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용의자를 태운 택시기사는 일곱 번째로 탐문을 나간 택시회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스물네 개나 되는 택시회사를 전부 탐문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만약 운이 좋지 않으면, 도암시 소재의 택시회사로도 모자라 인근 안양이나 의왕, 더 멀리는 평택과 안성, 심지어는 거리를 더 넓혀 서울 소재의 택시회사까지 탐문 해야 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거야말로 황호범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뺑이치는 일이었다.
인서와 호범은 해당 택시기사의 직접 증언과 당일 운행기록을 꼼꼼히 확인한 후, 용의자가 내렸다는 하차 장소 인근 지역의 CCTV까지 전부 확보한 다음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이설은 미간을 두어 번 문질렀다. 눈은 뻑뻑했고 머리는 쪼개질 듯 아팠다.
“하필 당직인데 몸 상태가 말이 아니네.”
찌푸려진 시야 사이로 길게 이어진 복도가 보였다. 오늘과 내일 사이 그녀가 몇 번이고 지나가야 할 복도였다. 원래도 길었던 복도가 오늘따라 유독 더 길어 보이는 건 그만큼 감정의 후유증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틀 전 그녀의 엄만 뜬금없이 이혼 선언을 했고, 감정이 격해진 이설은 눈물샘이 전부 바닥날 정도로 펑펑 울어버렸다.
엄마와 오빠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곱씹어대느라 밤잠을 설쳤더랬다. 사실상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새벽녘에 까무룩 선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깜깜했다. 어둠 속에서 이설은 망연히 생각했다.
이젠 온전히 그녀의 몫이겠구나. 엄마도, 오빠도.
늘 원하던 일이었고 기꺼이 떠맡을 의향도 충분히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은 계속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떡하지, 인서야? 이젠 정말 너를 마음속에서조차 밀어내야겠네?
처음엔 그녀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다음엔 자신의 선거판에 백인서를 이용하려는 아빠의 파렴치한 이기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밀어냈다. 이제 엄마까지 이혼을 하게 되면 아주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근데……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이설은 막막한 어둠 속에 누워 제 안에 웅크리고 있는 심연을 천천히 더듬었다.
백인서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가족이나 겉으로 드러난 상황은 핑계고 사실은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환상 자체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분명 엄마와 아빠도 뜨겁게 사랑을 했었을 텐데.
아빠가 언젠가 무용담처럼 말했다. 머리털 나고 할아버지에게 처음 대든 게 엄마하고의 결혼 때문이었다고. 그땐 정말 엄마가 아니면 죽을 생각이었다고도 했다.
가정을 해봤다. 오빠만 아니면 지금도 예쁘게 사랑하고 해로했을 두 사람이었을까, 하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상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사랑을 했어도 결정적인 문제가 생겨버리면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게 사랑의 본질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약’이란 가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살면서 숱하게 깨닫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가정보다 더 비참한 자기 위안은 없다는 걸.
백인서도 지금은 마냥 맹목적일지 모르나 삶의 고단함에 무섭게 치이고 나면 본의 아니게 마음밭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이설은 두려웠다. 사랑과 결혼의 최종 결과물이라는 것이 결국엔 참혹한 모습으로 그녀와 백인서의 삶에 깊숙이 똬리를 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빤 지금도 이따금씩 엄마를 바라본다. 더없이 애틋하고 안쓰러운 눈길로.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싶지는 않다. 더불어 엄마가 아빠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에도.
그러나 뒤틀리고 기괴하게 변해버린 사랑은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녀와 백인서라고 그런 끔찍한 종착지에 도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실은 그토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결말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좀 더 독해질 필요가 있는데.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서른이 돼버렸잖아. 이러다간 정말 백인서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르게 될 거야.
이설은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꾹 감았다. 잠이 올 리가 없다. 머릿속에선 엄마와 오빠가 연신 번갈아 가며 어른거렸다. 지우개로 지우듯 힘겹게 두 사람의 잔상을 밀어내면 비워진 그 자리로 기다렸다는 듯 백인서의 얼굴이 오롯하게 들어찼다.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뻑뻑한 눈과 솜뭉치처럼 축 처진 몸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파리한 얼굴로 거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넌 뭐 하고 있어? 아직도 자?
무심코 백인서를 떠올리다 이설은 피식 웃었다. 틈만 나면 이런 상태가 돼버렸다. 그대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오래도록 샤워를 했다. 그나마 조금 나았다.
