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정근호는 기자회견 끝머리에 개인적인 가정사로 인해 시민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내가 몇 년 전부터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먹였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를 신경불안증 환자로 몰아간 셈이다. 가정폭력 의혹 역시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이 겹친 아내를 제어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변명도 이어졌다.
정근호는 거듭 주장했다. 보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폭력 행위는 절대 없었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도 폭력의 증거를 찾지 못하지 않았냐며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정근호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대시민 약속을 했다. 도암시를 책임지는 현직 시장으로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의혹을 한 점 남김없이 해소하기 위해 2차가 아니라 3차, 4차 조사까지 성실히 임하겠으며, 아내와 아들의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니 부디 근거 없는 억측과 모략, 비방은 삼가 달라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이혼 소송 또한 아내가 치료를 받는 와중에 우울증이 재발해 벌인 일이므로 조만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매듭을 짓겠다고 재차 삼차 강조했다.
하, 뭐야.
이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살인사건의 전말이야 그녀가 세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다 치더라도 이혼 얘기와 가정폭력 얘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전부 엄마의 스트레스와 신경불안증세 때문에 기인했다는 말이잖아.
아빤 혹시라도 기자들의 취재 과정에서 본인의 병원 진료 기록이 들통날까 싶었는지 과거 몇 달간 렉사프로를 처방받은 전력을 들먹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약품인 렉사프로는 주로 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 강박장애 등의 치료에 쓰이는 약물이었다.
댓글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각자 자신의 주장만 펼치기에 바빴다. 야당 편에 서서 무조건 아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분인데 이런 일을 겪게 되어 정말 억울하겠다며 안타까워했고, 여당 편에 서서 아빠의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정치인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섞어 원색적으로 비난하기 바빴다.
이설은 체증이 이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아무리 이혼 소송이 진흙탕 싸움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더는 기사를 읽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긴, 이미 다 짐작하고 있던 일 아닌가. 어떻게든 단죄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수를 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씁쓸했다. 인간성의 끝을 보는 것 같아서.
자신도 이런데 당사자인 엄만 어떤 심정일까 생각하니 목이 콱 막혔다.
* * *
“뭘 그렇게들 목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어.”
사무실로 들어서던 김모동 팀장이 TV 앞에 모여 있는 팀원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정근호 시장 기자회견 하는 거요.”
황호범이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TV 화면에 두고서.
“뭔 할 말이 있다고 기자회견까지 한대?”
김모동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슬쩍 올려다본 화면 속 정근호 시장은 몸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에, 깎은 듯한 이목구비를 한 채 미리 준비해온 내용을 점잖은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용은 안 들으니만 못했다. 본인은 한 점 부끄럼 없이 결백하다느니, 언론을 통해 보도된 자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음해성 모략이라느니 따위의 말이 잘생긴 얼굴에서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화면 앞에 떼로 모여 있던 형사들의 미간이 점점 더 우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와, 진짜 정치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닌가 봐요.”
화면이 정근호 시장의 기자회견에서 다른 소식으로 넘어가자 TV를 끄며 황호범이 혀를 내둘렀다.
“정치인 그런 줄 이제 알았냐?”
김모동 팀장은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해대는 걸 보니 새삼 대단하구나 싶어서요.”
“그러게 말이다. 손에 잡히는 증거만 해도 수두룩 빽빽인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나 몰라.”
박성진 형사가 기가 찬 표정을 했다.
“여기서 이러구러 떠들 거 없어. 우린 우리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김모동 팀장이 두 사람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당장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하자고.”
“그게 뭔데요.”
황호범이 김모동 팀장을 쳐다보았다.
“뭐긴. 곽인철을 자백하게 만드는 거지. 그래야 정근호 시장이 저 멀끔하고 번지르르한 얼굴로 거짓말 씨부리는 꼴 안 볼 거 아냐.”
“쉽게 자백 안 할 기색이던데요?”
박성진 형사가 김모동 팀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또 무슨 헛소리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유치장 구석에서 오만 폼은 다 잡고 있습니다. 팀장님 말마따나 혼자 전부 뒤집어쓸 작정인가 봐요. 누가 알아나 준다고.”
박성진 형사가 혀를 끌끌 찼다.
* * *
“뭐 좀 먹긴 했냐?”
김모동 팀장이 묻자 곽인철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도 생각엔 변함이 없고?”
