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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96화 (96/130)

96화

「너 왜 이렇게 못되게 굴어? 나 여기서 두 시간 이상 기다렸어. 최소한 이유 정도는 말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왜 내 전화를 안 받는지, 문자에는 왜 답이 없는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백인서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꼭 무언가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에 한해선 이유 불문, 항상 너그럽고 한없이 기다려 줄 것 같던 여유로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한계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그러니 더 망설이면 안 돼. 여지를 주는 꼴이니까.

이설은 카페 출입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하고는 담담히 안으로 들어섰다.

「남색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 입고 있을 거라니까 딱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인물이 제법 훤하거든.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 최현수가 먼저 널 알아볼 테니.」

지석현의 말을 떠올리며 이설은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이설은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나와주셨네요?”

감개가 무량한 표정으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설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선뜻 의자를 빼주었다.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인 듯했다.

“대전에서 출발하셨다더니 언제 도착하셨어요?”

이설은 자리에 앉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최현수라고 했었나?

“2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혹시 늦을까 봐 일찍 출발했거든요.”

“대전에서는 여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차가 좀 막혀서 3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남자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설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에게서 도통 떨어질 줄 모르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마주 보고 앉은 거리에서 뚫어질 듯 쳐다보니 좀 불편했다.

“장거리 운전이라 피곤하시겠어요.”

아무 말이나 덧붙였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살짝 비끼고서.

“전혀요. 운전하는 거 좋아합니다.”

“……아, 그래요?”

“솔직히 털어놓자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정이설 씨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요.”

이설은 각진 얼굴 전체가 흥분감으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스치듯 한 번 본 사람과의 소개팅에 목을 맸다는 말을 듣고 정상은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남자는 여러모로 평범했다.

긴장해서 목소리 톤이 눈에 띄게 높아진 것과 잔뜩 상기된 얼굴색을 제외하면, 나름 지적인 분위기를 가진 데다 적당히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이설의 질문에도 과하지 않은 수준의 답을 내놓았다. 최소한 원재범과 비슷한 부류의 남자는 아닌 듯했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 역시 남자의 긍정적인 인상에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거부감은 들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렇다면 한두 번 더 만남을 지속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구나 싶었다. 만약 그래서 백인서가 저를 포기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사람 좋은 백인서가 그녀에게 묶여 살 수는 없었으므로.

거기까지 생각하다 이설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 자체를 해본 적이 없구나.

스무 살, 아파트 계단 위에서 첫 키스를 나눈 이후부터 그녀는 백인서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기억 속의 그녀는 늘 그와 함께였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든, 떨어져 있든 그녀의 곁엔 항상 백인서가 있었다.

사실은 그래서 버틸 수 있었겠지만.

깊고 따뜻한 암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버거움이 옅은 색으로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밤을 새워 몸을 섞은 날이면 백인서는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정이설 너라서 다행이라고.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할 뻔했냐고. 자신에게 그녀는 ‘사막의 꽃’ 같은 존재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또 중저음의 목소리로 심장 언저리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아무거라도 좋으니 그녀가 하고 싶은 걸 전부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엄마와 오빠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슬퍼하지는 말라고. 자기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하지만 도저히 참지 못할 만큼 힘에 부치면 언제든 울라고도 했다. 그럼 자신이 달래주면 된다고.

눈물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면 백인서는 말캉한 혀로 그녀의 얼룩진 얼굴을 섬세히 어루만져주곤 했다. 그런 순간들이 마냥 달콤하던 때가 있었다.

이설은 복잡한 현실은 전부 잊고 점점 더 백인서의 넓은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넉넉한 마음 크기와 더불어, 체향 또한 비할 바 없이 좋았으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한껏 기만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 있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나버렸다.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현실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무시하고 버텨내려 했으나,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점점 그 크기를 키우다가 종내에는 쓸어 담을 수도 없이 커져 버렸다.

갑작스럽게 자각해버린 현실 때문에 백인서와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달아나는 수밖에.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남자가 물었다. 여전히 그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서. 이설은 목을 가다듬고 남자에게 말했다.

