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야, 백 형사.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더하다간 내 명에 못 죽을 것 같다. 어차피 또 내일이면 그 새끼 태워다준 택시기사 찾아가야 할 거 아냐.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러다간 경기도 택시기사는 전부 탐문하겠어. 도암에서 과천, 과천에서 안양, 그러더니 다시 안양에서 남양주. 근데 이번엔 뭐? 남양주에서 또 택시를 탔다고? 진짜 뭐 이런 개호로새끼가 있나. 사람을 뺑이쳐도 분수가 있지.”
황호범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로 홱 집어 던졌다.
“그러시죠.”
인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열한 시였다. 황호범에게서 눈알이 빠질 것 같다는 하소연이 나올 만도 했다.
두 사람은 오늘 낮에만 해도 직접 남양주까지 달려갔던 참이다. 마지막으로 탐문이 이루어진 택시기사에게서 용의자를 남양주에 내려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확인차 간 거였다.
그런 다음 사무실로 돌아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내 CCTV만 붙잡고 있었으니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넌 곧바로 집에 갈 거냐?”
사무실을 나서면서 황호범이 물었다.
“왜요?”
“특별한 일 없으면 나랑 한잔하자고.”
“다음에 해요.”
“바빠?”
“어디 좀 들를 데가 있어서요.”
“이 시간에?”
황호범이 퉁방울눈을 끔벅였다.
“설마 또 병원에 가냐?”
대답을 안 하고 입꼬리만 슬쩍 끌어올리자 황호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간다는데 이 형님이 양보해야지.”
투덕투덕한 손이 인서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이내 멀어졌다.
밤거리를 달리는 내내 인서는 생각을 곱씹었다. 정이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 수사를 업으로 삼는 형사이면서도 마땅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이설은 관계가 좋아질 만하면 지레 방어막을 쳤다. 지치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미치겠는 건 인서 자신뿐이다.
멀리 불을 환하게 밝힌 병원 건물이 보였다. 예전엔 저 불빛과 고딕체의 병원 글자만 봐도 심장이 무섭게 뛰었더랬다. 정이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극도로 흥분이 돼서. 그러나 지금은 호흡이 턱 막혔다. 또 무슨 방어막을 마주하게 될까 봐. 어떤 말로 또 거절을 당하게 될까 봐.
처음 정이설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만 해도 자신 있었다.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마음을 바꾸겠지.
착각이었다. 정이설은 조금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굴을 파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녀를 찾아오는 내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릴 때의 정이설은 여전히 간절했고, 심지어 뜨거웠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어쩌면 백인서라는 세 글자가 액정에 뜨지 못하도록 아예 차단해 버린 걸지도 모른다.
“후우.”
인서는 답답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해보았다. 체한 듯 꽉 막혀버린 속이 도무지 풀릴 기색이 없다.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수차례 가도록 반응이 없었다.
이젠 정말 전화도 안 받겠다는 거냐, 정이설?
인서는 운전석에 앉아 죽은 듯 묵묵부답인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정이설은 며칠째 전화는 고사하고, 그가 보낸 문자나 톡에도 일체 답이 없었다. 얼마 전 함께 밤을 보낸 이후 내내 이런 상태였다.
「네 연락, 이제는 안 받을 거야. 전화해도 소용없어.」
자신을 향해 야멸치게 선언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나랑 끝내자는 거냐, 정이설? 말이 돼? 나는 하나도 준비가 안 됐는데 너 혼자만 달아나겠다고 결정하면 다냐고.
분명 그는 몸이 달아 있었다. 오랜만에 사적인 공간에서 마주하는 정이설은 열이 절절 끓어오를 정도로 아픈 상태임에도 견딜 수 없이 아름다웠고, 전신으로 내뿜어지는 달콤한 체향은 저항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를 단숨에 무장 해제시켰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걱정에서였다. 괜찮은지 잠깐 얼굴만 보고 오자는 마음으로 무작정 병원으로 찾아갔던 거였다. 맹세코, 상태가 심각하지 않으면 오피스텔에 내려주고 가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동 출입문 조명 아래서 내려다본 정이설은 한눈에도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움푹 들어간 눈과 열이 오른 얼굴을 보자 이성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는 정이설에 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자신의 속마음도 모르고 정이설은 사뭇 괜찮은 척이었다. 도무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 핼쑥한 안색을 하고서.
