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누군데 안 받고 그래?”
옆에서 이설을 부축해주던 강라희가 고개를 쭉 빼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백인서잖아. 근데 왜 안 받아?”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눈치 빠른 강라희가 이설의 손에서 냉큼 휴대폰을 잡아채듯 집어갔다.
“저기…….”
받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강라희는 이미 통화버튼을 누른 뒤였다.
“이설이 지금 좀 아픈데.”
그러고는 기회다 싶었는지 백인서에게 그녀의 현재 상황을 줄줄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오한도 있고 열도 꽤 심해. 약? 당연히 먹었지. 근데 안타깝게도 별 차도가 없네?”
휴대폰을 고쳐 쥐며 강라희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어, 당직이고 뭐고 그냥 보내려고. 자기 딴엔 버텨보겠다고 고집부리는데 오기로 될 일이 아니거든.”
전화선 너머에서 백인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강라희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또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깜짝 놀랄 건 또 뭐냐. 그 정도로 중환자는 아니거든? 누가 정이설바라기 아니랄까 봐 아주 혼비백산하셨지.”
강라희가 입을 비뚜름하게 빼물더니 이내 전화선에 대고 덧붙였다.
“당직이야 내가 대타 뛰면 되는 거고. 나? 아니야, 그런 거. 어차피 봐주던 환아 때문에 새벽까지는 있을 생각이었어. 그러는 넌 어딘데.”
백인서에게 질문을 한 뒤 귀를 쫑긋하고 있던 강라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병동 앞이라고? 그럼 잘됐네. 택시 부를 것도 없이 백인서 네가 집까지 데려다주면 딱 되겠다.”
이설은 전신으로 퍼져나간 몸살 기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강라희가 백인서와 주고받는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들었지? 백인서 바로 요 앞이래.”
제멋대로 이설의 상황을 전달해주고는 강라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왜 필요도 없는 말을 전하고 그래. 네 말처럼 중환자도 아닌데 집이야 알아서 가면 그만이지.”
오한 때문에 목소리가 뚝뚝 끊어져서 나왔지만 고집스러운 눈빛만으로도 의사전달은 충분했다. 강라희는 귓등으로 대충 흘려들으며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이 밤중에 누가 운전하는지도 모르는 택시보단 백인서가 오만 배는 더 낫지 뭘. 그래야 나도 안심이 될 테고.”
이설은 더 말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어허, 내가 부축해준다니까.”
강라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됐어. 나 혼자 가도 돼. 너 할 일 많잖아. 하윤이한테도 가봐야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순간적으로 바닥이 일렁이면서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그 몸으로 잘도 혼자 가겠다.”
백인서는 병동 출입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그는 이설을 발견하자마자 성큼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이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깊고 서늘한 눈동자로 하나하나 새겨넣을 듯 꼼꼼하게.
이설은 의도치 않게 몸을 위축시켰다. 눈을 감아도 아무 때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암갈색 눈동자가 염려를 한가득 담고서 그녀의 창백하게 달아오른 이마와 볼은 물론이고 언뜻 보이는 쇄골과 어깨선까지 세심하게 더듬어 내려갔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자동차 전조등 불빛에 놀란 생쥐의 기분이 이럴까. 미동 없이 서 있었으나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입은 또 왜 꾹 다물고만 있는 건지. 뭐라도 한마디 해주었으면 차라리 덜 어색하겠는데.
이설은 입안의 연한 점막을 가만히 잘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스러운 사람은 그녀 외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백인서는 마치 보호자처럼 구는 자신의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아 했고,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강라희는 그런 백인서의 행동을 더없이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안 그래도 돼. 얘가 괜히 오버한 거야.”
이설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가능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백인서에게 별일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서.
“내 눈엔 당연히 오버해야 할 일로 보이는데?”
돌아온 대답은 기대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지만.
“내가 정이설 너 한두 해 겪어봐? 무려 18년을 알아 왔어. 눈빛만 봐도 감 온다고. 이 정도 상태면 지금껏 봐온 중에 가장 안 좋은 축이야.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 전혀 안 먹힐뿐더러 수긍할 생각도 없으니까.”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데야 별수 없다. 이설은 조가비처럼 입술을 꾹 감쳐 물었다. 수긍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백인서가 몸을 바로 했다.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 그대로 있어.”
택시를 타고 가겠다며 우기는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백인서는 이미 그녀의 열 오른 얼굴과 쓰러질 듯한 몸을 봐버렸고, 그 결과 눈동자가 전에 없이 서늘해졌다. 그럴 때의 백인서를 말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비록 그녀일지라도.
“얌전하네?”
흡족한 듯 백인서의 커다란 손이 이설의 볼을 슬쩍 쓰다듬고는 못내 아쉽다는 듯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이야, 진심 애틋하다, 애틋해. 어떡하면 저런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볼 수가 있는 거냐, 응? 백인서 쟤한텐 남들 다 있다는 권태기도 없나? 절절 끓는 감정이 그냥 막 무한정으로 샘솟아? 그런 거야?”
