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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2화 (112/130)

112화

“문 안 열어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백인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설은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백인서의 맞은편에 앉아서 포장해온 초밥을 탁자 위로 늘어놓았다. 색이 선명한 주황색 연어 초밥과 투명한 염교 등이 조르르 얼굴을 내밀었다.

“젓가락이 왜 하나뿐이야?”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니까.”

“말도 안 돼.”

이설은 얼른 부엌에서 젓가락을 한 벌 더 가져왔다.

“너도 같이 먹어.”

“난 안 먹어도 돼.”

백인서가 손을 내저었다.

“저녁 부실하게 먹었다며.”

“내가 언제.”

“아까 그랬잖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고.”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고.”

“할 수 없지 뭐.”

이설은 손에 들었던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백인서는 영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이거 몇 개나 된다고 나눠 먹냐.”

“열세 개나 되거든? 나 혼자서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 너처럼 배가 큰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내가 직접 먹여줘야 먹을 건가 보네?”

이설은 젓가락으로 연어 초밥을 쥐고 백인서를 향해 내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백인서가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제 입으로 들어온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 먹으면서.”

“그거야 네가 자꾸 우기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는 건 좀 그렇단 말이야.”

이설은 제 입으로도 초밥 하나를 집어넣었다. 백인서의 눈길이 곧바로 따라왔다. 모른 척 입안에 든 초밥을 꼭꼭 씹었다. 찰진 쌀알과 보드라운 연어가 알싸한 고추냉이와 적절한 비율로 섞여 제법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맛있네.”

이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을 땐 모래를 씹는 것처럼 겉돌기만 하던 음식이 그나마 먹을 만했다. 백인서와 함께 있어서 그런 듯했다.

“염교도 하나 먹고.”

백인서가 동그란 염교를 하나 집어 이설의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먹을게.”

“그러지 말고 아, 해.”

이설은 잠깐 망설였다가 입을 벌렸다. 조그맣게 벌린 입속으로 기다렸다는 듯 투명한 염교가 쏙 들어왔다. 아삭아삭, 조용한 오피스텔 안으로 염교 씹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괜찮지?”

“……응. 맛있어.”

이설은 심장 한쪽이 무지근해졌다. 백인서의 질문이 마치 너 괜찮냐고 묻는 것처럼 들려서.

아니, 사실은 전혀 안 괜찮아. 아빠만 떠올리면 체한 듯 속이 답답해져.

이설은 속으로 웅얼거리고는 남은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네가 먹을 계란 초밥과 새우 초밥도 같이 사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건 미처 생각 못 했어.”

백인서가 쑥스럽게 웃었다.

“다음번엔 네 것도 챙겨. 맨날 내 것만 챙기지 말고. 알았지?”

“그럴게.”

“항상 대답만 잘하더라.”

새침하게 핀잔을 주자 백인서가 또 멋쩍게 웃는다. 둥글게 휘어진 눈을 이설에게 고정하고서. 쓰디쓰기만 했던 하루가 몰라보게 달달해지는 순간이다.

이설은 생각했다. 백인서와 일상으로 돌아오길 참 잘했다고. 그렇지 않았으면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버텨냈을지 모르겠다.

“차 좀 줄까?”

빈 초밥 용기를 정리하며 물었다.

“녹차하고 캐모마일 두 가지 있는데. 아, 핫초코 스틱도 있어.”

“음…… 핫초코는 너무 달아서 그렇고, 캐모마일로 줘.”

“알았어.”

이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포트 쪽으로 걸어갔다. 백인서가 천천히 따라온다.

“왜?”

“네 옆에 있어 주려고.”

“그럼 나야 너무 좋지.”

이설은 티포트에 전원을 넣고 선반 위에서 머그잔 두 개를 꺼냈다. 그런 다음 샛노란 알맹이가 사이좋게 들어찬 캐모마일 티백을 하나씩 머그잔에 집어넣었다. 백인서는 묵묵히 이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정한 눈빛에 다정한 표정을 하고서.

물은 금세 끓어올랐다. 바글바글 끓는 물소리가 백인서의 눈빛과 표정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티포트를 기울여 물을 조르르 따라 부었다. 캐모마일 특유의 노란색 빛이 금방 머그잔 전체로 퍼졌다. 은은한 향과 함께.

“가지고 가는 건 내가 할게. 뜨겁잖아.”

백인서가 얼른 머그잔 두 개를 손에 쥐었다. 이설은 탁자 쪽으로 걸어가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루의 고단함이 여기저기 내려앉은 넓은 어깨와 긴 다리가 오늘따라 눈에 와서 콕 박혔다.

