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백인서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게 문제잖아. 그러니까 시간 날 때마다 병원에 찾아오지. 나 진짜 백인서만 보면 안타까워 죽겠어. 뭐라도 해주고 싶다고. 넌 그런 생각이 정말 요만큼도 안 들어?”
“백인서랑 나, 둘 다 어엿한 성인이야. 그럼 각자의 마음은 각자가 챙기는 게 맞다고 봐.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니라.”
“그래서 넌 네 마음을 잘 챙기고 있니?”
“…….”
“너도 네 마음 못 챙겨서 허우적대는 상황이잖아. 그래놓고 무슨 소개팅이야? 엉뚱한 사람 허수아비 만들 일 있니?”
이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강라희의 말은 전부 옳았다. 사실은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백인서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엄마와의 관계, 오빠와의 관계,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에서조차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었으므로.
그녀의 아빤 엄마의 이혼 선언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먹고 할 일 없으면 취미생활이나 가지는 게 어떠냐며 한껏 비웃었다. 정말 미친 거 아닌가? 엄마를 대체 뭐로 생각하기에.
이혼 문제에 관해선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는 아빠 때문에 엄만 며칠 동안 극심한 우울감으로 힘들어했다. 그러더니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기왕에 일이 이렇게 틀어졌으니 이혼 소송을 진행할 거라고.
이설은 엄마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협의이혼이 물 건너간 이상, 진흙탕 싸움이 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 백인서와 헤어지고 힘들었을 때 선배 중 한 사람이 그랬다. 정 마음을 다잡는 게 힘들면 그 남자와 감정 교류 없이 섹파로 지내보는 건 어떠냐고. 괜히 끊어내니까 더 애틋한 거라고. 그냥 두면 사랑은커녕 손 닿는 것조차 징그러워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잠시 잠깐 솔깃했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차마 그런 짓을 감행하지 못한 건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다. 쓰레기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다른 남자를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내가 백인서가 아니어도 연애라는 걸 할 수 있는지 아닌지. 그렇지 않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 안 그래?”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선 그게 맞으니까. 무를 생각 없어.”
단정적으로 흘러나오는 대꾸에 강라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백인서가 너 포기라도 한대? 딴 남자랑 소개팅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데이트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설 거 같으냐고. 눈 돌아가지 않을까? 아님, 제대로 미쳐버리든지.”
“그러게.”
이설은 씁쓸하게 웃었다. 소개팅 이후의 상황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너 그거 되게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마음 같았으면 백인서가 3년씩이나 네 옆에 머물렀겠니? 다른 여자들한텐 눈길 한번 안 주면서? 너도 마찬가지야. 말로는 헤어졌다면서 인서를 계속 곁에 두고 있잖아.
강라희는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아주 정색하며 말을 쏟아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너랑 백인서, 둘이 같이 하룻밤 보냈던 거 아냐? 며칠 전 너 아팠을 때 말이야.”
“…….”
“맞구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둘이 밤새도록 같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너희 둘은 어쩜.”
백인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했다. 오렌지색 센서 등 아래서 이젠 한계라고 속삭이며 이설의 정수리와 귓불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열로 정신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백인서에게 매달렸다. 더 키스해달라고.
그러니 뭐든 하는 게 옳았다. 백인서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니까 만나본다고. 아무라도.”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각자 마음 각자가 챙기는 게 맞다며. 그럼 백인서도 자기 마음 자기가 알아서 챙기게 내버려 둬. 괜히 소개팅 같은 거 나가서 안 그래도 힘든 사람 상처 주지 말고.”
“난 네가 왜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두둔하고 나서는지 모르겠어. 오히려 내가 불편하고 싫다는 데도 계속 찾아오는 백인서를 비난해야 맞는 거 아냐?”
“그건 아니라고 봐.”
강라희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에 일말의 의구심도 없는 것이다.
“어째서?”
“철벽은 원재범 같은 상또라이나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수컷들한테나 치는 거지 백인서는 적용대상이 아니거든.”
“너 진짜 편파적인 건 아니? 백인서한테 뭐 얻어먹었어?”
어이가 없으니 별말이 다 나왔다.
“어, 나 완전 편파적이야. 하지만 누구라도 백인서가 널 쳐다보는 눈빛을 한 번이라도 대하고 나면 나랑 똑같은 소리 하게 될걸?”
강라희의 말처럼 원재범은 지독히도 끈질겼다.