주차장 쪽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강라희가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그러게. 나도 이해가 안 가네. 어떡하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는지.
백인서가 무슨 마음인지는 이설 자신도 모르겠다. 그렇게 밀어내는데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걸 보면 그녀와 뇌 구조 자체가 아예 다른 걸지도. 만약 자신이 백인서의 입장이었으면 사랑이고 뭐고 치사해서라도 마음을 접었을 텐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이설이 평소에 보이는 노골적인 거부 의사에도 백인서는 그다지 화가 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끔씩 상처받은 눈빛만 은연중에 드러내 보일 뿐. 이러니 죄책감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된다.
* * *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했는데, 마음먹은 보람도 없이 차에 타자마자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백인서는 운전을 참 점잖게 했고, 그가 모는 조수석에 몸을 묻고 있다 보면 저절로 편안해지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그런데 오늘 밤은 약 기운까지 솔솔 올라오는 마당이니 쏟아지는 잠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잠에 취한 핼쑥한 얼굴 위로 백인서의 시선이 수시로 머물렀다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이설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눈이 겨우 떠진 건 몸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나서였다. 그녀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한 백인서는 이설을 깨우는 대신 직접 안아서 데려가기로 결정한 듯했다. 그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이별을 감행하기 전 그의 아파트에서 몸을 섞고 나면 욕실까지 데려다준다며 숱하게 해온 일이었으니까.
이설은 어지럽기도 하고 말싸움을 벌일 힘도 남지 않아서 그냥 얌전히 있었다. 걸어가겠다고 우겨봐야 어차피 들어줄 백인서도 아니었지만.
그러면서도 백인서는 이설이 오피스텔 비번을 누를 땐 습관처럼 고개를 돌리고 섰다. 누가 현직 형사 아니랄까 봐 개인정보에 한해선 무섭도록 철저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현관을 지나 오피스텔 내부로 발을 들이려다가 백인서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왜?”
힘이 다 빠진 상황에서도 물었다.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백인서는 정말 묘한 표정이었다.
“되게 들어와 보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들어와 버렸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백인서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까 별것도 없지?”
이설의 물음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네가 자는 곳인데 그럴 리가. 냄새부터 미치게 좋은 건 아냐?”
“…….”
“여기서 정이설 네가 먹고, 자고, 생활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 진짜 이상해진다.”
“이상할 것도 많다. 대한민국 직장인들 대부분 다 이렇게 살아. 나라고 특별할 거 하나 없어.”
“정말 그렇다고?”
백인서가 상체를 숙이고 눈을 맞춰왔다. 열에 달뜬 동공 속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이목구비가 한가득 들어찼다. 내내 잠잠하던 심장이 불현듯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 실없이 아무것에나 의미 부여하는 습관 좀 버려.”
“정이설 네가 사는 곳인데 어떻게 아무것일 수가 있냐.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럼 성전이라도 된다는 거야?”
“맞다, 성전. 그거 표현 좋네.”
비웃음 삼아 농담으로 건넨 말에 백인서가 거하게 맞장구를 쳤다. 이설은 뭐라 대꾸하려다가 스르르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정신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저기…….”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의 팔을 잡았다. 오한도 오한이지만, 계속 안겨 있다 보니 어지럽기도 하고 이래저래 울렁거리던 속마저 금방이라도 안에 든 걸 쏟아낼 듯 메스꺼웠다.
“미안한데…… 그만 내려줘.”
숫제 부탁하는 목소리가 돼버렸다.
“어, 미안. 너 아픈 줄도 모르고 너무 내 생각에만 취해 있었지?”
백인서는 그새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고작 이설의 기운 없는 말투와 손동작 하나 때문에.
그는 침대로 걸어가서 이설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두 발에서 신발을 벗겨냈다. 단순한 디자인의 플랫슈즈가 그의 손에 들어가자 마치 어린아이 신발처럼 크기가 작아져 버렸다.
현관에 신발을 내려놓고 온 백인서가 침대 옆에 서서 물었다.
“잠옷 어디 있어?”
“왜?”
“그러고 잘 순 없잖아.”
걱정이 가득 배인 시선으로 백인서가 셔츠와 바지 차림의 이설을 훑어내렸다.
“됐어. 내가…….”
이설은 잠시 망설이다 몸을 일으켰다. 무슨 중환자라고 잠옷까지 대령하라고 시킬까.
“어딨는지 말만 해. 괜히 몸도 안 좋은데 일어나지 말고.”
커다란 손이 이설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단호하게 나와?”
“네가 아프니까.”
백인서는 자못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간결한 대답만큼이나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에도 무시 못 할 힘이 한가득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