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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97화 (97/130)

97화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백인서가 덧붙였다.

“내가 정이설 네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이렇게 카페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 하물며 손을 주무르게 놔 둔다고?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그 따위 걸 용인해 줄 리 없잖아. 안 그래?”

“너 지금 말도 안 되게 억지 부리는 건 알고 있니?”

“뭐라도 상관없어. 내가 버젓이 있는데 멋대로 소개팅을 나간 건 너니까.”

말을 끝낸 백인서가 재촉하듯 손을 끌어당겼다. 이설은 소개팅 남자를 한번 쳐다본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버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렇게 무서운 눈빛의 백인서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는 이설이 따라나서지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끌려가듯 카페 밖으로 나왔다. 백인서의 차는 그의 말처럼 시동이 켜진 채였다. 미적거림은 애초부터 염두에 없었던 모양이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던 거다.

차에 오르자마자 백인서가 그녀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뜨끈한 숨결이 이마를 간지럽힌다고 생각하는 순간 철컥하고 안전벨트가 채워졌다.

뒤이어 소리도 요란하게 차가 출발했다. 이설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백인서 역시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휙휙, 녹음이 새파랗게 내려앉은 가로수가, 그 뒤로 들쭉날쭉 솟은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만 두서없이 쿵쿵 뛰어댈 뿐.

거침없는 속도로 도로를 달리던 차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백인서의 아파트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백인서가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그러더니 차에서 내려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으로 다가왔다.

“내려.”

차문이 열리고 백인서가 낮게 읊조렸다. 이렇게 딱딱한 명령조의 말투가 또 있을까. 처음 경험하는 낯선 모습이었다. 늘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내가 안아서 내려줘?”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 백인서가 쳐다본다. 성마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린 거지?

이설은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등 뒤로 ‘탁’ 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그대로 손이 잡혔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서인지, 아니면 간만에 손이 잡혀서인지는 몰라도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이 금방 축축해졌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강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체가 정직하게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최현수라는 이름의 남자와 있을 때처럼 보송보송했으면 체면이라도 세울 수 있으련만 이게 무슨 꼴인지.

이설은 손을 힘주어 비틀었다. 꿈쩍도 안 한다. 예상했던 일이다. 한 번 더 힘을 주어 비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차가운 경고와 함께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백인서의 긴 손가락들이 파고들어 왔다. 축축해진 손에 단단히 깍지를 낀 백인서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네모난 공간 속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버튼이 눌렸다. 빠른 속도로 숫자가 불어났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 내가 멋대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그렇지만 미리 말했잖아. 우리 이미 다 끝난 사이 아냐? 너 이러는 거 월권이라고.

이설은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인서는 지금 폭발 직전인 듯했다.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서, 한곳만을 응시하는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그녀의 손을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는 단단한 손동작 등에서.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칠 리 없는 신호들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눈에 익은 현관문이 보였다. 이설은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은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저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호흡이 물색없이 가빠지고, 손바닥은 더욱더 축축해졌다. 애써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심장 속으로 밀려들었다.

때로는 여행지 호텔에서, 아주 가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다급할 땐 그의 차 안에서 이설은 백인서와 몸을 섞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서로를 안았던 장소는 단연코 백인서의 아파트였다. 당연히 첫 번째 섹스가 이루어진 곳도 여기였고, 이별을 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곳 역시 바로 이 아파트였다.

언젠가 백인서에게 물었다.

「왜 이사 안 가? 다들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추세잖아.」

그랬더니 백인서는 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너를 처음 만난 곳이잖아.」

그때도 백인서는 지금처럼 이설과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아빠가 나를 위해 처음 산 아파트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의미가 특별할 수 있지.」

수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백인서가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또 있어.」

「또?」

「우리가 처음 한 곳이잖아.」

「아아, 맞다, 그랬었지.」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 어떤 형태이든, 처음이란 건 예외 없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법이니까.