문제는 출근한 뒤였다. 머리 위로 묵직하게 두통이 일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몽롱해지기까지 했다. 겨우 하루 이틀 잠을 설쳤다고 이런 상태가 될 리는 없었다. 며칠씩 잠을 제대로 못 자고도 버틴 날이 손에 꼽지도 못할 정도로 수두룩했으니까. 오늘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아야 옳았다. 기껏해야 조금 피곤한 정도에서 그쳤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몽롱하고, 근육이며 관절 마디마디가 뻐근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급기야 저녁을 먹을 즈음에는 몸이 뜨끈해지면서 전신으로 열이 확 올랐다.
“너 괜찮겠어?”
함께 저녁을 먹던 강라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경 쓰지 마.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왜 못 잤는데.”
“그럴 일이 조금 있었어.”
이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먹는 데만 열중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모래를 씹는 듯 겉돌았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맛있으려고 먹는 밥도 아니었다. 그냥 허기만 때우기 위해서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을 뿐. 그렇지만 줄어들다 못해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달아나 버린 입맛이었다. 없는 식욕을 달래가며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불쑥 치밀어오르는 토기는 참기 힘든 덤이었다.
이설은 동기와 선후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식당에서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 싶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내가 어지간해선 이런 말 안 하겠는데, 너 좀 많이 심각해 보여. 얼굴이고 목이고 전부 발그레하다고. 이대로 근무할 수 있겠어? 내가 대신 당직 서줄까? 아니면 시간 되는 애로 알아봐 줘?”
“됐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냥 흔한 감기몸살이야.”
“야, 네가 의사냐? 맘대로 진단을 내리게.”
“어, 나 국시 합격한 의사야. 여태 몰랐어?”
무심한 얼굴로 되받아치자 강라희가 어이가 없는지 피식거렸다.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지, 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주제에 말이야.”
“나한테 관심 끄고 먹던 밥이나 마저 먹지? 우리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저녁 먹고 대충 약 먹으면 해결돼. 새삼스럽게 굴지 좀 마. 몸살 한두 번 겪어?”
“아무리 봐도 그냥 넘어갈 상태가 아니니까 그렇지.”
강라희는 영 찜찜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괜찮다는 데도 기어코 퇴근까지 제쳐두고 이설의 옆을 지켰다.
“너도 참. 우리 엄마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지극정성이야? 환자 인계도 다 끝났는데 그냥 집에 가.”
미안한 마음에 핀잔을 주었다.
“암말 마. 챙겨줄 때 이 강라희의 대가 없는 호의를 맘껏 즐겨. 아무한테나 베푸는 호의 아니니까.”
“너 피곤할까 봐 그렇잖아.”
강라희가 이렇게 나올수록 이설은 미안한 마음이 도리어 더 커졌다.
“네 말마따나 우리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도저히 피곤해서 못 참겠으면 어련히 알아서 사라질까. 그리고 어차피 나 퇴근 못 해.”
“왜?”
“하윤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계속 옆에 있어 주려고.”
“그 정도야?”
“어, 오늘 밤 내내 지켜봐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미안할 필요 없어. 순전히 너 때문에 여기 붙어 있는 건 아니니까.”
강라희가 씩 웃고는 이설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에게도, 환아들에게도 다정하기 그지없는 강라희의 마음 씀씀이 때문에.
“하여간에 다정해서는.”
“내가 원래 천성적으로 다정해. 엄청난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괜히 하고 많은 과 중에 인기 개뿔도 없는 소아청소년과를 택했겠냐고. 그게 다 이 다정다감한 성격을 진료에 활용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겠냐?”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 대답에 이설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어젯밤 이후로 내내 쪼개질 듯 아프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버텨내나 싶었는데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밤 10시가 넘어가자 근육통과 함께 오한이 극심해졌다. 전형적인 오한을 동반한 발열 증세였다.
“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미련 떨지 말고 집에 가. 내가 택시 불러줄게.”
이설 대신 콜을 처리하고 돌아온 강라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전혀 미안할 일 아니니까. 당직 서기 싫다고 아무 이유 없이 잠수 타는 후배 놈들도 있는 마당에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라고. 누구도 뭐랄 사람 없어. 솔직히 있어 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미안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
이설은 순순히 인정했다. 여기서 더 버티는 건 강라희뿐만 아니라 다른 의료진들에게도 민폐였다. 수시로 울려대는 콜을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짐만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설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 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택시 부른 다음에 일어나.”
강라희가 얼른 다가와 몸을 부축해줬다.
“바로 불러줄 테니까 잠깐이라도 의자에 앉아 있어.”
“아니야. 택시 정돈 내가 부를게.”
거절의 의미로 손을 내저은 다음 휴대폰을 켜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 위로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떴다. 입안이 바짝 마르면서 갈등이 일었다. 받고 싶은 마음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정확히 반반이었다.