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인서는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짓씹었다. 햇볕이 환하게 드는 카페에서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마주 앉은 정이설이 그 예쁘고 도톰한 입술로 음료를 마시며, 때로는 초록색이 점점이 박힌 커다란 눈동자를 아래로 휘어가면서 미소를 지어댈 것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그 와중에 살해용의자가 택시를 이용해 남양주에서 양평으로, 양평에서 다시 도암시로 들어온 정황이 포착되어 또 한 번 황호범의 머리 뚜껑을 열리게 했다.
문제는 용의자가 도암시에서 택시를 내린 후, 행적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길들을 요리조리 제집처럼 드나들더니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CCTV 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바람에 인서는 황호범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죄로 무려 삼십 분 동안이나 그의 두툼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개새끼, 소새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개호로새끼 등, 온갖 새끼란 새끼가 들어가는 욕은 빠짐없이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새끼 말이야. 결국 도암시가 근거지란 얘기잖아. 남양주니 과천이니 안양이니 온 경기도를 헤집으면서 그 지랄을 떤 건 전부 우릴 헷갈리게 만들려고 머리 쓴 거고.”
“그런 셈이죠.”
“와, 이 쌍놈의 새끼를 어떻게 잡아 족쳐야 분이 풀리지? 사람을 이렇게 엿같이 굴려놓고 수사망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
“일단 마지막으로 행적이 끊어진 곳부터 가보시죠? 그래야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인서는 툴툴대는 황호범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외근을 나갈 때면 운전은 늘 그의 몫이었다. 황호범은 욕설이 생활화되어 있듯 난폭 운전 역시 습관화돼 있어서, 인서는 멋도 모르고 그의 차에 동승했다가 학을 뗀 경험이 수차례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긴급 상황도 아닌데 불법 유턴은 기본이며, 황색불에 더 미친 듯이 달리기, 마구잡이로 끼어들기, 차가 밀리는 교차로에선 작정하고 꼬리물기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번은 버릇처럼 멋대로 끼어들었다가 뒤차가 한참을 쫓아온 적도 있었다. 상대 운전자는 경적까지 울리며 따라오더니 황호범의 차량 앞에 기어코 급정거를 해버렸다.
거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한 대 칠 기세로 차에서 나온 상대 운전자는 일차로 내린 황호범의 떼도적처럼 생긴 흉흉한 인상에, 그다음으로 내린 인서의 엄청난 체격에 놀라 꼬리를 사뿐히 내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때도 황호범은 인서에게 들으라는 듯 지껄여댔다.
「우리보단 저 새끼가 백배는 더 잘못한 거야. 보복 운전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옆 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걸 빌미로 장시간 경적을 울리며 쫓아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코앞에서 급정거를 하는 행위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서는 마음을 굳혔다. 다시는 황호범이 모는 차에 타지 않겠노라고.
「이러다간 범인도 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황천길 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인서는 구시렁대는 황호범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로만 외근을 다녔다. 비록 조수석에 앉은 황호범이 퉁방울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통에 귀는 무지하게 따가웠지만, 그나마 속은 편했다.
용의자가 마지막으로 CCTV 상에서 모습을 감춘 곳은 도암시에서도 가장 발달이 덜 된 지역 중 하나였다. 문제는 큰 도로와 면해 있는 상가 쪽으로는 CCTV가 가는 곳마다 포진해 있었지만, 미로처럼 얽힌 골목 안쪽으로 들어오면 그 빈도수가 눈에 띄게 확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분명 여기 어딘가로 들어갔을 텐데.”
인서는 식당과 여관, PC방, 세탁소를 비롯해 다세대주택들이 촘촘하게 밀집해 있는 지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동네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인구 밀집 지역이라 수사가 만만치 않을 듯했다.
예상대로 탐문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인근 소형 마트에서 가장 구석진 세탁소까지 꼼꼼히 훑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땅으로라도 꺼졌냐고.”
차에 올라타며 황호범이 혀를 내둘렀다.
“이 근방을 중심으로 동종 전과자나 최근에 출소한 전과자가 있나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사무실로 돌아온 인서는 용의자가 사라진 구역을 중심으로 동종 전과자와 최근 출소한 전과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명단을 뽑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명 한 명, 사건 당일 동선 파악은 물론, 오부규와의 금전 채무까지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세 흘러 어느새 일요일 오후가 되어 있었다.
“아우, 징하다, 징해.”
