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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5화 (115/130)

115화

“곧 검찰로 사건이 송치될 거란 얘기가 있던데 들으셨어요?”

후회를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들었으면. 네가 뭐라도 해주게? 아님, 백인서 그 자식이 도와주기라도 한다던?”

말끝으로 아빠가 조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뭐, 끗발도 없는 경사 주제에 도와줄 능력이나 있을까 모르겠다만.

“이미 증거 다 나왔잖아요. 지금이라도…….”

“무슨 증거.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한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거짓으로 만들어낸 증거?”

아빠가 형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설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백번 양보해서,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야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은 마음에 무죄를 주장할 수는 있었다. 사람들 말처럼 일단 부인하고 보는 게 정치인들의 속성이라면. 그런데 곽인철이 모든 죄를 자백한 마당에 이러는 건 정말 아니지 싶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증거를 조작해요. 우리나라 경찰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아요. 대체 무슨 증거를 조작했다고 그러세요. 있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지.”

“그래서 넌 내가 조폭 따위를 시켜 멀쩡한 사람을 청부 살해했다는 경찰 측 주장을 믿고 있다는 거냐?”

아빠가 서슬 퍼렇게 따져 물었다. 이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경찰의 말을 믿고 있었다. 아빤 엄마와의 이혼 사유에 대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늘어놓던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라면 더한 거짓말이라고 못할까 싶었다.

다만, 벼랑 끝에 몰린 아빠 앞에서 그렇게까지 단정적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더 들을 것도 없다. 속 시끄러운데 너도 경찰이랑 똑같은 이야기 되풀이할 거면 그만하고 나가.”

아빤 그녀의 속마음을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차갑게 식어버린 눈동자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우겨 봐야 아빠만 힘들어져요. 검찰에서 본격적으로 조사 들어가면 아무리 아빠라도 버틸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이설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아빤 그녀의 말에 동조할 생각이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꽉 다문 입술과 미동조차 없는 눈동자. 완벽한 헛걸음에 시간 낭비였다. 한숨과 함께 절망감이 몰려들었다.

“그만 갈게요.”

이설은 몸을 돌렸다. 더는 있을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아빠는 정말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 본인이 살 거라고 믿는 건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다.

“엄마는.”

문 가까이에 왔을 때 아빠가 말했다. 이설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빠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고 있는 거냐?”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내내 단호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서 나왔다.

“잘 계세요.”

“형설이는.”

“오빠도요.”

전부 거짓말이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사람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상황에서 보란 듯 잘 먹고 잘 지낼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파탄 나기 일보 직전의 가족 구성원들일지라도.

엄만 엄마대로, 오빤 오빠대로, 그리고 이설은 이설대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감내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너도 나 원망하냐?”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혼재한 눈빛으로 이설을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느닷없이 물었다.

“그건 왜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렇게 말들을 하길래 물어봤다.”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이설은 무감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의견뿐이었다. 그녀와 엄마, 오빠의 의견이 아니라.

지금도 그랬다. 이설의 의견을 묻는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은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말하니 한 번쯤 물어봐 준다는 느낌? 진정성이라곤 정말 한 줌도 없다. 이런 식의 질문에는 답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는다.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물어봤더라면 어땠을까. 예를 들면, 아빠 때문에 그동안 많이 힘들었니? 혹은 아빠가 너한테 너무 강압적으로 굴어서 상처가 되지는 않았니? 같은.

물론 아빠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은 아니었다. 아빤 스스로 자녀 양육이나 부부 관계에 있어선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니 방금 전의 질문이 나왔겠지. 너도 나 원망하냐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재 문을 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아빠는 배웅은커녕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말도 없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기대한 바도 아니었다. 경험해본 적이 있어야 뭘 기대하든지 말든지 하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현관문이 꼭 아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엄마의 이혼 결정을 너무나 지지하지만 왜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체증이 이는지 모르겠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현관문이 보였다. 아빠는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저 꽉 닫힌 공간 속에 지금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나간 후에 도로 불을 껐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통 깜깜하기만 한 공간에서 아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타박타박 걸어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무심한 그림자가 긴 몸체를 하고 따라왔다. 잠시 멈춰서서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그림자였다.

