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버님은 어때? 잘 지내고 계셔?”
“……어?”
이설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백인서와 사귀면서 그가 아빠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빤 왜?”
“아니,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잘 계신가 하고.”
“그러게. 잘 지내시겠지 뭐.”
이설은 무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빠를 본 건 열흘 전 추석이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 댁으로 출발하기 전날 엄만 이설에게 전화해서는 이번이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추석이 될 거라고 말했다.
당직을 서면서도 마음이 영 불안했다. 혹시라도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봐. 송편을 빚다가 그러면 어떡하나, 전을 부치다가 그러면 어떡하지? 욱하는 아빠 성격에 감당 못 할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되면 어쩌나 사뭇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직을 끝내고 부랴부랴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건 여느 추석과 다름없이 속 뒤집어지는 풍경일 뿐이었다.
아빠와 작은아빤 거실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고, 엄만 할머니의 냉기 어린 잔소리를 들으며 혼자 부엌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작은엄마는 지겹지도 않은지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로 엄마의 속을 긁어대는 중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빠의 속을 쓰리게 한 건 다름 아닌 사촌 정유주의 결혼 소식이었다. 작은엄만 여봐란듯이 미래의 사윗감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과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설이 들어도 엄청나긴 했다. 헌법재판소장 출신의 할아버지에 중앙지검장 아버지를 둔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빠의 미간이 절로 우그러질 만했다. 그러면서 작은엄만 이설에게도 사위 주변의 변호사들 중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주겠다는 인심을 베풀기도 했다.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남자친구 하나 없지 않냐면서.
이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아빤 엄마의 이혼 선언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한 사람답게 우그러진 미간을 얼른 펴고는 정유주와 작은엄마에게 축하한다며 덕담을 건넸다. 엄마 역시 정식으로 이혼 소장을 보낸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평소처럼 행동했다.
이설은 마치 꼭두각시 인형극을 관람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지긋지긋했다. 언제 이 끔찍한 인형극이 막을 내리나 싶어서.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보다, 그치?”
이설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백인서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이설은 너무 냉소적으로 굴었나 싶어 얼른 덧붙였다.
“그런 거 아냐. 나 원래 우리 아빠랑 안 친하잖아. 서로 살갑게 안부 물어보고 하면 좋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
“대부분 그렇지 뭐.”
“넌 안 그랬잖아.”
“……어?”
백인서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저씨랑 굉장히 사이 좋았던 거 다 알아.”
“뭐, 딱히.”
“나 되게 부러웠다?”
“뭐가?”
“아저씨가 백인서 너 바라보는 눈빛이나 말투, 표정, 그런 것들이.”
“부러울 것도 많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유치했는데.”
“그래서 더 부러웠다고. 다 큰 아들이랑 허물없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우리집엔 없는 분위기거든.”
할아버지고 아빠고 할머니고, 다들 누구 하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분위기였지. 이설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빠는 백인서 얘기만 나오면 어떻게든 폄훼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고인이 된 그의 아버지를 사십이 넘도록 경위 계급 하나 못 다는 무능력자라며 깎아내린 것으로도 모자라, 백인서는 편부 슬하에 머리 텅 빈 운동선수 나부랭이라고 조롱하더니, 이제는 그 편부마저 없는 고아에 직업이라고 조폭과 분간도 안 되는 강력계 형사나 하고 있다면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막말을 퍼부었다.
이설은 그 끔찍한 말들을 들을 때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된 남자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라고 부를 수 있나 싶어서. 고아는 말 그대로 부모를 여의고 홀로된 ‘아이’라는 뜻 아닌가. 시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기본적인 어휘력도 갖추지 못한 건지. 아님, 그저 남을 깎아내리는 데 급급해서 기본 상식마저 잊어버린 걸 수도.
“넌 요즘 어때? 수사 진행은 잘 되고 있는 거야?”
화제를 바꿨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불편한 아빠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여전히 난항이지 뭐. 쉽게 해결되기는 힘들 것 같아.”
“뉴스에서 보니까 용의자가 아직도 안 잡혔다며?”
“찾고는 있는데 영 오리무중이야. 어찌나 수사망을 요리조리 잘 피하는지 가끔씩은 우리도 놀라.”
“그렇구나.”