휴일까지 반납하고 사무실에 나온 황호범이 옆자리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난 좀 쉬었다 할란다.”
‘탁’ 하고 노트북 접는 소리가 들렸다.
“넌 계속 할 거냐?”
황호범이 슬쩍 인서를 돌아보았다. 계속되는 탐문과 야근으로 인해 눈이 퀭해진 황호범은 사우나라도 해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인서는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노트북을 접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너도 같이 가게?”
“아닙니다. 저는 이만 퇴근하려고요.”
인서의 말에 황호범이 눈을 요란스럽게 끔벅였다.
“별일도 다 있다. 사건 하나 터지면 휴일이고 뭐고 쉬는 법이 없는 녀석이 어인 일이래?”
“내일 뵙겠습니다.”
인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저를 요란하게 훑어내리는 황호범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래, 일주일 내내 밤낮없이 뛰느라 고생했으니 간만에 푹 쉬어라.”
등 뒤로 황호범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동을 걸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5시 10분이었다. 경찰서에서 약속 장소인 후암2동 블루홀 카페까지는 GPS 상으로 14분 남짓.
정이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성격이므로 지금쯤이면 이미 소개팅 장소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만약 상대 남자 역시 시간 약속에 철저한 성격이라면 그녀와 사이좋게 마주 앉아 있을 것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 풍경들 사이로, 인사를 주고받네, 음료를 시키네 하면서 부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을 두 사람의 모습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인서는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정이설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 후, 자신이 이토록 비루한 상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엑셀을 누르고 있는 발에 힘이 꾹 들어갔다. 차의 속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도로 풍경들 속으로 산란되어 흩어졌다.
* * *
소개팅 장소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단독 건물 형태의 카페였다. 이설은 차에서 내리기 전 시선을 올려 카페 전면에 부착된 간판을 쳐다보았다. 연한 초콜릿색 바탕에 선명한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간판이었다.
“……블루홀.”
이설은 카페 이름을 작게 발음하여 보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발음되어진다. 블루홀은 바닷가 얕은 수면에 형성된 깊은 구멍을 말한다.
언젠가 보았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그레이트 블루홀이었다. 너무 커서 지구의 눈이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연하늘색으로 찰랑대는 주변 바닷물과는 대조적으로 블루홀은 짙은 물색을 자랑하며 무 자르듯 선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름답다기보다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심해 공포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물 덩어리를 보면 항상 무서움이 먼저였다.
저기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겠지? 방향성은 있는 걸까? 눈에 보이는 거라곤 끝도 없이 펼쳐진 광막함 뿐인데. 깜깜하기는 또 얼마나 깜깜할까.
그런 생각들을 곱씹으면서 블루홀 이미지에서 빠져나왔던 것 같다.
「저런 곳에 빠지면 정말 무서울 것 같아. 보나마나 즉시 기절할 거야.」
백인서와 함께 단둘이 여행을 갔던 제주도 섭지코지에서였다. 이설은 무섭게 치는 파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기절하기 전에 얼른 내가 구해주면 되지.」
백인서가 곧장 대답했다. 그녀의 어깨에 단단히 팔을 두른 채로. 이설은 생각했다. 정말 백인서다운 대답이라고.
「넌 안 무서워? 저렇게나 넓고 시퍼런데? 망망대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냐.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감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라고.」
「딱히.」
「뱀도 안 무섭다, 바다도 안 무섭다. 그럼 백인서 네가 무서워하는 건 뭔데?」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거.」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나한텐 그게 제일 무서운 일이야.」
「…….」
이해가 됐다. 백인서는 부모님을 모두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잃은 기억이 있으니까. 준비할 시간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이별은 그래서 남은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긴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늘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행동하고 말해도 백인서 역시 그런 생채기가 있을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그러니까 너는 내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면 안 돼. 약속하는 거다?」
이설은 섣불리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땐 이미 달콤하기만 한 감정들 사이로 둘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들이 얽혀든 상태였다. 백인서가 좋았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커지던 때이기도 했다.
「대답 안 해주네?」
「……그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너의 바람과는 반대로 나는 이미 이별을 준비 중이니까 생각 접으라고?
「뭐, 상관없어.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니까.」
입술을 달싹거리며 대답할 거리를 찾고 있는데 백인서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바람이 불어 이리저리 날리는 이설의 머리카락을 꼼꼼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암갈색 눈으로는 연신 그녀를 다정하게 응시하면서. 마치 대답 같은 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태도였다.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