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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91화 (91/130)

91화

인서야, 너는 너무나 투명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에 큰 위로가 돼. 그래서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자꾸만 흔들려. 내가 이러는 건 네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래. 정말 미안해.

“네 연락, 이제는 안 받을 거야. 전화해도 소용없어.”

“뭐?”

“그게 맞는 일인 것 같아.”

이설은 얼이 빠진 백인서를 뒤로하고 병동 안으로 들어왔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강라희가 물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야, 정이설.”

이설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재촉하듯 강라희가 이설의 어깨를 툭 쳤다.

“어? 뭐라 그랬어?”

“내가 두 번이나 물었거든?”

“……뭘?”

“이번 주말에 뭐 할 거냐고.”

“글쎄.”

“너랑 나 둘 다 간만에 오프잖아. 특별한 일 없음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고.”

이설은 섣불리 대답을 못 했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지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별로야?”

“그건 아닌데 좀 쉬고 싶어서. 머리도 복잡하고.”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까지는 아니고,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혹시 또 오빠 문제야?”

“그것도 있고.”

이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강라희는 백인서도 정확하게 모르는 이설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더 먼저 친구가 된 윤송아에게도 말하지 않은 집안일을 강라희에게 전부 털어놓은 이유는 가장 가까이에서 근무하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잘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힘든 재수 기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응원하면서 공유한 덕분일 수도 있고.

그뿐 아니라 강라희는 이설이 왜 백인서에게 이별을 통보했는지 속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백인서에 대한 이설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막상 그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선 강력히 반대했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명료했다. 그녀도 백인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지면 절대 버틸 수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강라희는 그런 자신의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동기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개중에는 반죽 좋게 이설의 맞은편으로 떡하니 식판을 놓는 친구도 있었다. 흉부외과에서 3년 차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지석현이었다.

“생각 좀 다시 해봤어?”

자리에 앉자마자 지석현이 대뜸 이설에게 물었다.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면서.

“관심 없다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이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벌써 몇 번째 거절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돌려 말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 성가셔서 대놓고 딱 잘라 거절한 것만도 벌써 두 번이나 됐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생각해줘라. 내 친구 지금 상사병 걸려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다.”

“어째 요즘 잠잠하다 했어. 제발 작작 좀 해라, 지석현, 응?”

강라희가 숟가락으로 식판을 한번 콱 찍더니 지석현을 째려보았다.

“워워, 강라희. 그 공격적인 동작과 희번덕대는 눈동자는 뭐냐?”

지석현이 상체를 움찔 뒤로 물렸다.

“조용히 밥 좀 먹게 내버려 두라고. 정이설한테 되도 않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눈이 있으면 보일 거 아냐. 얘 지금 어젯밤 내내 당직 서서 피곤에 찌든 몰골인 거. 너도 같은 일 하면서 진심 그러고 싶냐?”

“우와, 비속어 남발까지. 강라희 너 이제 보니까 워딩 좀 주의해야겠다.”

“내 워딩이 어디가 어때서?”

“점잖지 못하게 개수작이 뭐냐, 개수작이. 격 떨어지게 말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밥이나 드시라고. 격 떨어지는 워딩 더 늘어놓기 전에.”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이 자식이 보통 찰거머리여야 말이지. 알고 보면 나도 피해자라고.”

지석현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제 딴에는 지긋지긋한 모양이었다.

“대체 그 찰거머리가 누군데?”

“있어, 고등학교 친구.”

지석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 밟고 있는 최현수라는 녀석인데, 나름 그쪽 분야에선 브레인이야. 성실하기도 하고.”

“그 성실하신 브레인께서 정이설을 어떻게 알고?”

“얼마 전에 나 만나러 병원으로 찾아 왔다가 스치듯 지나가면서 정이설을 봤거든. 그때부터 아주 난리, 난리, 생난리다. 꿈에 그리던 자기 이상형이라고. 하루 걸러 전화를 해대는 통에 내가 아주 피가 마른다.”

지석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한숨까지 쉬면서 덧붙인다.

“난 진짜 최현수 걔가 여자한테 그렇게 목매는 거 태어나서 처음 봤잖아.”

“어련할까.”

강라희가 입술을 비뚜름하게 빼물었다. 정이설과 근 십 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저런 식으로 들이대는 남자들의 수가 못해도 열 트럭은 되는 것 같았다. 이건 뭐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수준으로 채이니, 이제는 이골이 나서 상사병 직전의 남자들을 봐도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음, 이번엔 너의 차례더냐? 고작 이런 식의 하찮고 시들한 느낌?