“……피곤하지? 매일 야근에, 외근에.”

자리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수사라는 말은 쏙 빼고.

“나만 그런가.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다 그렇지. 너도 마찬가지고.”

“난 그래도 아이들과 생활하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일반 직장인들보다야 훨씬 덜해. 간혹 환아 보호자들 때문에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옷은 왜 여태 안 갈아입었어?”

이설은 백인서의 물음에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흰 블라우스와 넉넉한 핏의 살구색 슬랙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

그제야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오피스텔에 들어오자마자 생각에 잠겨버리느라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었다.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던 백인서가 눈 밑으로 그늘이 어둑어둑하게 드리워진 이설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어?”

“너만 허락하면 그러고 싶은데.”

저를 따뜻하게 응시하는 눈길에서 이설은 알 수 있었다. 백인서의 진짜 속마음을. 그리고 아빠의 현재 상태를.

구태여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물을 용기도 없었지만.

“응, 함께 있어 줘.”

취침등만 켜진 오피스텔 내부는 조용했다. 이설은 백인서와 나란히 누워 네모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으나 그녀도, 백인서도 잠이 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그 아이는 많이 좋아졌어?”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백인서였다.

“누구, 소영이?”

“상태가 많이 심각하다며.”

“다행히 고비는 넘겼어. 가족들도 한시름 놓았고.”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이설의 얼굴로 백인서의 시선이 닿았다.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거에 대해선 후회 안 해?”

“지금은.”

이설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전엔 그랬다는 뜻이네?”

“사실, 의대 6년을 다니는 내내 회의적이었어. 인턴 기간 동안에도 그랬고.”

“왜?”

“뭔가 떠밀리듯 들어왔다는 기분이 계속 들더라고. 이 길이 내가 정말 원하는 길 맞나 싶기도 했고. 계속 확신이 안 섰어. 근데 소아청소년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한 번도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어. 가끔은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았는데?”

“음…… 내가 돌보던 아이가 완치돼서 병원 문을 나설 때? 그때가 가장 좋아. 아이들은 손을 쫙 펴면 꼭 단풍잎 같거든?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상태가 심각해서 입원했는데 얼마 후에 건강해진 얼굴로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어 줄 때면 의사가 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 종일 기분도 좋아지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리는 이설의 표정을 보며 인서의 표정도 따라서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건 아냐. 솔직히 드물어. 가끔은 아이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일도 생기고.”

처음 환아의 죽음을 경험했을 땐 참 힘들었다. 미리 예견된 결과였는데도 그랬다. 후유증이 제법 오래갔다. 진료를 할 때나, 밥을 먹을 때, 혹은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저를 향해 환히 웃던 아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극복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이별도 자꾸 경험하다 보면 무디어지는 거라고. 경우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어떤 이별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극복이 안 되는 것도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힘들 땐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참 많은 위로가 되기도 해. 연차가 올라가면서 나름 여유가 생긴 것도 한 이유겠지만.”

“긍정적인 기억은 자기도 모르게 힘든 현실을 미화시켜 주는 경향이 있거든. 포기하지 않게 도와준다고나 할까?”

“너도 그랬어?”

“당연하지. 안 그럼 형사 생활 절대 못 해.”

씩 웃고는 백인서가 취침등을 껐다. 이설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차단하기라도 하듯 백인서가 팔을 뻗어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넓고 단단한 품에 폭 안기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릿속을 옥죄고 있던 생각들이 금세 흩어졌다.

이설은 하루의 고단함을 모두 묻어버리고 백인서를 마주 안았다. 고른 숨소리가 좁은 오피스텔 안으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 * *

2차 조사가 시작되기 직전 정근호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빼곡하게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그는 자못 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이런 음해성 보도가 난무하는 이유는, 다음 선거에서도 당선이 유력한 야당 정치인을 여당에서 공격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자신은 시장에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불철주야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건 기자회견에 참석해준 도암시 시민들과 기자 여러분들이 바로 산증인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정근호는 이렇게 시민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하물며 금전 관계는 허투루 여기겠냐며 도리어 기자들에게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개인적으로 피해자 오부규가 사망한 점은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신은 오부규의 사망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채무 또한 빠른 시일 내에 변제할 계획이었음을 누차 강조했다.

1차 조사 때는 불리한 혐의에 대해서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더니 이제는 아예 말을 바꾸기로 작전을 새로 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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