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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4화 (114/130)

114화

“알긴 잘 아네. 근데 감히 까마득한 유도부 후배놈이 대선배를 몰라보고 지금 말이 짧다고 항의하는 거냐? 우리 경완고 유도부가 언제부터 이런 개족보가 됐냐? 위아래도 없이. 어?”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면.”

김모동 팀장이 울뚝불뚝한 상체를 숙여 얼굴을 바짝 들이밀자 놀란 곽인철이 치켜들었던 고개를 얼른 숙였다.

“저는 피의자고 선배님은 그게 뭐냐…… 조사관이시잖아요. 그럼 서로 간에 예의를 지켜야죠.”

“칼같이 존대를 해라. 그 뜻이냐?”

“누가 그렇답니까. 제 말은요.”

곽인철이 되받아쳤다. 그 모습을 보고 김모동 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뚱하게만 있던 곽인철이 어느 순간부터 슬금슬금 자신의 말에 반응을 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 바짝 땅겨야 한다는 건 오랜 형사 생활에서 얻어낸 감이었다.

“자식이, 경완고 유도인의 프라이드가 있지. 청부살인이 뭐냐, 청부살인이. 쪽팔리게.”

“……그건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요.”

곽인철이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쪽팔린 게 뭔 줄 아냐? 저만 살겠다고 언론 플레이 하면서 신나게 오리발 까는 인간을 위해 미련하게 혼자 다 뒤집어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거야. 너 무기 받고 빵에 가면 네가 좋아 죽는 딸내미 얼굴은 평생 감옥에서만 볼 거냐고.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네 마누라는 또 어떻고. 너 미련 떠는 거 하나 때문에 살인 청부한 인간은 무죄로 쏙 빠져나가서 자기 마누라랑 자식 끼고 보란 듯이 잘살 텐데, 불쌍한 네 마누라는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한 것으로도 모자라 평생 옥바라지까지 시킬 일 있냐고.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그렇게 못하지.”

곽인철의 목이 점점 더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들었다. 사람을 난도질해서 피떡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하는 꼴을 보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너 사람 믿지 마라. 더구나 정치인? 오죽하면 그런 말이 있겠냐. 정치인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오히려 정근호 시장은 고위 공직자인 데다 죄질이 불량해서 가중처벌 대상이야. 네가 아니라 그 인간이 빼박 무기징역감이라고. 머리가 있음 진지하게 생각이란 걸 좀 해보란 말이야. 뭐가 정말 너와 네 가족을 위하는 일인지, 어?”

김모동 팀장은 말을 끝내고 슬쩍 곽인철 쪽을 쳐다보았다. 곽인철은 탁자 위로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불안하게 잘근거리고 있었다.

“……저기.”

한참을 그러고 있던 곽인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요. 담배 한 대만 얻을 수 있을까요?”

“담배?”

곽인철의 입에서 담배라는 말이 나오자 김모동 팀장의 눈동자가 반짝했다.

“……예, 좀 피우고 싶어서요.”

“담배 정도야 얼마든지 가져다줄 수 있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김모동 팀장의 입술 끝이 스르륵 올라갔다.

* * *

피의자 곽인철이 모든 죄를 자백함과 동시에 아빠와의 관계를 낱낱이 털어놓음으로써 수사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보람도 없이 아빤 하루아침에 사면초가 상태에 몰렸다.

곽인철은 살인에 직접 사용된 범구가 묻혀 있는 장소부터 아빠와 주고받은 통화와 문자 내역은 물론이고 아내인 유연숙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된 착수금 등, 범행에 관련된 일체의 증거자료들을 전부 수사팀에게 넘겨주었다.

현직 시장이 살인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소식에 도암시는 어디고 할 것 없이 전부 시끌시끌했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예외 없이 아빠의 범죄 연루 사실과 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차고 넘치도록 흘러나왔다.

