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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0화 (110/130)

110화

아빤 엉망진창이 된 멘탈을 부여잡고 작전을 바꿨다. 엄마에게 정중히 읍소하는 쪽으로. 첫사랑을 들먹이고, 두 사람이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렀으며, 이 외모와 능력을 가졌음에도 다른 여자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냐는 등, 아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엄마에게 사정이란 걸 해보았단다.

첫 번째는, 결혼 전 할아버지 댁에서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당한 엄마가 죽어도 결혼을 못 하겠다고 발을 빼는 바람에 손이 발이 되도록 설득하는 거였으니까.

첫 번째는 성공했으나 두 번째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엄만 냉정함을 넘어서 냉혹하기까지 했다. 아빠의 간곡한 읍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거였다. 모르긴 몰라도 더 나이가 들어선 할아버지와 똑같아졌으면 똑같아졌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빤 완전히 얼이 빠졌다. 이럴 수가 있냐며 또다시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 화를 냈다. 엄만 더욱 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 아빠에게. 이혼 결심이 공고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엄만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다음 아빠가 출근하자마자 그대로 짐을 싸서 집을 나와 버렸다. 습관적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배우자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라는 말을 남기고.

12장. 흐르는 강물처럼 (1)

“팀장님, 곽인철 행적 나왔습니다.”

박성진 형사가 급히 김모동 팀장을 찾았다.

“어디래.”

“충남 홍성 인근이랍니다. 팀장님이 예상하신 것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고등학교 유도부 동기 집에 숨어 있더라고요.”

수사팀은 곽인철이 은신할 만한 곳을 전부 뒤졌다. 본가와 처가, 친구 집, 함께 일하는 조직원들의 은신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중고등학교 때 잠깐 어울리던 친구들 집까지 전부 잠복을 해가며 수사망을 좁혀 들어갔다. 곽인철은 무려 10일간이나 잠복을 하고 있던 수사팀원들에게 덜미를 잡혀 경찰서에 끌려왔다.

“저거 계속 오리발 까는데요?”

조사실 밖으로 나오며 박성진 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치인들한테 배웠나 봐요. 모르쇠로 일관하는 거요. 툭하면 기억이 안 난답니다. 죄다 잡아떼고 있어요.”

“사실이잖아요.”

황호범이 피식거렸다.

“정근호 시장하고 어울렸으니 정치인들 수법을 오죽 잘 알겠냐고요. 일단 버티고 보는 거지. 안 봐도 뻔하잖아요.”

“그런가?”

“저러다가 팽 한번 제대로 당해봐야 정치인 무서운 줄 알지. 하여간 등신 같은 게 뭣도 모르고 오리발은 왜 까냐고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증거가 빼박인데 오리발 내민다고 있는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박성진 형사가 혀를 끌끌 찼다.

“일단 정근호 시장부터 불러들여.”

김모동 팀장의 말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곽인철마저 잡힌 마당에 미적거릴 이유라도 있어?”

“언제는 확실한 물적 증거도 없는데 현직 시장을 어떻게 경찰서로 불러들이냐면서요.”

황호범이 물었다.

“그건 인마, 곽인철을 못 잡았을 때 얘기고. 지금은 살해용의자까지 떡하니 경찰서로 잡아들인 마당에 무서울 거 뭐 있냐. 조사 들어가면 되는 거지.”

“서장 성격에 가만히 있을까요?”

차준섭 형사가 또 물었다.

“그럼, 서장 무섭다고 곽인철이랑 정근호 시장이 대포폰으로 통화한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 모른 척 내버려 둬? 수사팀 전원 다 직무유기로 옷 벗을 일 있냐?”

“누가 그렇답니까. 후폭풍이 걱정돼서 그렇지.”

“그런 거 무서웠으면 아예 처음부터 강력계 형사로 투신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러냐?”

김모동 팀장은 전의에 불탔다. 그는 곽인철이 잡혀들어오자마자 정근호 시장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서장이 정신 나갔냐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들은 척을 하기는커녕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정근호 시장은 태연했다. 그는 자신에게 한 점 의혹이라도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며 취재진들 앞에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비서진을 대동하고 경찰서를 방문한 그는 헐레벌떡 뛰어나온 서장과 친히 악수를 나눈 다음 조사실로 들어왔다.

그는 김모동 팀장을 코앞에 두고도 표정 하나 변하는 법이 없었다. 앉으라는 권유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 하기도 했다. 그런 정근호 시장에게 김모동 팀장이 증거물 중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정근호가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다.