사정이 이러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정이설을 마음에 담아왔으며, 이미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후였다.
파리한 눈언저리에 심장이 툭 떨어지고, 가슴 한편이 안쓰러움으로 인해 욱신거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동시에 그는 눈앞의 정이설을 갈망했다. 젖은 눈자위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간절한 시선으로는 입술 언저리를 더듬었을 뿐인데 허리 아래로 무지근한 반응이 밀려올 만큼.
일방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그가 딱딱하게 발기한 아래를 거침없이 문질렀을 때 정이설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건 달뜬 한숨이었다. 거부감이 아니라.
그랬음에도 정이설은 이내 차가워진 얼굴로 돌아섰다. 오히려 더 견고해진 벽을 가녀린 몸 전체에 두른 채로.
인서는 자동차 핸들 위로 머리를 쿵쿵 찧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더니, 정이설의 오피스텔 센서 등 아래서 눈자위가 축축해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더 이상은 한계’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정말로 사정없이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계속 버티다간 괴로움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호흡을 두어 번 고른 후, 강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인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은 강라희는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였다. 인서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0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전화를 한 것도 처음인데, 하물며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니 당황할 법도 했다.
강라희와는 스무 살 겨울에 처음 만났다. 의대 합격이 결정된 정이설이 한숨 돌린 후 처음으로 소개해 준 친구였다.
같은 태권도 선수 출신인 강라희가 인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반응은 어마어마했다. 마치 꿈에 그리던 아이돌을 만난 팬 같았달까. 그녀는 숨 쉴 틈도 없이 인서의 첫 번째 올림픽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특히 결승전 경기를 회상하는 대목에선 자신이 얼마나 그의 경기력에 감탄을 했는지 삼십 분이 넘도록 구구절절 쏟아냈었다.
그런 다음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동갑이니까 말을 놓자는 제안을 했고 그때 이후로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밤늦은 시간에 불쑥 전화를 할 만큼 허물없는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적당히 친하면서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사이였다고나 할까. 본의 아니게 선을 넘은 건 인서 자신이었다.
“……어, 미안. 너무 늦게 전화한 거 아니지?”
인서는 불편한 마음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건 아닌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인서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다 솔직히 털어놓았다. 에둘러 표현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설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
「……이설이가 전화를 안 받아? 왜? 많이 바쁜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멈칫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었다. 그녀와 정이설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냥 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용의자나 그 주변인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눈동자나 숨소리 하나까지 집중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소한 단서라도 놓칠까 싶어서. 그러다 보니 아주 미세한 숨소리의 변화만으로도 상대의 심리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수사 과정에선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현실에선 딱히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이설이 오늘 당직이거든. 아마 그래서 전화 받을 짬이 없었을 거야.」
서둘러 뒷말을 덧붙이는 행동에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해졌다.
“그래? 넌?”
「나야 아까 퇴근했지. 지금 집이야. 침대에 누워서 태블릿으로 영화 보는 중.」
“쉬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전화했나 보네. 미안하다.”
인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에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사과는 무슨. 급한 일이면 새벽 한 시에도 전화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끝을 길게 늘인 후, 숨을 두어 번 쌕쌕거리던 강라희가 얼른 덧붙였다.
「정 궁금하면 병원으로 찾아가 보든지. 자정 무렵엔 보통 한가하거든.」
“그렇게 할게. 고맙다.”
인서는 전화를 끊고 이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병원 주차장이야. 병동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시간 될 때 나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또 한 번 문자를 보냈다.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래도 답이 없었다. 무시하고 병동 건물로 향했다. 어차피 답장을 기대하고 보낸 문자도 아니었다. 정이설은 지금 작정하고 이별을 수행 중인 거니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핑계라고 대며.
마음대로 해. 전화를 안 받든, 문자를 무시하든. 하지만 이설아. 넌 나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헤어질 것 같았으면 이렇게 오래도록 너 하나만 바라보고 살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