대단한 건 아빠였다. 누가 봐도 물적증거가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출근해서 사무를 보았으며,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려는 상대 후보 측의 철저한 음해 작전이자 파렴치한 꼼수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아빠가 빠져나갈 구멍은 전무했다. 심지어 아빠와 같은 야당 출신 국회의원들조차 한목소리로 비난에 가세하고 있는데 무슨 근거와 자신감으로 저렇게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가 계속 무죄를 주장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또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 피해자 오부규의 둘째 아들이자 도암시 유력 건설회사 대표인 오성윤이었다.

그는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밝힌다며 피해자 오부규와 정근호 시장 사이에 경완동 일대의 개발 허가문제로 어떤 거래와 약속들이 오고 갔는지를 낱낱이 밝혔다. 그 속에는 뇌물공여와 뇌물수수를 비롯하여 불법 청탁과 인허가 문제, 협박 등 온갖 추잡한 범죄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아빠가 그렇게 숨기고자 했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오성윤의 행동 역시 비웃었다. 양심은 무슨 양심이냐며.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면 본인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 어떤 식으로든 밝혀질 테니 미리 양심선언을 들먹이는 것 아니냐고. 다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는 비아냥이었다.

유명 일간지에서는 이번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앞으로 어떤 법적 절차가 이어질 것인지, 어떤 죄목으로 아빠가 재판을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열거하기 시작했다.

대충 눈에 들어오는 죄목만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큰 것으로는 당연히 청부 살해였고 그다음엔 금품 수수 및 뇌물수수, 정치자금법 위반에 벌금과 추징금 등 죄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거기에 경완동 개발 비리 의혹과 아빠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힐 게 분명한 이혼 소송 및 가정폭력 문제까지.

사람들은 이제 정근호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건 물론이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라는 말을 대놓고 하기 시작했다.

* * *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이 깜깜했다. 아홉 시가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설은 숨을 한번 쉰 다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엄마와 오빠가 집을 나온 이후 혹시나 비밀번호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집 안은 불이 모두 꺼진 채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분명 퇴근했다고 들었는데.

헛걸음을 하게 될까 싶어 본가로 오기 전에 미리 비서실에 전화를 했었다. 아빠의 소재를 확실히 물어보려고.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왜 아무런 기척이 없지? 불까지 다 꺼놓고.

이설은 뭔가 모를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여전히 문이 열리거나 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배가 됐다.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빤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는데도 무반응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렇게 늦은 밤에.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두드려보았다. 반응이 없다. 살며시 문을 열어본 안방은 텅 비어 있었다.

서재에 계시나?

이설은 서재 쪽을 쳐다보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기미가 없다. 집으로 간다고 해놓고 다른 데로 가신 거 아닌가? 마음이 복잡하니까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잖아.

그럴 리 없다는 건 이설 자신이 더 잘 안다. 그녀의 아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혼술을 하는 건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으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요즘처럼 시끄러운 상황에서 남의 이목을 끌며 혼자서 술을?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역시 있을 곳은 서재밖에 없다. 심호흡을 하고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또 한 번 두드렸다. 역시 묵묵부답이다.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으로 자꾸만 불길한 상상이 스며들었다.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더 기다리지 않고 서재 문을 열었다.

“아니, 계시면서 왜…….”

이설은 당황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빤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옷은 출근할 때의 복장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냉랭한 인상이 오늘따라 더 빈틈없고 차갑게 느껴졌다.

“네가 어쩐 일이냐. 엄마도 없는 집에. 발 끊은 거 아니었어?”

아빠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가움이라곤 하나도 배어 있지 않은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설은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아냥은 무시하고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자 아빠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은 좀 켜고 계세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아빠는 일체 대꾸가 없었다. 그저 이설이 하는 행동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저녁은 드셨어요?”

이어지는 질문에 아빠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지금 뭐 하냐? 이제 와서 다 늦게 딸 노릇이라도 하게?”

“이 정도 질문은 오다가다 만나는 남한테도 해요. 아빠한테만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로 왔는지나 말해. 쓸데없이 사설 길게 늘어놓지 말고. 너나 나나 서로 살가운 이야기 주고받을 사이 아니니까.”

이설은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아빠의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상 저런 식의 반응을 대하고 보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역시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하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길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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