이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인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얼굴에 살이 부쩍 내린 것도 같았다. 턱선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눈 밑으로는 그늘이 짙어진 걸 보면. 왜 안 그렇겠는가. 뉴스에선 연일 앞다퉈 경찰을 무능하다며 질타하고 있는데. 보나마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걸 보니.
“……있잖아.”
이설은 내내 망설이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부모님, 이혼하실 것 같아.”
“……그래?”
백인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표정이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나 싶다.
“아파트 말이야. 그래서 산 거더라고.”
백인서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전제품이랑 가구 다 들어오면 집에서 나오실지도 몰라. 물론 그전에 정식으로 이혼 소장부터 접수해야겠지만.”
“아무래도 한집에 살면서 그런 일을 치르긴 어려우시겠지.”
소송 이야기에 백인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협의이혼은 고려 안 해보셨대?”
“왜 안 했겠어. 아빠가 아예 상대조차 안 해주고 있으니까 문제지. 죽으면 죽었지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분명 다음 선거 때 피해를 볼까 봐 안 된다고 하는 걸 거야. 안 봐도 뻔하지. 놀랍지도 않아. 정치인들한텐 복잡한 가정사처럼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도 없을 테니까.”
이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빠의 속내가 훤히 다 보여서.
“어머닌 어때? 괜찮으셔?”
“우리 엄마?”
“많이 힘드실 거 아냐.”
“나름 잘 버티고 계셔.”
“그래?”
“몰랐는데 나보다 훨씬 더 강하시더라고.”
* * *
엄마가 새로 계약한 아파트는 이설의 오피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걸어서 10분 정도? 차로는 고작 2, 3분 거리였다. 이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손만 뻗으면 갈 수 있는 근거리에 살게 되어서.
전문업체의 도움을 받아 대청소를 끝낸 아파트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엄만 그게 꼭 자신과 오빠의 미래 같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이설은 엄마의 바람을 들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그렇게 되도록 해달라고. 함박눈이 펑펑 오게 해달라는 기도도 들어주었으니 이것도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휴일을 이용해 엄마와 가전제품을 보러 갔다. 한군데에서 일괄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보러 간 가구매장에서도 패턴은 비슷했다. 다만 가전제품과는 달리 가구는 두 군데의 업체를 방문했다는 점만 다를 뿐.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기본적으로 쇼핑 체질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면 돈이 절약된다거나 더 좋은 제품을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설은 겨우 물건을 사는 일로 피곤해지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쇼핑은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도 모자라서 한 달씩 고민한다는 일을 이설과 그녀의 엄만 고작 반나절 만에 해치운 셈이다.
그렇게 쇼핑을 끝내고 돌아간 후 엄만 본격적으로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정법원에 이혼 소장을 접수하는 일이었다.
아빤 평소처럼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가 엄마가 청구한 이혼 소장을 받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이나 살을 부대끼며 살아왔어도 그 흔한 말대꾸 한번 없었던 아내였기에 아빤 엄마를 뼛속까지 겁쟁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떡하니 이혼 소장이 날아왔다. 해머로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아도 이렇게 놀랍진 않을 것이다.
아빤 제대로 충격을 받았다. 고분고분하게만 굴던 아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거란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사실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추정이긴 했다. 엄만 지난 추석 때에도 이혼이니 뭐니 속 시끄럽게 굴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군말 없이 척척 일을 해냈으므로.
어디 한번 읽어나 보자며 이혼 소장을 읽어내려가던 아빤 처음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고, 그다음엔 어마어마한 분노에 휩싸였다. 딱딱하게 쓰인 이혼 소장에서 그는 말 그대로 후안무치한 쓰레기의 화신이었다. 더 이상 부정적으로 쓸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언어 및 신체적 폭력을 동반한 가정폭력에, 배우자의 직계 존속에 의한 심히 부당한 대우,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분노조절 장애 등등, 혼인 파탄의 책임을 전부 그에게만 돌리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선 작정하고 뒤엎었다지?
예전 같았으면 쥐죽은 듯 가만있었을 엄만 아빠가 집기를 부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득달같이 순찰차가 오고 일대가 어수선해진 다음에야 아빤 제정신이 들었다.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답게 이렇게 저렇게 사건을 무마시키기는 했으나 이미 본인의 유책 사유에 하나를 더 보탰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아빤 엄마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혼 소장을 받은 후 30일 이내에 가정법원으로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이혼 판결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