“저는 딸기 스무…….”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딸기 스무디는 그녀가 백인서와 만날 때 즐겨 마셨던 음료였다. 특히 더운 여름날이면 거의 빠짐없이. 그러니 아무하고나 마실 수는 없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말을 하면서 이설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이러다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겠노라고.

무려 7년이었다. 백인서와 사귄 기간이. 그건 주변에 보이는 사물 중 백인서와 연관이 없는 걸 찾는 게 불가능할 만큼 긴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이설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차차 나아지겠지. 그럴 거야. 이 세상에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안 그래?

불편한 마음으로 괜스레 테이블 가장자리만 문질렀다. 갈 곳 잃은 마음이 손끝으로 전해진 듯 가만있지를 못했다.

“앗!”

무언가 따끔한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이설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내렸다. 천연목재를 그대로 탁자로 이용한 것 같더니 하필 손끝에 가시가 박힌 모양이다.

아, 되는 일이 없구나.

이설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세요?”

남자가 맞은편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가시가 박혔나 봐요.”

“제가 좀 볼게요.”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남자가 이설의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이런 건 바로바로 빼줘야 해요.”

처음에는 가시가 잘 보이지 않아서, 다음에는 잘 잡히지 않아서 남자는 이설의 손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들었다, 내렸다 했다. 이설이 괜찮다며 손을 빼려 해도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수선도 그런 수선이 없었다.

신기한 건, 남자가 이곳저곳을 더듬어대고 있는데도 그녀의 손이 마냥 보송보송하다는 점이었다. 원래 흥분하거나 긴장하면 습관처럼 땀이 나야 정상인데.

백인서가 잡았을 땐 어땠더라?

그와 처음 스킨십을 한 건 도암산으로 트레킹을 갔을 때였다. 정상 부근에서 발목을 접질리는 바람에 얼결에 백인서의 등에 업히고 말았었지, 아마?

그다음엔 아빠한테 뺨을 얻어맞고 나갔다가 역시 얼결에 얻어타게 된 자전거에서 그의 허리를 잡은 거였고. 세 번짼 607호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백인서의 품에 안겼다가 예상에도 없이 이루어진 키스였다.

그러고 보니 전부 얼결에 이루어진 스킨십들뿐이네. 첫 번째와 두 번째엔 심장이 콩닥콩닥하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세 번째 키스 땐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지 뭐야. 너무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서.

그가 처음 손을 잡았을 때도 그랬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와중에도 맞잡은 손바닥으로 땀이 송골송골 차올라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아, 됐어요. 이제 뺐어요. 이거요, 이거.”

남자는 여전히 이설의 손을 잡은 채로 보이지도 않는 가시를 그녀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설은 그가 흔드는 손을 보다가 여전히 보송보송하기만 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처럼 두근거림을 견디지 못해 땀이 차오를 기색은 요만큼도 없었다. 심장 또한 세트로 무반응이긴 마찬가지였다.

뛰고 있기는 한 건가?

문득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차분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해서.

그렇게 무감한 얼굴로 앉아 있는데 카페 문이 열리며 백인서가 들어왔다. 시린 가을 공기를 전신에 잔뜩 묻히고 들어온 그는 단박에 이설을 찾아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뚜벅뚜벅, 백인서가 걸어왔다. 보폭이 큰 만큼 거리도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설은 남자에게 손을 맡긴 채 입술만 달싹였다. 어쩌려는 거야?

“나가자.”

다짜고짜 손이 잡혔다. 그 바람에 이설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매섭게 내쳐졌다.

“누, 누구십니까?”

당황한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차에 시동 켜놓고 왔어.”

백인서에게 맞은편의 남자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직 이설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섭도록 깊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서.

“너 왜 이래?”

차갑게 손을 뿌리쳐보았지만 어림없는 시도였다.

“내가 뭘?”

“무례하게 굴고 있잖아.”

“아니, 먼저 선을 넘은 건 너야.”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랑 결혼 안 해주는 건 상관없어. 너한테 키스 못 하게 하는 것도, 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전부 다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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