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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94화 (94/130)

94화

* * *

정이설이 근무하고 있는 병동 앞은 고요했다. 인서는 벤치에 앉아 무거운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총총했다.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3년 전이라면 반짝거리는 저 항성들이 전부 정이설의 총천연색 눈동자를 닮았느니 어쩌느니 하며 낯부끄러운 찬사들을 떠올렸을 텐데 지금은 그런 주접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십 분이 흐르고, 이십 분이 흐르고, 삼십 분이 흘렀다. 병동 주변은 한층 더 고요해졌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건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 역시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의료직원이나 환아 보호자가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는 건 눈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특히 정이설과 비슷한 체형의 사람이 나올 때면 정신을 못 차리고 뛰어댔다.

그렇게 몇 번의 실망을 경험하고 나서도 정이설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들어갈까? 그래야 나와줄 거니?」

문자를 보냈으나 정이설은 조용했다. 인서는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지그시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는 거야?

병동 출입구 쪽으로 옮겨가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역시나 개인적인 일로 정이설의 직장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짓은 할 수 없다.

인서는 도로 벤치에 주저앉았다. 결국 이렇게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하는 건가? 나오지도 않을 정이설을 기다리면서?

인서는 차가워진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정이설은 그가 병원에 도착하고 2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었어?”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핼쑥했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얼굴의 반은 될 것 같았다. 인서는 입안이 영 썼다. 인정머리 없이 굴려면 얼굴이라도 멀쩡하든지. 사람 속상하게 뭐 하자는 건데.

“전화는 왜 안 받아? 문자 해도 답장도 없고.”

“바빴어.”

정이설이 대답했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아무리 바빴어도 전화나 문자 한 통 보낼 시간이 없었을까.”

“그러게. 너무 바쁘니까 그럴 시간조차 없네.”

“…….”

“할 말 없으면 그만 들어가도 되지?”

정이설은 마치 그를 미련 못 끊고 질척대는 전남친 대하듯 했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딱 그랬다. 무언가 울컥하고 속에서 치받았다.

“너 왜 이렇게 못되게 굴어? 나 여기서 두 시간 이상 기다렸어. 최소한 이유 정도는 말해줘야 되는 거 아냐? 왜 내 전화를 안 받는지, 문자에는 왜 답이 없는지에 대해.”

“그 이유에 대해선 이미 누누이 얘기했어. 네가 귀담아듣지 않아서 그렇지. 솔직히 말하자면, 겉치레뿐인 친구 노릇도 이젠 지겨워졌고. 그게 다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로 정이설은 잘도 되받아쳤다. 그러나 인서의 귀엔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궤변들뿐이었다.

풋풋했던 스무 살, 아파트 계단에서 얼이 빠질 정도로 달콤한 첫 키스를 경험한 이후, 그와 정이설 사이엔 단 한 번도 겉치레뿐인 관계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충실했고, 매 순간이 진심이었다. 정이설이 쓰러질 듯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만해. 하나도 설득력 없으니까.”

“아직 얘기 못 들었나 보네?”

병동 밖으로 나올 때부터 내내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정이설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인서는 미간을 좁혔다.

“강라희가 얘기 안 해줬냐고.”

“내가 들어야 할 말이라도 있었나 보지?”

“꼭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정이설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주말에 소개팅하려고.”

“……뭐?”

“남자 만날 거라고.”

인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얼굴은 파리하게 질린 주제에 정이설은 그가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빨았던 예쁜 입술로 잘도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는 통보를 하고 있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 밟고 있는 남자야.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소개해준 동기 말로는 인물도 좀 된다던데?”

“그래서?”

“말했잖아.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나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네가 말하는 기회야?”

“너도 그 기회를 활용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되게 당당하네?”

인서는 서너 걸음 떨어져 있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이설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이렇게 막 나가다가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소개팅하는데 뒷감당까지 걱정해야 돼?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무슨 사이긴. 밥 먹듯 섹스하고, 그것도 모자라 서로 거기까지 물고 빨고 한 사이지.”