이설은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자신의 이면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밤공기가 제법 찼다. 어느새 늦가을이었다.

* * *

운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서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지금 밖인데. 넌?”

「이제 막 퇴근했어. 오피스텔엔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음…… 18분 정도? 방금 출발했어.”

「잠깐 들를까? 보고 싶은데.」

“너 피곤하지 않으면 그래도 되고.”

전화를 끊고 이설은 백인서의 마지막 말을 되새김질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무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무지근하게 울리는 심장을 달래며 도로 위로 시선을 던졌다. 밤 열 시에 가까운 시각인데도 10차선이나 되는 도로는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량들로 여전히 분주했다.

백인서는 오피스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까지의 거리라고 해봐야 차로 고작 12분 남짓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이설은 서둘러 인서에게로 다가갔다. 조용한 복도 위로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제법 크게 울린다.

“별로. 한 5분?”

백인서가 빙그레 웃었다. 마주 웃어주던 이설에게 백인서가 입고 있는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디테일을 최소화한 기본 디자인이었는데 색감도 차콜 그레이라 단정하고 무난했다. 백인서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못 보던 옷이네?”

“아, 이거?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

“팀장님 사모님이 주시더라고.”

“그래?”

팀장님이 사모님이 왜?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았더니 백인서가 바로 대답해 준다.

“얼마 전에 팀장님 생신이었거든. 선물 사는 김에 내 생각이 나서 같이 사셨대. 가끔씩 그러셔.”

“개인적으로 친한가 봐? 사모님이 선물도 다 주시고?”

“나름. 팀장님이 아빠 파트너였거든.”

“……아아.”

불시에 등장한 아저씨 때문에 이설은 뭔가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평소에도 유난히 백인서를 챙겨주신다 했더니 아저씨 파트너였구나.

“그럼 어릴 때부터 알았겠네?”

“초등학교 때부터니까 그런 셈이지? 아빠하고 팀장님 결혼식에서도 참석했었는걸?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야.”

“우와, 굉장히 오래된 인연이구나.”

“너한테도 소개하려던 참이었어.”

“나중에.”

이설은 시선을 들어 백인서의 점퍼를 눈에 담았다. 다시 봐도 색감이며 디자인이며 참 잘 골랐다 싶다. 눈썰미가 좋은 분인가 보다. 이렇게 백인서의 분위기와 딱 들어맞는 옷을 고르신 걸 보면.

“아무튼 잘 어울려.”

어깨까지 두드리며 칭찬을 해주자 멋쩍은 미소가 백인서의 얼굴 전체로 묻어났다.

“진짠데.”

“알아. 너 빈말 안 하는 거.”

그래서 내가 더 좋아하는 거지만. 작게 뒷말을 덧붙이는 백인서에게서 늦가을 내음이 물씬 풍겼다. 본가에서 오피스텔로 오는 내내 경직됐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다.

“얼른 들어가자.”

이설은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백인서가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렸다.

“봐도 돼.”

이설은 가만히 백인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비밀번호인데.”

“어차피 네 생년월일이야.”

“……어?”

“처음부터 계속 그랬어. 한 번도 안 바꿨다고.”

백인서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이유 물어봐도 돼? 분명 그땐…….”

“너를 밀어내던 때였다고?”

“말하자면 그렇지.”

“모르겠어. 상황이야 어떻든 네 생년월일로 비밀번호를 설정해 두니까 밤에 혼자 있어도 왠지 보호받는 느낌이 들더라고. 넌 꿈에도 몰랐겠지만.”

이설은 부드럽게 웃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신의 생년월일이 가는 손가락 아래서 꾹꾹 눌러지는 모습을 백인서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심장이 설핏 떨렸다. 문이 열리고 나란히 들어온 오피스텔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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