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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9화 (119/130)

119화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어지면서 온몸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제대로 이룬 적이 없는 잠이었다.

“……인서야.”

“응?”

“나 좀 자도 되지? 너무 졸려.”

이설은 젖은 속눈썹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열렸다가 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백인서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만을 올곧게 응시하는 눈동자가 새삼 다정했다.

“그럼 자도 되지.”

넉넉한 품으로 가는 몸이 폭 안겼다. 이설은 넓고 따뜻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전에 없는 안도감이 확 밀려들었다. 이토록 포근한 순간이라니.

“고마워, 인서야.”

웅얼거리듯 작게 속삭였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항상 그랬어.”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알았어. 뭐든 네 말이 다 맞아.”

커다란 손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설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린 채로.

인서는 제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든 이설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눈가는 울어서 발긋했으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연신 달큰한 호흡이 쏟아져나왔다.

그새 입술이 거칠어졌네. 살도 많이 빠졌고.

엄지로 이설의 입술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거스러미가 하얗게 피어올라 손끝에 닿는 감촉이 까슬까슬했다. 수능 이후로는 항상 매끈하던 입술이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최근 몇 달 사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었다. 휴가를 얻어 함께 있어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아니, 이설아? 난 네가 옆에 있어서 참 좋다.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

인서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숨소리가 고르게 퍼지는 이설의 얼굴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이설은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였다. 그 모습조차 인서는 감사했다.

12장. 흐르는 강물처럼 (2)

평소의 삶으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설과 엄마, 그리고 형설은 처음부터 정근호라는 사람이 그들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었다. 대화 속에서도 아빠에 대한 언급은 일부러 자제했다.

사는 곳은 여전히 달랐다. 이설은 그녀의 오피스텔에, 엄마와 형설은 현재 엄마 명의로 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살던 예전 집은 이미 대출이 너무 많아서 사실상 은행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처분하고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은 차후에 있을지도 모를 오빠의 치료자금으로 은행에 넣어둔 상태였다.

“엄마, 우리 같이 살까?”

이설은 엄마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모처럼 정시퇴근을 하고 마주 앉은 자리에서였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엄마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왜? 엄마랑 나, 오빠 이렇게 다 같이 살면 좋잖아.”

아빠 때문에 형편없이 망가지고 조각난 가족이었다. 이제 폭군처럼 군림하던 아빠도 없으니 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우리끼리 살게.”

이설은 조금 의아해져서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래.”

“혹시 나한테 부담 줄까 봐 그러는 거야? 나 부담 안 가져. 설사 부담 좀 가지면 어때. 가족인데. 우리 그냥 예전처럼 함께 살자. 내가 그러고 싶어.”

“부담될까 봐 따로 살자는 거 아냐.”

“그럼 왜 싫다는 건데?”

“익숙해져서 그래. 딴 마음은 없어.”

엄마는 조용한 가운데 단호했다. 말투도 부드러웠고 눈빛 역시 비할 바 없이 부드러웠지만, 기저에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결연했다. 이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말로는 따로 사는 게 익숙해져서라고 했지만, 그 속에 품은 뜻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벌써부터 걱정하는 것일 테지. 자신과 오빠가 그녀의 삶에 걸림돌이 될까 봐. 그래서 또다시 그녀와 백인서가 결별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봐.

“엄마, 인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이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로 엄마를 설득해 본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녀도 백인서의 진심을 받아들이기까지 숱한 갈등을 겪지 않았는가. 어쩌면 엄마도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마음고생은 그녀 혼자로도 족했다.

“나 좀 서운해지려 한다. 엄마가 너무 단호하게 나와서.”

이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다.

“대신 자주 놀러와. 그건 언제든지 환영할 테니까.”

엄마가 얼른 덧붙였다. 영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응, 그럴게.”

“올 땐 혼자 오지 말고.”

“그럼?”

“인서도 같이 와야지.”

“알았어.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구박이나 하지 마.”

집 문제는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났다. 각자의 공간에 살면서 이설은 틈나는 대로 엄마와 오빠를 찾았다. 시간이 맞으면 백인서까지 데리고.

엄마는 이설이 백인서와 함께 들를 때마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매일 찾아오면 둘이 데이트는 언제 하냐며.

“엄마, 데이트가 별거야?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그게 데이트지.”

엄만 너는 그럴지 몰라도 인서는 안 그럴 거라며 더욱 미안해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설이도 보고 어머님이랑 형님도 뵈니까 너무 좋은데요?”