툭 던져보았으나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진짜 혼자 다 짊어지고 갈 계획이냐?”
“…….”
김모동은 입맛이 영 썼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대책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미간이 와락 찌푸려진다.
“인철아. 정근호 시장이 오늘 기자회견을 했거든? 뭐라고 했는 줄 아냐?”
“안 궁금합니다.”
“진짜? 하나도?”
“……예.”
“너 뒤통수치는 얘기만 오지게 했는데도?”
김모동 팀장은 살짝 운을 떼어놓고 마주 앉은 곽인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간의 맘고생을 보여주듯 며칠 새에 볼살이 홀쭉해져 있었다. 피부도 까칠하게 변했고.
“뭐, 안 궁금하면 그만두고.”
“안 하셔도 됩니다. 듣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근데 눈동자는 왜 흔들리냐? 정근호 시장이 너 배신했다니까 불안해서?”
“아니라고요.”
뚱한 얼굴로 곽인철이 부인했다.
“쯧, 너 혼자 백날 의리 지키면 뭐하냐. 정근호 시장은 전부 너 혼자 벌인 일이라는데. 자기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잘도 떠벌리더라.”
김모동 팀장은 이참에 아예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듣고 싶기는커녕 관심도 없다던 곽인철의 눈가가 불안감을 담고 미세하게 씰룩였다.
“너 잘 생각해야 돼. 정근호 시장이 너한테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네 인생하고 바꿀 만큼 대단한 금액이야? 너 다섯 살 먹은 딸도 있잖아. 마트에서 고생하는 착한 마누라도 있고. 여기서 이러고 있음 눈에 안 밟히냐? 눈 딱 감고 자백하면 감형받을 수 있는데 미련하게 왜 버티고 있어.”
“자백 하나 안 하나 어차피 무기 떨어질 거 다 알고 있어요.”
“누가 그래. 정근호 시장이 그래? 그 사람이 판사야? 형량을 좌지우지하게.”
“그렇잖아요. 저는 전과도 두 개나 있고, 이유야 어찌 됐든 사람을 죽였는데 무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돈이나 받아먹고 떨어지겠다고? 그 돈은 누가 준대? 오부규한테 빌린 채무도 입 싹 닫고 홀라당 집어삼킨 게 정근호 시장이야. 근데 잘도 주겠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멀쩡한 사람 하나 죽여놓고 돈 제대로 받았어, 못 받았어. 쥐꼬리만 한 착수금 빼면 아직 한 푼도 못 받았지?”
“…….”
“혹시라도 경완동 개발되면 콩고물 좀 떨어질까 봐 이러고 있는 거냐? 정근호 시장이 너한테 뭐 좀 주겠대? 어?”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김모동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정근호 이 작자는 애를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 지경인 거야. 게다가 청부살인을 시켜놓고 아직까지 돈도 안 줘? 천하에 죽일 놈 아냐. 진짜 내가 이 인간 꼭 잡아 쳐넣고 만다.
“인철아. 내가 수사경력 18년차 팀장으로서 충고하는데, 너 그 알량한 돈 받아먹을 생각에 입 꾹 다물고 있다가 죄 홀라당 다 뒤집어쓰면 네 말마따나 빼박 무기징역이야. 왜인 줄 아냐? 철저한 계획살인이거든. 참작의 여지가 쥐뿔도 없어요. 근데 정근호 시장한테 청부받아서 살인한 거 다 자백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면 충분히 감형될 수 있어. 무기 안 살아도 된다고. 내가 뻥카 치는 것 같냐?”
곽인철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근호 시장이 기자들 앞에서 죄를 모두 자신에게 떠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불안감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살인 청부보다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죄가 크다고 그러던데요.”
“누가 그래. 살인 청부보다 살인이 더 죄가 크다고.”
“……주변에서요.”
“이러니까 새꺄, 운동선수 출신들이 무식하다고 욕먹는 거야. 답답하게 사리 분별 못 한다고.”
“아니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에 욕설이세요? 형사면 답니까?”
쭈그러져 있던 곽인철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알아, 몰라.”
“갑자기…… 뭘요?”
“내가 네 한참 선배인 거.”
“……알기야 알죠. 저희 고등학교 유도부 선배님이시잖아요.”
“정확히 몇 년 선배. 참고로 나 26년 전에 졸업했다.”
“그, 그럼 정확히 16년 선배님이시네요.”
곽인철이 우물쭈물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는 꼴이 가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