「이래저래 정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다른 아파트로는 못 가. 갈 생각도 없지만. 혹시 또 모르지. 너랑 결혼해서 아이들이 생기면 더 넓은 곳으로 가게 될지도. 그전에는 옮길 생각 전혀 없어.」

백인서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미묘하게 다른 높이의 음 여덟 개가 빠르게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 * *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몸이 돌려졌다. 이 좁은 장소 역시 그녀와 백인서가 숱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몸을 섞었던 곳이다.

백인서는 침실로 이어지는 그 짧은 거리를 못 참고 불뚝 솟아오른 성기를 그녀의 속으로 박아넣기 일쑤였다. 그럴 때의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동시에 얼마나 다정했었는지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같은 행동을 할 작정인지 하늘거리는 치마가 성마르게 걷어 올려졌다.

“이러지 마.”

이설은 몸을 뒤로 물렸다.

“왜?”

“너랑 이럴 이유 없으니까.”

“그 남자랑은 이유가 되고?”

“뭐?”

“그렇잖아. 성인 남녀가 소개팅을 하는 이유가 뭔데. 차후에라도 감정이 발전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 아냐?”

“…….”

“부인 안 하네?”

되묻는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랑은 달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

“보기보다 비위가 참 좋은가 봐?”

“무슨 뜻이야?”

“난 다른 여자랑은 절대 그런 짓 못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리거든. 뭐 그전에 좆이 아예 서지도 않을 테지만.”

“너 되게 순진하구나.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뭐든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으니까. 그게 키스든, 섹스든.”

이설은 최대한 냉정하게 대답했다. 돌아오는 건 확연한 비웃음이었지만.

“그럼 나랑 하듯이 속속들이 핥고 빨아들이는 키스도 할 수 있겠네? 그 자식 자지도 입으로 맛있게 빨아줄 수 있고.”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전부 다 네가 나한테 해준 것들이잖아. 그새 잊었어?”

백인서는 작정하고 상스러웠다.

“기억 안 나.”

“하기 싫은 건 아니고?”

“내가 왜?”

“겁나니까.”

“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다리 사이로 백인서가 손을 집어넣었다.

“흣!”

이설은 숨을 들이켰다. 거침없는 손가락이 얇은 속옷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음핵이 이리저리 눌려지고 그 아래 자리한 소음순과 대음순 역시 함부로 짓이겨졌다. 무반응으로 꼿꼿하게 서 있어야 옳은 상황이었는데 바보처럼 아래로 무언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주르륵.

젖어드는 속옷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백인서가 아니었다. 나붓하게 휘는 눈꼬리가 그 증거였다. 이설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방금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백인서의 말에 반박했었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럴 이유 없…….”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가 치고 들어왔다.

“거짓말도 좀 적당히 해. 넌 나 말고는 다른 어떤 놈한테도 너를 허락할 마음이 없어. 하물며 이렇게 아래를 들쑤시게 내버려 둔다고? 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마음대로 생각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정말 뻔뻔한 거…… 흐읏!”

이설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저릿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나한테 만지지 말라는 건 아니지.”

길쭉한 손가락이 거리낌 없이 속옷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찌걱찌걱. 무례한 손가락이 균열 부분을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금세 질척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지금 여기, 잔뜩 젖은 건 알고 있어?”

비웃음과 흥분감이 동시에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설은 몸을 파르르 떨며 눈앞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도리어 손동작이 더 대담해졌다. 균열 부분만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위로 올라와 음핵을 비틀듯 문질렀다. 이설은 신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잘 참네?”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흠뻑 젖은 구멍 주위를 비벼댔다. 질꺽, 질꺽. 민망한 소리가 연이어 좁은 현관을 채웠다.

“어느 부분에서 이렇게 젖어버린 거야, 응? 손가락이 죄다 흥건해졌잖아.”

백인서가 물었으나 이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표정을 내려다보며 백인서가 피식 웃었다. 상체를 깊숙이 숙이고 그가 이설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훅 불어넣었다.

“혹시 나한테 박히는 거 상상했어? 그래서 보지가 다 젖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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