩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앞으론 그러지 않으려고.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거든.”
이설은 눈앞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호흡을 다독였다.
“이젠 내가 할게.”
이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백인서가 스스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진회색 셔츠가 벗겨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설은 근육이 촘촘하게 짜인 상체에 이어 탄탄한 허벅지가 드러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정이설 네 옷도 내가 직접 벗겨줄 거야.”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이설의 블라우스 단추를 톡, 톡, 풀기 시작했다. 아이보리색 블라우스가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뒤이어 눈처럼 하얀 브래지어와 카멜 색상의 스커트가, 그다음엔 손바닥만 한 팬티가.
백인서에게 안겨 욕실로 향했다.
부드럽게 쏟아지는 온수 속에서 이설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샤워를 했다. 백인서의 시선과 손길을 온몸으로 받으며 오래도록 느긋하게.
샤워를 하던 도중, 민망할 정도로 우뚝 솟은 백인서의 상태가 안쓰러워 다급히 관계를 갖기도 했다. 콘돔을 사용할 새도 없이 묵직하게 제 속을 채우며 들어오는 백인서는 언제나 경이로웠다.
이설은 비좁은 욕실에 뽀얀 김이 서리도록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벽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더 깊은 안쪽까지 퍽퍽 치고 들어오는 감각이 엄청났다. 미처 갈무리 못 한 신음이 입술 밖으로 비어져 나와 욕실 전체를 왕왕 울려댔다. 백인서는 그녀가 내는 신음이 자극적이라며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가 빠지고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샤워는 뒷전이 된 상황이었다.
이설은 욕실 바닥으로 사정의 증거가 뿌옇게 흩뿌려지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머리 말려줄까?”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자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백인서가 다가왔다.
“됐어. 어린애도 아닌데.”
“해주고 싶어서 그렇지.”
망설임 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이설은 곧 생각을 바꿨다.
“나 머리 길어서 시간 제법 걸릴 텐데 괜찮겠어?”
“그럼 더 좋고.”
“어째서?”
“계속 네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잖아.”
“못 말려.”
잠시 잊고 있었다. 백인서는 그녀에 한해선 뭐든 넘치도록 경험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이설은 인서가 자신의 머리를 말리기 편하도록 창가 근처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준비성도 철저하고. 내가 이래서 정이설을 좋아한다니까?”
“칭찬하는 김에 아예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그래?”
농담조로 말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백인서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거 되게 하고 싶었는데.”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프리지어 향기와 뒤섞여 말할 수 없이 몽글몽글한 느낌을 선사했다. 늦가을 홍시처럼 녹진녹진하게 풀어져 있던 심장이 엇박자를 가르며 뛰어댔다.
“머리 말리기 전에 하나만 더 해도 되지?”
“뭘?”
“이거.”
조심스럽게 턱이 들어 올려지고 벌어진 입술 위로 백인서의 입술이 뜨끈하게 맞물렸다. 츄우웁. 살포시 감은 눈 사이로 세세히 느껴졌다. 백인서의 입술과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시야를 가득 메운 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깊고 진한 눈동자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촘촘한 감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