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 *
“국과수에서 유전자 분석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가죽점퍼 혈흔에서 나온 DNA와 피해자 오부규의 DNA가 정확히 일치한답니다.”
박성진 형사가 김모동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렇단 말이지.”
김모동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는 서두르면 그르치기 딱 좋다며 늘 천천히 가자고 입버릇처럼 대뇌였으면서도 막상 DNA가 일치한다는 보고를 받자 한시름 덜어낸 얼굴이었다. 골이 깊게 파여 있던 미간이 처음으로 펴지는 것을 보니.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새끼 이거 100퍼센트 범인이네. 안 그래요, 팀장님? DNA도 빼박 일치하는 데다, CCTV 상으로도 살해현장에서 실거주지까지 도주로가 죽 이어진 놈 아닙니까.”
황호범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투덕투덕한 얼굴 전체가 시뻘게지도록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곽인철은 도주할 땐 그렇게 철두철미했으면서 왜 결정적인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가죽점퍼는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했대?”
박성진 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딴엔 혈흔을 완벽히 지웠다고 생각했겠죠. 사실, 가죽점퍼에서 발견된 혈흔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안쪽에 미량으로 남아 있던 거였습니다. 세탁소 주인의 꼼꼼한 관찰력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묻혀버렸을 겁니다.”
인서가 대답했다.
“내막을 모르는 마누라는 잘한답시고 세탁소에 홀라당 맡겨버리고, 그치?”
황호범이 맞장구를 쳐가며 킬킬거렸다.
“이제 증거도 나왔겠다, 남은 일은 딱 하나, 곽인철 그 새끼만 따면 되겠네요?”
황호범이 김모동 팀장을 쳐다보았다.
“그렇긴 한데, 작정하고 튄 놈을 어디 가서 잡냐.”
“그래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죠. 깡그리 뒤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황호범은 자신만만했다. 이런 일 한두 번 해보냐는 식이다.
“이 자식은 꼭 해보기도 전에 설레발이더라. 너 대한민국이 무슨 코딱지만 한 시골 동네라도 되는 줄 아냐? 하다못해 경기도 안에서도 맘먹고 숨어들면 찾아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좀 알고서나 지껄여.”
박성진 형사가 미간을 구기며 핀잔을 주었다.
“자자, 쓸데없는 얘기들 그만하고, 지금까지 수사한 기록 전부 추려서 체포 영장부터 발부받아. 그런 다음 지명 수배 때리자고. 사건 전후해서 곽인철 통화 내역 전부 뽑아서 분석하는 것도 잊지 말고.”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모동 팀장이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곽인철 이 자식, 학교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고 말이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린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황호범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팀장님?”
“넌 몰라도 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황호범을 향해 김모동 팀장이 혀를 한번 쯧 차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팀장님 갑자기 왜 저러세요? 곽인철하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도 돼요?”
황호범이 박성진 형사에게 물었다.
“곽인철 경완고 유도부 출신이잖아.”
“근데요?”
“팀장님도 경완고 유도부 출신인 거 잊었어? 곽인철이 팀장님 후배라고. 뭐, 까마득한 후배이긴 하지만.”
“그래서요?”
황호범이 퉁방울눈을 요란스럽게 꿈적거렸다.
“그래서라니. 둘이 같은 고등학교 동문인 데다, 심지어 유도부 선후배 사이라고. 감이 안 오냐?”
“에이,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게 어딨어요. 학연, 지연 다 끊어진 지가 언젠데. 어디 가서 함부로 고등학교 선배니 후배니 들먹였다간 욕 얻어먹기 딱 좋다니까요?”
황호범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건 아니다, 인마.”
“어째서요?”
“팀장님한텐 유도 명문 경완고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어마어마하거든. 해마다 얼마 안 되는 경찰 월급으로 후원을 해주네, 밥을 사주네 하시는 거 보면 모르냐?”
“진짜요?”
황호범이 몰랐던 사실을 안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무려 15년째 그러고 계신다. 지금보다 직급이 훨씬 낮을 때부터 개인 주머니 털어 유도부를 후원했다는 얘기지.”
“선배님은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는데요? 보기보다 마당발이시네?”
“내 친구가 경완고에서 체육선생 하고 있거든. 사석에서 주워들은 게 좀 있지.”
“오오, 우리 팀장님 나름 멋진 일도 하시는구나. 맨날 우리만 들들 볶아대는 줄 알았는데, 없는 형편에 후원이라는 것도 하실 줄 알고. 사모님한테 바가지 좀 긁히겠어요? 아무 데나 돈 퍼준다고.”