“너 왜 이래? 아예 상스럽게 나오기로 작정했어?”

“이건 시작도 안 한 거야. 그러니까 뒷감당할 자신 있으면 소개팅 나가.”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 이왕이면 시간이랑 장소도 알려줄까?”

인서는 겁도 없이 약속 장소와 시간을 또박또박 읊어대는 입술을 태워버릴 듯 노려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 오후 5시. 장소는 후암2동 블루홀 카페. 더 구체적으로 알려줘?”

정이설은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인서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힘겹게 꾹꾹 눌러놓았던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시끄럽게 들끓어 올랐다. 그는 무저갱처럼 낮고 깊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암갈색으로 짙게 착색된 눈동자는 정이설에게 고정한 채로.

“난 분명히 경고했어. 아무리 내가 너를 사랑해도, 이렇게 나오면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거든. 그러니까 후회할 짓 하지 마.”

“…….”

정이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그녀는 처음에 만났던 냉정한 정이설로 빠르게 돌아와 있었다. 가는 몸 주변으로는 익숙한 보호막을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이 촘촘하게 드리운 상태로.

“들어갈게. 콜이 들어와서.”

정이설이 콜폰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살짝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미련 한 줌 없이 몸을 돌렸다.

인서는 별빛이 유독 찬연한 밤하늘 아래 오롯이 혼자 남았다.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쥔 탓에 손등 위로는 힘줄이 무섭게 도드라진 채로.

정이설은 그가 병동 건물 밖에 있는데도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예전이었다면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을 그녀였는데 지금은 전부 비루한 추억 부스러기가 돼버렸다.

인서는 심장이 버석거리는 상태로 정이설이 사라진 병동 건물을 쳐다보았다. 눈앞에서 그들의 관계가 부서지고 있었다.

정이설이 작정하고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 외에는.

정이설은 전에 없이 차가웠고 심지어 시니컬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게 얼마나 자신을 상처 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제법 흘렀으나 인서는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 아래 하릴없이 서 있었다. 정이설이 함부로 조각낸 관계의 파편들을 지켜보면서. 고작 그게 다였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너 정말 실수하는 거야, 정이설. 왜인 줄 아니? 감정이란 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거든.

인서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미 한계치를 넘어버린 마음이었다. 작은 균열 하나가 견고한 제방을 무너뜨리듯, 힘겹게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의 덩어리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그건 지난 3년 동안 그가 홀로 감내해야 했던 시간의 무게와도 일치했으며, 무미건조한 제 삶을 눈부시게 만들어준 정이설에 대한 끝 간 데 없는 소유욕이기도 했다.

살면서 외부의 압력에 흔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실행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심지가 굳다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다.

정이설에게로 향하는 마음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그 마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애가 달 정도로 지난했지만, 그 결과로 얻게 된 달콤함은 혀가 아릴 정도로 극상의 달콤함이었다.

인서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것도 정이설처럼 가냘프기 짝이 없는 여자가 그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 수가 있는지에 대해.

하지만 조각나버린 관계의 파편 사이로 인서는 분명하게 보았다. 정이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그녀가 선을 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이제 그는 정이설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으므로.

그러니 어떤 새끼도 그녀와 손끝 하나라도 얽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10장. 구속되어 줄게, 기꺼이

수사전담팀은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갔다. 피해자 오부규와 금전적으로 얽혀 있는 인물은 거의 천삼백여 명에 가까웠다. 말이 천삼백여 명이지, 그 많은 사람들의 사건 당일 통화 내역과 동선을 일일이 파악하고 알리바이를 깨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사팀원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언제 끝날지 모를 지난한 작업이었다.

김모동 팀장은 최근에 발생한 사건 중엔 가장 대형사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냥 본업이 형사인 이상 ‘나 죽었습니다.’ 하고 수사에 매달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단다.

인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며칠째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 끔찍한 기분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까.

소개팅을 나가겠다고? 나를 두고? 정이설 너는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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