“피해자 오부규가 직접 수기로 작성한 장부입니다.”

“그런데요?”

“저희 수사진들에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좀 있어서요.”

김모동 팀장이 표시해 놓은 장부의 페이지를 열어 직접 정근호 시장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이 부분에 시장님이 언급되어 있더라고요. 두 차례나.”

“이거야 원. 밥 한 끼 얻어먹었다는 이유로 경찰서까지 불려 다니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더구나 장부에 제 이름만 있는 언급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구설수 무서워 남이 사주는 밥도 함부로 얻어먹어서는 안 되겠네요.”

교묘하게 주제에서 벗어나려는 정근호 시장을 바라보며 김모동 팀장은 쓰게 웃었다.

“글쎄요. 일 인분에 삼십만 원씩이나 하는 고급 일식 코스요리를 대접받으신 분은 시장님이 유일해서요. 충분히 의혹을 가질 만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건지. 혹시 내가 피해자로부터 모종의 청탁이라도 받았을 거다, 뭐 그런 뜻으로 하는 얘깁니까?”

“피해자 오부규는 일대에서 알아주는 구두쇠입니다. 아무 대가 없는 호의치곤 굉장히 과하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기대를 저버려서 유감이지만, 추호의 의심도 없이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였습니다. 대가 없이 제 정치 노선을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으시거든요.”

정근호 시장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되받아쳤다. 이런 질문이 나올 걸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 좀 해주시죠.”

김모동 팀장이 탁자 위로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이것 역시 피해자 오부규가 직접 작성한 차용증입니다. 상단엔 시장님 성함과 주민등록번호가 포함되어 있고, 하단엔 원금과 변제 기일, 이자 및 이자의 지급 시기 등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김모동 팀장은 말을 하면서 슬쩍 정근호 시장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역시나 태연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모동 팀장은 말을 이었다.

“총 두 번에 걸쳐 피해자 오부규로부터 각각 8억 원과 10억 원을 빌리셨던데, 용도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합법적인 절차로 빌린 돈이었는데 설마 문제가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변제 기일이 꽤 지난 것으로 아는데 아직까지 원금은커녕 이자마저 입금된 정황이 없어서요. 설마 저희가 모르는 별도의 통장으로 거래를 하신 건 아닐 테고. 물론 원리원칙을 고수하신다는 시장님께서 굳이 번거롭게 그러셨을 리야 없겠지만요.”

말끝으로 김모동 팀장은 빙그레 웃었다. 어서 대답해 보라는 몸동작과 함께.

“피치 못 할 개인적인 사정까지 전부 말해야 되는 겁니까?”

“피해자 오부규는 금전거래에 있어서만큼은 10원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거로 유명한데, 시장님과의 거래에 있어선 무려 18억이라는 거금이 오고 갔는데도 변제 기한이 한참 넘도록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고요. 제 좁은 사견으로는 그 점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요.”

김모동 팀장은 잠시 말을 끊고 정근호 시장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이목구비가 작정하고 무표정이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태어나길 오만하게 태어난 사람 같기도 했다.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에 표정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잘 숨기는 걸 보니. 그래,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김모동 팀장은 다음 말을 던졌다.

“채권자인 오부규 쪽에서 처음부터 받을 의사가 없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채무자인 정근호 시장님 쪽에서 갚을 의사가 없었거나, 둘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할까요?”

“그런 근거 없는 중상모략과 오해를 받을까 봐 서로 차용증을 주고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김모동 팀장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피식 웃었다. 정근호 시장이 근거 없는 중상모략과 억울한 오해를 살까 봐 오부규와 공식적으로 주고받았다는 차용증이라는 것이 사실은 아무 쓰잘머리 없는 면피용 차용증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고 정근호 시장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권력자들과 돈이 넘쳐나는 재력가들 사이에 은밀한 돈거래가 있을 경우,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뇌물수수 혐의를 피해가기 위해 차용증을 이용하는 건 너무나도 흔한 수법이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처음부터 받을 생각도, 갚을 생각도 없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전형적인 돈거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사경력이 쌓인 형사라면 정치인들이 증거라며 내미는 차용증 따윈 절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딴 허접한 입막음용 차용증을 감히 이 김모동 앞에서 써먹는다고?

“제가 진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말입니다. 이 차용증은 피해자 오부규와 정근호 시장님 사이에서 주고받은 게 분명한데 어째서 발견 장소가 시장님과 일면식도 없다는 곽인철의 집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김모동 팀장은 정근호 시장을 건너다보며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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