재수를 하던 시절, 원재범은 내내 사람 피를 말리더니 의대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이설을 찾아왔다. 대학입학 선물로 자기 아버지가 사줬다는 최신형 BMW를 떡하니 타고.
그러면서 툭하면 도암대 의대는 수도권에 있지만 사실상 지방대 의대 아니냐는 헛소리를 지치지도 않고 지껄여댔다. 그뿐이 아니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눈초리로 캠퍼스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마치 함량 미달의 낙제생들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곤 했다. 그 와중에 어찌나 틈만 나면 찾아오던지 이설의 의대 동기들 중 원재범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재수학원에서 그랬듯 이설은 시종일관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찾아오거나 말거나 아예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그러나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결국 백인서의 귀에까지 원재범의 행실이 들어가게 되었다.
「뭡니까?」
이설의 근처에서 얼쩡대는 원재범에게 백인서가 던진 첫 마디였다.
「그러는 댁은 누구신데요?」
원재범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백인서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아주 거만하고 되바라진 기색으로.
「정이설 남자친군데, 몰랐습니까?」
「아아, 난 또.」
원재범이 표나게 썩소를 날렸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나.」
원재범이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이죽거렸다. 백인서는 눈썹만 슬쩍 치켜 올렸을 뿐이다. 원재범보다 한 뼘은 더 큰 키로 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면서.
「음, 면전에 대고 이런 말 하면 듣는 입장에선 되게 기분 나쁘겠지만.」
「이미 충분히 기분 나쁘니,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간단히 하시죠?」
씩 웃고는 원재범이 이설을 향해 모종의 눈초리를 던졌다.
「지금은 괜히 튕기느라 나를 자꾸만 밀어내는데, 조만간 받아들일 테니 미래의 남자친구라고 해두죠.」
미친 소리를 떠들어대는 원재범에게 백인서는 그저 싸늘하게 웃었다. 황당하다는 듯. 그러더니 거들먹대는 원재범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누구 맘대로.」
「뭐, 정이설이 대주기라도 했어요? 되게 자신 있네.」
원재범이 이죽거렸다.
「후진 새끼.」
「남친이 있다 한들,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는데, 어쩌죠?」
「하, 씨발.」
백인서가 성큼 다가섰다. 원재범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죽고 싶어 간이 배 밖으로 뛰쳐나왔나 봐?」
예의바르게 굴던 백인서의 눈빛이 180도 변했다.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서슬 퍼런 기운에 원재범은 감히 대꾸도 못 하고 입술만 뻐끔댔다.
백인서는 190이 넘는 장신에 어깨가 위압적으로 떡 벌어져 있는 데다 눈빛마저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어서, 그때만큼은 정말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뻔뻔한 원재범이 입술을 두어 번 어버버거리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날의 분위기는 뭐랄까. 꼭 야생동물들이 서로 기 싸움을 벌일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는데, 백인서는 원재범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상위 포식자의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알고는 있었다. 백인서가 싸움 상대를 대함에 있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맹수 기질이 다분하다는 걸. 그래서 결정적일 때는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만큼 무자비하게 돌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올림픽 경기를 통해 충분히 체감하고 있던 바였다. 그랬으니 원재범이 단박에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쳤겠지.
“어쩌면 나 말해버릴 수도 있어.”
양치를 하기 위해 칫솔과 치약을 챙기던 강라희가 불쑥 말했다.
“뭐를?”
이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 소개팅 나가는 거. 백인서한테 다 말해버릴 수도 있다고.”
강라희가 비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 세게 맞을 백인서를 생각하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말이야.”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일회성으로 끝날 소개팅도 아니니까.”
“뭐? 너 지금 제정신이야?”
“혹시 알아? 백인서도 이 기회에 소개팅을 하게 될지.”
“그걸 도대체 말이라고.”
“그래야 서로 공평한 거잖아.”
황당한 나머지 아랫입술이 턱까지 내려온 강라희를 두고 이설은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머리가 여지없이 지끈거렸다.
* * *
“와, 진짜 좆같네. 이 새끼 못 돌아다녀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냐? 도대체 택시 타기 전에 그 주변을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냐고. 이러다가 정말 눈알 빠지겠네.”
며칠에 걸쳐서 낮에는 택시회사와 기사를 탐문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선 밤늦도록 CCTV를 들여다보던 황호범이 기어코 욕설을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용의자는 택시를 갈아타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수백 미터, 때로는 1킬로미터 이상을 배회하면서 종적을 감췄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러니 성질 급한 황호범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