백인서는 말도 참 예쁘게 했다. 그러니 엄마와 오빠가 예전부터 백인서라면 껌벅 죽지.

“네가 정 그렇다면 뭐.”

엄마는 백인서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금세 수굿해졌다.

“나 너무 좋은 거 알아?”

이설은 내친김에 엄마에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집으로 찾아오는 거. 그게 너무 좋아.”

예전엔 본가를 방문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체기가 몰리듯 명치끝이 콱 막혔었다. 이제는 모든 게 정반대가 되었다. 엄마와 오빠가 있는 아파트만 떠올려도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암담함보다는 애틋함과 사랑이 먼저였다. 이설이 벨을 눌렀을 때 환한 얼굴로 마중 나오는 엄마와 오빠의 표정을 보는 것도 새로운 행복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무 때고 보고 싶어서.

알콩달콩 지내는 사이 해가 바뀌어 이설은 4년 차 레지던트가 되었다. 백인서가 속한 도암경찰서 강력2팀은 오부규 사건을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전원 1계급 특진했다. 백인서는 경사에서 경위로 진급했으며, 경감이었던 김모동 팀장은 경정으로 진급한 이후 올 2월에 시행된 인사이동에서 형사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부살인 피의자 곽인철은 무기징역을 받을 거라는 본인의 걱정과 달리 1심에서 징역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사에 적극 협조한 부분이 있으니 3심까지 가면 감형될 거라는 얘기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분분하게 오갔다.

엄마와 오빠의 삶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루 온종일 엄마의 보살핌을 받던 오빠 형설은 봄이 되면서 이설의 권유에 따라 집 근처에 위치한 발달장애인 주간보호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몇 번의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 오빠가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불안해했지만, 이설은 끈기 있게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오빠는 처음엔 영 적응을 못 하는가 싶더니 2주 정도가 지나자 조금씩 변화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엔 엄마와 오빠의 생활에도 나름 안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 * *

환자 인계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전화가 왔다. 이설은 액정에 뜨는 이름을 보고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언제 퇴근해?」

백인서의 목소린 언제 들어도 좋다. 성량이 풍부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별일 없음 곧. 넌?”

「방금 끝났어. 데리러 갈까?」

“나야 좋지.”

이설은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웃다가 입이랑 귀하고 붙겠다, 응?”

언제 들어왔는지 강라희가 팔짱까지 낀 채로 이설을 보고 있다.

“백인서하고 제발 잘 지내라며. 이제 와서 왜 딴소리?”

“누가 이렇게 대놓고 꽁냥거릴 줄 알았냐?”

“너도 남자친구 사귀면 되지.”

“누군 안 그러고 싶냐고. 백인서 같은 사람이 주변에 또 있어야 말이지.”

그건 맞는 말이다. 이 세상에 백인서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뭐냐, 정이설. 그 오묘한 표정은? 설마 내 말에 공감이라도 한다는 뜻이야?”

“뭐, 대충?”

별 고민도 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강라희가 입술을 비쭉 빼물었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네.”

이설은 부럽다를 연발하는 강라희를 등 뒤에 두고 병동 건물을 나섰다. 백인서는 이미 출입구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왔네?”

이설은 반가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넘어지겠다. 천천히 와.”

“굽 낮은 거 신었는데 뭘.”

이설이 가까이 다가오자 커다란 손이 이설의 손을 덥석 잡아 단단히 깍지를 꼈다.

“벌써 벚꽃 핀 거 알아?”

이설은 고개를 돌려 병동 건물에서 주차장까지 죽 늘어선 벚나무들을 쳐다보았다. 군데군데 뽀얗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벚나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4월 중순이잖아. 필 때도 됐지.”

백인서의 시선도 이설을 따라 뽀얀 벚꽃 위에 멎었다.

“저녁은 먹었어?”

차 문을 열며 백인서에게 물었다.

“아직. 넌?”

“난 너랑 먹고 싶어서 꾹 참았지.”

“상 줘야겠네?”

백인서가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기세다.

“혹시 괜찮으면 엄마한테 갈래? 너 좋아하는 LA갈비하고 전복 미역국 해놓으셨다던데.”

물론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 줄 알고 계시지만.

언젠가 엄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던 적이 있었다. 제 앞에 소복하게 놓인 LA 갈비를 두고.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엄마가 느꼈을 소소한 행복들을 별 필요치도 않은 진실로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계속 먹다 보니 정말 그 음식들이 좋아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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