“최현수 걔가 알아주는 영재고 출신인 데다 외모까지 좀 돼서 옛날부터 여자들이 알아서 들러붙는 스타일이었거든. 그래서 자식이 여자에 한해선 콧대가 정수리도 모자라 천장까지 뚫을 기세로 올라붙어 있는데, 우연히 정이설을 한번 보고 나더니 그 높던 콧대가 아예 신발 밑창까지 내려왔어. 구질구질할 정도로 읍소한다니까?”

“뭐, 상대가 정이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불쌍해서 어쩌냐?”

강라희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왜?”

“너 몰랐냐? 정이설 애인 있는 거.”

“무슨 헛소리야. 내 귀로 직접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

지석현이 어서 대답해보라는 듯 이설을 건너다보았다.

“없는 거 맞아.”

이설은 담담히 대꾸했다.

“야, 정이설.”

강라희가 곧바로 쳐다보았으나 이설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내 말 틀린 거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너 어쩜…….”

“그럼 어떻게, 최현수랑은 날짜 잡아도 되는 거야?”

안도감으로 얼굴이 활짝 핀 지석현이 몸이 바짝 달아서 물었다.

“시간 맞으면 못 할 것도 없지.”

“어?”

지석현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서.

“소개팅 하겠다고. 언제가 시간이 편해?”

이설은 내친김에 시간까지 들먹였다. 놀란 강라희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옆얼굴이 벌에 쏘인 듯 따끔거렸으나 무시하고 지석현 쪽만 바라보았다.

“최현수야 너만 좋다면 당장이라도 달려오지 않겠냐? 얼른 너 편한 시간이나 대 봐.”

“이번 주말에 오프라서 시간이 비긴 하는데.”

이설은 고저 없는 톤으로 대꾸했다.

“그럼 그때로 약속 잡는다?”

“……응.”

“너 진심이지?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지 지석현은 몇 번이고 재확인을 했다.

“날짜까지 정해놓고 딴소리 같은 거 안 해. 그렇게 매너 없는 성격 아니라고.”

“너 성격 똑 부러지는 거야 내가 너무 잘 알지. 한두 해 겪었냐? 난 그동안 네가 하도 남자들한테 철벽을 치니까 믿어지지 않아서 그랬던 거지.”

지석현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 끝머리에 웅얼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대시해보는 건데, 라고.

“야, 지석현. 영양가 없는 주접은 제발 넣어둬라. 지금도 충분히 듣기 싫어 죽겠으니까.”

강라희가 싱글대는 지석현에게 독 오른 말벌처럼 톡 쏘아붙였다.

“부러우면 너도 소개팅 하나 잡아줄까? 내 주변에 괜찮은 친구 되게 많은데.”

“거절하겠습니다.”

“진짠데. 의대를 필두로, 공대, 인문대, 하다못해 체대까지 종류 불문 골고루 포진해 있어. 넌 그냥 취향에 맞는 대로 고르기만 하면 된다고.”

“필요 없거든?”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강라희는 기어코 쫓아와서 따지듯 질문을 쏟아부었다.

“너 정말 그 소개팅 나가게?”

“안 나갈 이유라도 있어?”

“백인서는 어쩌고.”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뭐?”

강라희가 황당한 얼굴로 이설을 쳐다보았다.

“왜 나오냐니? 그럼 이 상황에서 백인서가 나오지, 다른 상황에서 나와야 해?”

“백인서랑 나 헤어졌잖아. 이젠 그냥 고등학교 동창일 뿐이라고.”

“전혀 안 그래 보이니까 문제지.”

강라희는 아주 단정적이었다. 여전히 정이설과 백인서 사이엔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백인서에게서 벗어났든 아니든 그건 제3자인 강라희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연애 당사자도 아니지 않은가.

“남들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신경 안 써. 미안하지만 강라희 네 생각도 마찬가지야.”

이설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같은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건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무려 3년이나 쳇바퀴 돌듯 이어져 온 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한결같이 찾아오는 백인서가 있었다.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언젠가는 이설이 마음을 바꿀 거라고. 강라희 역시 비슷한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백인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네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백인서를 두고 이러는 건 진짜 아니라고 봐. 뻔히 상처받을 거 안 보이니?”

“우리 이미 헤어졌어. 그 말만 몇 번째인 줄 알아?”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의미 없이 계속되는 설득은 이설을 지치고 불편하게 했다. 진심으로 그만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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