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야, 백 형사. 저러고 있는 꼴도 보기 싫어 죽겠으니까 빨리 출발하자.”
“잠시만요.”
“왜.”
“확인 좀 할 게 있어서요.”
인서는 안절부절못하는 유연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세탁소 주인이 알려준 전화번호 열한 자리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숫자를 전부 입력한 후 통화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유연숙이 당황하며 제 주머니를 뒤졌다.
“보셨죠? 저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유연숙이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전화를 끊으며 인서가 피식 웃었다. 서늘한 눈동자를 파리하게 굳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연숙에게 고정시키고서.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용의자 행적 끊어진 곳에 다시 한번 가죠?”
“거긴 또 왜? 자꾸 가다 보니까 이젠 맛 들였냐?”
황호범이 퉁방울눈을 꿈적거렸다.
“자세히 좀 살펴봐야겠어요. 혹시라도 놓친 게 있는지.”
“야, 거기서 더 어떻게 자세히 보냐. 땅바닥에 떨어진 쓰레기까지 일일이 확인해봐야 성에 차겠어?”
“필요하다면 그래야죠.”
“아, 이 자식 또 집요해지기 시작하네.”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생겨 먹은걸. 선배님이 봐주셔야죠.”
인서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피식 웃었다.
“아니 다행이다.”
조수석에 턱 올라앉은 황호범이 이때다 싶었는지 툴툴대기 시작했다.
“이건 뭐 한 가지라도 허투루 넘어가는 게 있어야지. 맨날 팀원들 볶아댄다고 팀장님만 욕할 게 아냐. 백 형사 넌 팀장님보다 더한 놈이야. 그건 아냐?”
인서는 황호범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구시렁거림을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용의자가 사라진 지점으로 차를 몰았다.
“여기쯤이었죠? 용의자 행적이 끊어진 곳이.”
“묻긴 뭘 묻냐. 하도 와서 눈 감고도 찾을 지경인데.”
황호범이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미 수차례나 뒤졌는데 다시 뒤져본다 한들 뭐가 더 나오겠냐는 표정이다.
“숨어 있는 CCTV가 있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해 보죠.”
“어련하시겠냐.”
“만에 하나, 못 보고 지나친 CCTV가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인서는 어슬렁대는 황호범을 뒤로하고 골목길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는 건가?
미로처럼 뒤엉킨 골목길을 이 잡듯 샅샅이 훑어도 딱히 나오는 게 없었다. 맥이 딱 풀리며 낙심이 되려는 순간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님, 잠깐만요.”
“왜 또.”
황호범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냥 굼뜨게 다가왔다.
“여기 좀 보십시요.”
“뭐, 특이한 거라도 발견됐어?”
“일단 보기부터 하세요.”
“뭐길래 그래?”
인서가 가리키는 곳을 마지못해 올려다보던 황호범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저거. 왜 일반 가정집에 저딴 게 달려 있어?”
“그러니까요.”
인서의 입술 끝이 확연히 올라갔다.
* * *
“그 새끼 맞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황호범이 재차 물었다.
“가죽점퍼랑 인상착의가 똑같잖아요. 동일인물입니다.”
인서는 화면상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남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상가가 아니라 일반주택, 그것도 외진 곳에 설치된 소형 가정용 제품이라 정말 우여곡절 끝에 발견한 CCTV였다. 게다가 설치된 지 얼마 안 된 신형이라 화질마저 선명했다.
CCTV를 왜 달아두었냐는 질문에, 집주인은 매일 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딸이 걱정되어 달아두었다고 했다.
“여기가 곽인철 집하고 거리가 얼마나 되지?”
“대략 50미터 정도 될 겁니다.”
“그럼 국과수에 의뢰한 가죽점퍼에서 피해자 DNA만 도출해내면 게임 끝이네?”
“거의 그런 셈이죠.”
인서의 대답에 황호범이 앓던 이가 쑥 빠진 표정을 했다.
“개새끼, 사람을 그렇게 뺑이치게 만들더니 꼴좋다.”
“아직 속단은 마십시오.”
“왜.”
“김칫국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 자식은 꼭 잘 나가다가 사람 김새게 만들더라.”
황호범이 사무실을 나서는 인서의 등에 대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10월로 접어들어서인지 밤공기가 선선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서늘한 바람이 볼이며 이마 위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인서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더없이 총총했다. 개수를 세듯 온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뭐 하냐?”
뒤따라 나온 황호범이 어깨를 툭 쳤다.
“별구경이요.”
황호범이 툭 튀어나온 눈을 표나게 끔벅였다.
“뭘 구경한다고?”
“못 들으셨습니까?”
“듣기야 너무 잘 들었지.”
“근데요?”
“너랑은 도무지 안 어울리는 짓이라 그렇지.”