“하여간에 이 새끼는 꼭 말을 해도. 형편 어려운 고등학교 후배들 후원하는 게 아무 데나 돈 퍼주는 거냐? 어?”
박성진 형사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앗, 죄송. 방금 그건 실언이었습니다. 잊어주십시오.”
황호범이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선배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것도 모르고 후배라는 놈이 유도로 성공해도 모자랄 판에, 관할 지역에서 살인이나 저지르고 돌아다니니 선배 입장에서 그 맘이 오죽하겠냐고.”
“그렇긴 하네요.”
“이제 이해가 되냐, 팀장님 마음이?”
“예, 뭐, 조금요.”
황호범이 다 쭈그러진 자세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용의자가 특정되자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팀장님, 곽인철 통화 내역을 조사해보니까 사건 전후해서 주기적으로 통화한 번호가 서너 개 정도 나오는데요?”
인서가 김모동 팀장을 건너다보았다.
“그래? 번호 주인은 확인해 봤어?”
“예. 하나 빼고 전부 신원조회 마쳤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왜.”
“냄새가 좀 나서요.”
서류를 보고 있던 김모동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장기훈이라는 39세 남자인데, 조사해보니 경기도 김포시에 살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곽인철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고요.”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건 전후해서 곽인철을 따로 만났다는 정황도 포착되지 않았고요.”
“근데 둘이 왜 주기적으로 통화했다고 나와.”
김모동 팀장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곽인철과 장기훈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대포폰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건 당일 전후해서 휴대폰 기지국은 추적해봤어?”
“예. 장기훈이 평소 사용하는 휴대폰 위치와 문제가 되는 대포폰 위치가 아예 다릅니다. 이번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김모동 팀장이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이번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 대포폰의 실제 주인을 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곽인철한테는 살해 동기라고 부를 만한 원한 관계나 금전 채무 관계가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피해자 오부규와는 개인적으로든 금전적으로든 접점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단돈 만 원이라도 빌린 정황이 있으면 그렇겠거니 하겠는데 장부상으로는 아주 깔끔하거든요. 상식적으로 모종의 인과관계가 있어야 칼을 휘두르는 게 이해가 될 텐데 곽인철은 그런 게 전무합니다.”
“쉽게 말해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지?”
“예. 근데 한눈에도 오버킬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피해자를 난도질해놨다? 굳이 왜? 돈을 노린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
“딱 봐도 대포폰 쓰는 놈이 공범 아니겠습니까?”
황호범이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툭 끼어들었다.
“네가 생각해봐도 그렇지?”
“생각하고 말고가 뭐 있어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랑 자주 통화할 일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고.”
황호범이 피식 웃었다.
“아니면, 청부살인 쪽에 무게를 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피해자 오부규가 만지는 돈이 아무래도 천문학적이니까요.”
인서의 말에 김모동 팀장이 동조를 보였다.
“그럴 수도 있고.”
“일단 대포폰 주인부터 찾죠?”
박성진 형사가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먼저, 사건 발생 당시 그 기지국 내에 있던 사람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추려와. 어느 경우에든, 대포폰을 손에 쥐고 있는 놈의 신호가 기지국에 잡히면, 그놈이 가지고 있는 개인 폰의 신호도 같은 기지국 내에 뜨기 마련이니까. 조금이라도 문제의 대포폰이랑 기지국 위치가 겹치는 폰을 가지고 있거나, 수상한 낌새가 있는 놈이 발견되면 즉각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와, 또 겁나 뺑이치겠구만.”
황호범이 김모동 팀장을 흘끗 쳐다보고는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다.
“몇 명 정도 나왔어?”
피곤에 절은 얼굴로 김모동 팀장이 물었다.
“대략 일곱 명 정도로 추려졌습니다.”
역시 피곤에 절은 얼굴로 박성진 형사가 대답했다.
“더 좁혀.”
조사는 밤늦도록 진행됐다. 특정 번호가 나온 건 자정이 다 돼서였다.
“찾았습니다.”
인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김모동 팀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기지국 위치가 동일하게 나옵니다. 이 정도면 확실하다고 봐야죠.”
“번호 주인은 알아봤어?”
“확인하겠습니다.”
상체를 굽히고 휴대폰 명의를 확인하던 인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뭐야, 누군데 그래?”
김모동 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인서를 쳐다보았다.
“그게…….”
인서는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