“저는 별구경 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인서는 피식 웃으며 황호범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안 된 댔냐? 안 어울린다고 했지.”
“그게 그거죠.”
인서의 눈매가 미소를 머금고 더욱 깊어졌다.
“야, 백 형사. 너 그렇게 웃지 마라.”
“왜요?”
“안 그래도 어마무시하게 잘생긴 놈이 그렇게 웃으니까 더 잘생겨 보이잖아.”
“그런가요?”
“어, 그러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그렇게 웃지 마라. 특히 여자들 앞에선 절대. 선배로서 충고야.”
황호범이 마디 굵은 주먹으로 인서의 허리께를 두어 번 툭툭 치고는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인서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어 넣은 채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정이설과의 관계 호전은 이토록 달콤한 것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마냥 기분 좋게만 보이니.
밤이라 교통체증이 없어 차는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정이설은 병동 입구에 얌전히 서 있었다. 단정한 느낌의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받쳐 입고서.
“많이 기다렸어?”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출발한다는 문자 받고 나왔어.”
정이설이 조수석에 오르자 익숙한 향이 좁은 차 내부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오늘도 나오기 전에 샤워했어?”
“그냥 나왔는데, 왜?”
안전벨트를 매고 있다가 정이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병원에서 뛰었는데 냄새가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픽 웃는 얼굴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너한테서 나는 냄새는 뭐든 다 좋은가 보지.”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맞물렸다가 느긋하게 떼었다. 심장이 두서없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정이설을 만났을 뿐인데.
“먹을 것 좀 사 가지고 들어갈까?”
병원을 나와 정이설의 오피스텔 쪽으로 차를 몰며 물었다.
“그럴까?”
“단 거 좋아하니까 디저트 종류 어때?”
“그것도 나름 괜찮은 듯.”
“자주 가는 데 있어?”
“음…… 얼마 전에 새로 문을 연 곳인데, 맛이 제법 괜찮더라고. 늦게까지 영업도 하고. 거기로 가.”
조곤조곤 말을 잇던 정이설이 생각난 듯 덧붙였다.
“내 기억으론, 백인서 네가 좋아할 법한 디저트도 있었어. 녹차로 만든 거였는데 많이 달지 않고 맛있더라고. 분명 너도 좋아할 만한 맛이었어.”
“그래?”
인서는 저와 헤어지네, 마네 하는 동안에도 정이설이 계속 제 생각을 했다는 것이 자못 기꺼워서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디저트 카페는 병원과 정이설의 오피스텔 중간쯤에 있었다.
“여기 맞지?”
인서는 널찍한 가게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외관을 눈으로 훑었다.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건물 외관이 꽤 인상적이었다.
카페 안엔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인서는 이설의 손을 잡고 디저트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정성 들여 만든 디저트들이 진열대 위에 조르르 놓여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디저트 종류가 많이 빠지지 않아서. 무엇보다 백인서 너한테 딱 맞을 것 같은 녹차 치즈케이크도 아직 남아 있고.”
정이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산책 나온 다람쥐 한 쌍처럼 오순도순 살갑게 속삭이며 디저트를 골랐다. 이설을 위해선 바나나 푸딩과 캐모마일 차를, 인서를 위해선 녹차 치즈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한잔 샀다.
“왜 단 거 안 마시고 허브차를 골랐어?”
계산을 하며 물었다.
“이 바나나 푸딩이 어마어마하게 달거든. 음료까지 달면 치사량 수준이야. 감당 못 한다고.”
대답을 하는 정이설의 옆얼굴 위로 볼우물이 예쁘게 팼다.
“……그래?”
인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운이 되게 좋은 날인가 보다. 몇 차례나 이 잡듯이 살폈어도 발견 못 했던 CCTV를 찾아낸 덕에 살해용의자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번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물이 될지도 모를 가죽점퍼를 찾아낸 것은 물론, 귀하디귀한 정이설의 볼우물까지 마주할 수 있으니.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땐 별이 한층 더 찬연한 모양새였다. 손을 뻗어서 한 움큼 움켜쥐면 그 반짝임이 잔뜩 묻어나올 것처럼 총총했다. 어쩌면 정이설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인서는 가을 밤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별 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미치도록 그리웠다고.
서로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다가 나란히 차에 오른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좋아하는 가게에 들러 맛있는 주전부리도 사고, 이따금씩은 차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는 잔잔한 일상의 순간들.
되찾아오는 데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일상들이었다.
정이설의 오피스텔에 도착해 작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디저트를 먹을 때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마음속에 거대하게 출렁이는 호수가 들어 있는 듯 뭉클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무슨 생각해?”
정이설이 묻는다. 그새 폭 줄어든 바나나 푸딩을 손에 든 채로.
“아무것도.”
인서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너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견딜 수 없이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정이설은 픽 웃을 것이다. 어린애냐는 핀잔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